천풍전설 82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82화
82화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계단으로 향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쳐다보는 호위 무사들에게 밀려서 한쪽으로 비켜섰다.
백초령은 그들에게 미안함을 느꼈지만 일절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등왕각은 외부에서 보면 삼 층으로 되어 있어도 내부는 칠 층이나 되었다. 백초령과 위태곤은 중간에서 멈추지 않고 곧장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꼭대기 층에서 바라본 포양호는 넓고도 넓어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 멀리 어딘가에 신검문이 있겠지? 아버지도, 언니도…….’
하지만 그 어디에도 풍천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풍천, 정말 죽은 거야? 보고 싶어, 풍천. 앞으로는 절대 게으르다고 뭐라 하지 않을게. 먹고 싶으면 말해, 내가 아버지 잉어로 요리해줄 테니까. 그러니 돌아와, 풍천…….’
위태곤은 그녀의 옆모습만 보고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흥! 풍천, 그 자식을 생각하나 보군.’
이미 죽은 놈이었다. 그곳에서 그놈이 살아 나올 확률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아니 천에 하나, 만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불가능.
맹자가, 태산을 짊어지고 북해를 넘는 일을 불가능에 비유했다고 했던가?
풍천이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잊겠지. 지금은 그냥 놔둔다만 최대한 빨리 잊어라, 백초령. 아니면 내가 어떻게 할지 나도 자신할 수 없으니까.’
위태곤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몸을 돌렸다.
석양이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서서히 어스름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만 내려가자, 백초령.”
백초령이 돌아선 위태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냉랭히 말했다.
“이제 그만 나를 보내줘. 언제까지 잡아둘 거야?”
“훗,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지.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
“나를 붙잡아둬서 뭘 어떡하겠다는 거야?”
“그야 실컷 놀리면서 화난 모습을 구경하려고 그런다.”
“나쁜 변태 자라! 그러다 뒤통수에 벼락이 떨어지는 날이 있을 거야!”
“크크크, 글쎄. 그보다 네가 내 품에 안기는 날이 더 빨리 올걸?”
“웃기는 소리 마. 죽으면 죽었지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변태가 싫거든!”
백초령은 씩씩거리며 위태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위태곤은 뒤통수가 뜨거운 만큼 가슴도 뜨거워졌다.
‘흐흐흐. 어디 더 욕하면서 떠들어봐라, 백초령. 그럴수록 나는 더 즐거우니까.’
그는 한껏 즐거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빨리 따라와. 늦게 오면 강제로 안고 갈 거니까.”
백초령은 입술을 질겅거리며 하는 수 없이 위태곤을 따라갔다.
그런데 위태곤과 백초령이 삼층에 내려섰을 때였다. 이층에서 올라오던 청의인 두 사람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멈춰라!”
호위 무사 둘이 위태곤과 백초령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청의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곧장 계단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어스름과 그림자에 가려진 그들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멈추라 하지 않더냐!”
호위 무사 하나가 다시 소리쳤다.
청의인과의 거리는 어느새 일 장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쩡!
호위 무사들이 도검을 빼들었다.
순간이었다. 천천히 걸어오던 청의인들이 한 걸음 크게 내딛으며 호위 무사들을 덮쳤다.
“네놈들이 감히!”
노성을 내지른 호위 무사는 망설임 없이 검을 뻗었다.
찰나, 청의인 하나가 손을 뻗어 맨 앞의 호위 무사를 향해 내지르고, 다른 하나는 장포 속에서 손을 빼며 도를 든 호위 무사를 향해 휘둘렀다.
퍽! 쩡!
앞에 있던 호위 무사는 가슴에 일장을 맞고 뒤로 날아가고, 도를 든 호위 무사는 상대의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조심해!”
위태곤은 백초령의 손을 잡고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뒤쪽 계단에 서 있던 호위 무사 넷이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청의인들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호위 무사 넷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위 무사들은 청의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청의인들이 두어 번 장력을 내치고 검을 휘두르자 피가 튀고, 몸뚱이가 뒤로 날아갔다.
퍼벅! 쩌저정!
“크윽!”
“커억!”
위태곤은 백초령의 앞을 가로막고 즉시 검을 뽑아들었다.
“웬 놈들이 감히 신마성에 시비를 거는 것이냐!”
그는 신마성의 이름으로 청의인들을 위협했다. 신마성의 이름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자, 천하에 몇이나 될 것인가.
그러나 청의인들은 일점의 흔들림도 없이 호위 무사들을 쓰러뜨렸다.
좌우에 서 있던 호위 무사 여섯 중 두 명이 청의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소성주! 뒤로 물러나십시오!”
그때 뒤쪽 계단 위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억!”
“어떤 놈이…… 으헉!”
위태곤은 홱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호위 무사들을 제치고 계단을 내려오는 청의인 둘이 보였다.
적은 앞쪽의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백초령의 손을 잡고 있던 위태곤은 백초령을 이끌고 누각의 구석진 곳으로 피했다.
“백초령! 내 뒤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마! 놈들은 나뿐만 아니라 너도 죽이려고 한다!”
백초령도 모르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위태곤이 모르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비록 옷 색깔은 달랐지만, 청의인들의 행동방식과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한번 마주쳐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놈들이야!”
“뭐? 누구?”
“유령총에서 본 놈들!”
“뭐야?”
