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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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80화
80화
“매일 나옵니까?”
“매일은 아니고, 이삼 일에 한 번씩 나오는가 보더군.”
“오늘도 나올까요?”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군.”
해동산은 그 말을 끝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풍천은 좀 더 정확한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그것만으로도 뜻밖의 정보를 얻은 셈이어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해 형은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여기는 이제 문 닫아야 할 거 같은데 말이죠.”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이제 해동산은 죽었으니까. 그런데…….”
해동산은 말꼬리를 길게 끌면서 풍천을 직시했다.
“자넨 내가 여기에 숨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내 동생은 나와 너무나 똑같아서 우리가 두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말이야.”
풍천은 어깨를 으쓱하고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머리카락이 다르더군요.”
“머리카락?”
“흰 머리카락이 해 형보다 조금 적더라고요. 흰 머리카락이 많았으면 세월이 흘러서 그런가 보다 하고 그대로 속았을 텐데, 적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거죠. 해 형이 반로환동하지 않은 다음에야 흰 머리카락이 적어질 리가 없잖습니까?”
“표 날 정도는 아닐 텐데…….”
“해 형의 머리카락 백 개 중 열 개가 흰 머리카락이라면, 동생분은 여덟 개 정도 되더군요.”
해동산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일 년 전에 본 나의 흰 머리카락을 어떻게……?”
그는 생각도 못 했다. 풍천의 감각은 일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제가 눈이 좀 밝은 편이죠. 덕분에 지금까지 스무 건이 넘는 일을 맡았는데 미해결사건이 한 건도 없죠. 하, 하, 하.”
해동산은 속이 느끼했지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이어서 꾹 참았다.
“혹시 내가 도울 일 없나? 남창까지 온 걸 보니 제법 큰 건을 맡은 것 같은데…….”
풍천은 눈알을 굴렸다.
해동산이 비록 신마성의 모든 걸 알진 못하지만, 자신보다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신마성을 상대하려면 많은 도움이 될 듯했다.
“도와주시겠다니 고맙군요. 아, 저에게 진 빚은 없는 걸로 생각할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제가 돈을 좀 밝히긴 해도 동생을 잃은 분에게 빚 독촉할 정도도 매정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거기서 빚 이야기가 왜 나와?
‘사람 하나 찾아준 거 가지고 생색은…….’
두 사람은 한 시진이 지난 후에야 지하에서 나왔다.
방 안의 광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바닥에 흥건한 핏물이 좀 더 굳었을 뿐.
해동산은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동생의 시신을 침상에 올린 후 이불로 감쌌다.
풍천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동산은 동생의 시신을 꼼꼼하게 싸고는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와 동생은 철저히 한 사람만 움직였다네. 한 사람이 본 얼굴로 활동하면, 한 사람은 인피면구를 쓰고 지냈지. 그렇게 십 년을 한 사람인 것처럼 살아왔는데…… 이제 정말로 한 사람이 되었군.”
풍천은 지하 밀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동산의 말이 완전히 허풍만은 아니었다.
그의 쌍둥이 동생인 해동권은 정말로 신마성에 대해서 환하게 꿰고 있었다. 그가 허풍쟁이처럼 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동생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해동산은 무력이 필요한 일에 나섰다.
‘저렇게 순한 얼굴을 한 사람이 살수라니. 좌우간 사람은 얼굴만 봐선 모른다니까.’
그때 해동산이 이불로 감싼 동생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가세. 잘 아는 장의사 친구가 있네. 그 친구에게 동생을 맡기면 알아서 처리해줄 거야. 동생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는 것은…… 복수를 한 다음 할 거네.”
4
남창에서 감강을 따라 서남쪽으로 삼십 리를 가면, 강 건너편에 소가 누워있는 것처럼 생겼다 해서 와우(臥牛)라 이름 붙은 산이 하나 있다.
산 아래에는 수십 채의 고루거각을 품은 장원이 하나 지어져 있는데, 담장의 높이가 일 장 반이나 되어서 성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곳이 바로 천하오패천 중 하나이며, 강서 땅의 진정한 제왕으로 불리는 강남 제일 마세 신마성의 총단이었다.