위태곤도 유령총에서 흑의인들과 싸워봤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신없이 싸우느라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는 백초령의 말을 듣고서야 상대가 유령총에서 봤던 자들 임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지 아는 것이다.
이를 악문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청의인 둘을 바라보았다.
남은 호위 무사는 다섯, 그나마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백초령을 안고 도망칠까?
하지만 혼자서도 빠져나가기 힘든 상황. 백초령까지 안고 피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빌어먹을! 하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흥! 내가 바로 신마성의 위태곤이다!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놈들!”
위태곤은 코웃음까지 쳐가며 스스로의 용기를 북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초령을 놔둔 채 도망칠 수는 없었다.
마도에 물든 자신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그래도 감정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백초령, 바짝 따라와!”
일갈을 내지른 위태곤은 내려가는 계단을 막고 있는 자를 향해 쇄도하며 전력을 다해 검을 뻗었다.
쩌저정!
청의인과 위태곤의 검이 정면으로 얽혀들며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위태곤 역시 절정에 이른 고수였다. 청의인도 전력을 다한 그의 공세를 무시하지 못하고 신중하게 받아냈다.
찰나 간에 대여섯 번의 검세가 격돌했다.
가슴이 묵직해진 위태곤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나서 눈을 새파랗게 빛냈다.
이대로 가면 다른 자가 합류할 것이고, 그럼 빠져나갈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질 것이었다.
‘제기랄,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그는 남천신마 혁련궁의 다섯 가지 무공 중 하나인 자전마검을 펼치기로 작정했다.
아직 공력이 부족해서 함부로 펼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앞뒤 가릴 겨를이 없었다.
일순간, 자색 광채가 그의 검첨에서 쭉 뻗어 나갔다.
“이것도 받아봐라!”
위태곤은 자색 검광을 앞세우고 청의인에게 달려들었다.
청의인도 위태곤의 검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전력을 다해 맞부딪쳤다.
떠더더덩!
또다시 굉음이 터져 나오고, 위태곤과 청의인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청의인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는지 악문 이 사이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제법이군, 위태곤.”
그때 또 다른 청의인이 위태곤을 향해 공세를 틀었다.
상대의 공세를 피하려던 위태곤은 멈칫했다. 하필 백초령이 바로 뒤에 있었다. 자신이 피하면 백초령이 당할 것이었다.
빌어먹을!
위태곤은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 상대의 검을 막았다.
떠더덩! 쾅!
겨우겨우 상대의 공세를 막긴 했는데, 연이은 충격이 위태곤의 내력을 뒤흔들어버렸다.
“크윽!”
잇새로 신음을 씹어 뱉은 위태곤은 일그러진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변태!”
백초령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도 위태곤이 왜 내상을 입었는지 모르지 않았다.
저 변태가 내상까지 입어가며 자신을 지키려 하다니.
그동안 욕만 퍼부었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진 백초령은 빽 고함을 지르며 위태곤을 다그쳤다.
“이 바보야! 신마성주의 제자가 왜 그렇게 힘도 못 써!”
위태곤은 불끈 힘이 솟았다.
분명 자신을 위해서 한 말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던 백초령이 자신을 위해 안타까워하다니!
“으하하하! 백초령! 걱정 마라! 나도 그렇게 약하지 않아!”
위태곤은 미친 듯 웃음을 터트리며 청의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사기가 오른 것만으로는 승부를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섯 남았던 호위 무사 중 셋이 그 사이에 쓰러지고, 청의인 하나가 백초령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청의인은 백초령이 자신의 일검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백초령에게 접근했다.
그런데 청의인이, 벽에 붙어 있는 백초령의 일 장 거리까지 접근한 순간!
와장창!
등왕각의 한쪽 창문이 부서지면서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청의인은 느닷없는 상황에 창문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찰나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인영이 번개처럼 날아가더니, 백초령의 허리를 낚아채서 반대편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웬 놈이냐!”
청의인 하나가 버럭 노성을 내지르며 그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청의인이 따라잡기도 전, 백초령을 옆구리에 낀 인영은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날아갔다.
와장창!
“이런!”
대경한 청의인은 급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아래층에서 대여섯 명이 날아올라 왔다.
“둘째 아가씨를 찾으시오!”
“위태곤! 초령이는 어디 있느냐!”
위태곤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화청백?’
화청백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그와 함께 온 사람들 역시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위태곤은 찰나 간에 머리를 굴리고는, 백초령을 옆구리에 낀 자가 빠져나간 창문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곳에 있던 청의인은 이미 신검문 사람들과 격전이 벌이고 있었다. 자신은 심각한 내상을 입었고, 백초령은 사라진 상황. 이곳에서 목숨 건 일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화청백! 다음에 보자!”
위태곤은 창문을 빠져나가며 화청백의 정체를 청의인들에게 알려주었다. 청의인들이 정말 유령총 문제로 자신을 죽이러 온 거라면, 화청백 역시 저들의 표적일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의인들은 화청백이라는 이름을 듣자, 신검문 무사들을 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저 교활한 놈이!’
화청백은 이가 갈렸지만, 그때만 해도 위태곤의 본의를 알지 못했다. 더구나 청의인들은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자들이어서 정신을 다른 곳에 쓸 틈도 없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화청백은 뒤늦게 청의인들의 정체를 짐작하고 눈을 부릅떴다.
“이제 보니 네놈들이구나! 모두 합공해서 상대하시오! 유령총에서 만난 살귀들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