그 신마성의 거대한 성문 한쪽이 열리고 쌍두마차 한 대가 신마성을 나선 것은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
십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신마성을 나선 마차 안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위태곤과 백초령.
그들이 마차를 타고 신마성을 나선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백초령은 신마성에 온 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짜증도 내지 않았고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벙어리처럼 입이 굳어버린 백초령이 사흘 만에 나직이 말했다.
“등왕각에 가보고 싶어.”
그 말에 위태곤은 즉시 마차를 준비시킨 후 백초령을 데리고 등왕각으로 갔다.
백초령은 등왕각에 도착해서야 입을 열었다.
“그런 눈으로 엉큼하게 바라보지 마.”
비록 첫마디가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위태곤은 삼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위태곤은 이삼 일마다 한 번씩 백초령과 함께 등왕각에 갔다. 신마성에 있을 때는 벙어리 같던 백초령이 등왕각에 올라가면 발톱 세운 고양이처럼 변했는데, 위태곤은 그때가 가장 즐거웠다.
위태곤이 백초령과 함께 성을 나섰다는 소식은 혁련궁의 귀에도 전해졌다.
“둘째가 또 등왕각에 갔다고?”
“예, 성주.”
“클클, 그 녀석.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놈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신검문의 여아가 그렇게 마음에 드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둘째의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보고받기로는, 그 여아의 성질이 보통 사나운 게 아니라고 합니다. 말도 함부로 하고 둘째를 대하는 태도도 남창 뒷골목의 흑도 무리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둘째 공자는 좋다고 그 아이의 말을 다 들어주고 있으니…….”
“클클클, 사우. 그래서 네가 혼인을 못 하고 혼자 사는 거야.”
“예?”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은 누구도 모르는 거지.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면 추물도 천하제일의 미녀로 보이는 법이거든. 그런데 내가 알기로 그 신검문의 여아는 미모도 대단하다고 하더군.”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나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한 법. 애들을 시켜서 잘 지켜봐라. 요즘 강호의 돌아가는 상황이 왠지 모르게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느낌이 안 좋아. 둘째가 등왕각에 너무 자주 모습을 드러내면 자칫 엉뚱한 마음을 먹는 놈들이 있을지 모른다.”
사우는 눈을 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령총에 나타났다는 놈들 때문에 그러십니까?”
혁련궁은 고개를 돌려 사우를 바라보았다.
놈들에게 죽은 숫자가 수백이다. 더구나 팔대신마 중 전우림과 동광후마저 당했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놈들에 대해서 밝혀진 게 있느냐?”
“죄송합니다, 성주. 노력을 하고 있으니 곧 밝혀질 것입니다.”
“혹시, 혈천궁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 들은 적 있느냐?”
“백여 년 전에 일어났던, 혈천비사 말씀이십니까?”
천의맹조차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던 혈천궁이 하룻밤 만에 멸망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강호의 그 어떤 세력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강호에서는 혈천궁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벌어져 자멸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기정사실화했다. 그 이유 외에는 누구도 다른 이유를 댈 수가 없었으니까.
“알고 있군. 그럼 칠십 년 전에 벌어진 진천문의 혈겁에 대해선 들어봤느냐?”
“들어봤습니다, 성주. 호북 의창에서 일어나 단 이십 년 만에 호북성을 휘어잡은 진천문이, 문주를 비롯해서 오십 명에 이르는 간부급 고수들이 모두 급사하는 바람에 이류문파로 몰락했지요.”
“마종천의 이야기나, 오마종의 실종에 대한 것은? 그 사건의 공통점이 뭔지 아느냐?”
“전부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 아닙니까?”
“맞아. 정말 웃기는 일이지. 강호를 진동시킬 만큼 큰 사건임에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다니 말이야.”
혁련궁은 풀썩 웃으며 사우를 바라보았다.
“더 웃긴 것은, 그러한 일이 그 전에도 수백 년 동안 수십 건이나 벌어졌다는 거지.”
사우의 얼굴이 쇳덩이처럼 굳어졌다.
“설마 성주님께선 그 일이 어떤 한 세력의 짓이라 보시는 게……?”
혁련궁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불가능한 일일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 가능성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과연 그럴까?”
“그러한 일을 벌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일을 수백 년 동안 숨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저보다 성주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혁련궁은 수염을 꼬며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하긴 그런 세력이 정말로 있다면, 강호를 진즉 통일했겠지.”
강호일통(江湖一統).
대세력을 이룬 자들의 영원한 꿈이다. 지금껏 누구도 이루지 못한 꿈.
그러나 정말 그 정도의 힘을 지닌 자들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현 강호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암류가 흐르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 정체불명의 흑의인들만 해도 그렇고. 해서 하는 말인데…… 기회를 봐서 신마비원(神魔秘院)을 열어야겠다.”
순간, 사우의 눈이 한껏 커졌다.
“성주님…….”
“물론 시기상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판단을 잘못해서, 준비만 해놓고 써보지도 못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느냐?”
“명을 내리신다면 따르겠습니다.”
따르긴 하나 의견은 다를 수도 있다는 뜻. 남천신마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죽음을 부르는 일이었다. 그러함에도 그가 그렇게 대답한 것은 신마비원을 움직인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흘흘흘,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나도 안다. 하지만 때로는 신중함보다 패기와 느낌만으로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니라.”
혁련궁은 담담히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거대한 대전이 작게 느껴졌다.
두 팔을 벌린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서 은은한 청광이 흘러나왔다.
“느껴지지 않느냐, 사우? 내 귀에는 강호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폭풍소리가 천둥처럼 들리고, 눈에는 하늘을 맴돌고 있는 회오리가 보인다. 피의 회오리가! 나 혁련궁, 남은 인생을 걸고 그 중심에서 움직일 것이야, 클클클클.”
사우는 눈빛을 파르르 떨며,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원(願)을 이루소서!”
제3장. 해동산의 친구들, 그리고 등왕각(騰王閣)
1
해동산의 장의사 친구는 강시처럼 빼빼 마른 데다 숨만 멈추면 시신으로 오해할 만큼 얼굴이 창백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성은 어씨였는데, 해동산의 동생 시신을 보고도 놀라거나 의문을 품지 않았다.
“자네와 많이 닮았군. 쌍둥인가?”
그저 그렇게 묻기만 할 뿐.
그 질문에서 풍천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 노인도 해동산이 쌍둥이인 줄은 모르고 있었나 보군. 정말 철저한 사람이야.’
정곡을 콕 찔렸는데도 해동산 역시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수.”
“그럼 이제 해동산도 죽은 거군.”
“오늘 이후로는 해복이라 부르쇼.”
해복(海復). 반드시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이름이었다.
“부디 소원을 이루도록 하게. 나는 해복보다 해동산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들거든.”
어씨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며 해동권을 염했다.
해동산은 쌍둥이 동생의 시신이 관 안에 안치된 뒤에야 몸을 돌렸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가세.”
순간 어 노인이 손을 쓱 뻗더니, 돌아선 해동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갈 때 가더라도 관 값은 주고 가야지? 지금까지 밀린 것 다 합쳐서 은자 아홉 냥이네.”
풍천은 장의사를 나오면서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해동산이 자신 못지않은 짠돌이라는 사실을.
‘떼어먹을 게 없어서 관 값을 떼어먹으려고 하다니, 앞으로 조심해야겠군.’
하지만 해동산은 그 나름대로 불만이 많았다.
“어 노인이 제대로 된 관만 썼어도 내가 돈을 제때 줬지. 지금까지 일을 다섯 번 맡겼는데, 오늘 외에는 모두 싸구려 관을 썼다니까? 아마 오늘도 내가 보고 있지 않았으면 싸구려 관을 썼을 거네.”
그게 사실이라면 돈을 주지 않은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이라면 말이다.
“좋습니다. 그거야 뭐 어차피 제 돈 나가는 것도 아니니 더 이야기할 것은 없고, 정보통을 만나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그동안 우리 형제와 십 년을 거래해온 사람이지. 돈을 좀 밝히긴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풍천은 슬쩍 해동산을 째려보았다.
왠지 미덥지가 않았다.
‘후우, 역시 세상에는 나처럼 양심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도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