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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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79화
79화
2
세찬 바람에 포양호의 물결이 물거품을 일으키며 출렁였다.
튀어 오른 호숫물이 얼굴을 때려도, 뱃전에 기대앉은 풍천은 꿈쩍을 하지 않고 졸았다. 눈을 가늘게 뜬 채.
“형! 저게 등왕각인가 봐!”
아마 초웅이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큰소리로 외치지만 않았어도 한참을 더 졸았을 것이다.
남창(南昌)의 명물 등왕각(騰王閣).
풍천은 그 말에 졸린 눈을 겨우 뜨고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감강(竷江) 가에 우뚝 솟아 있는 등왕각이 보였다.
경덕진을 출발한 지 사흘, 마침내 포양호를 가로질러 남창에 도착한 것이다.
배에서 내린 풍천은 일단 초웅을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꼭 돈을 아끼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조사를 하려면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데, 함께 돌아다니기에 초웅은 너무 눈에 띄었다. 고수를 만나면 짐이 될 것도 분명하고.
“초웅, 너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서 저 산에 들어가 내가 가르쳐 준 초식을 익혀라. 그리고 내일 해질 때쯤 이리 와.”
풍천은 손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녹음으로 우거진 산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거리는 삼십 리쯤. 강만 건너면 한 시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알았어, 형.”
초웅은 일절 토를 달지 않았다. 무이산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도읍보다 산이 더 친숙했다. 그리고 풍천에게 배운 도법을 빨리 익히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다.
“이 근처에는 무서운 사람들이 많으니까 함부로 싸우지 마. 누가 시비 걸면 대꾸하지 말고 그냥 산으로 들어가. 알았지?”
초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세상에 무서운 사람들이 많다는 걸 경덕진에서 뼈저리게 느낀 터였다.
“형 말대로 할게. 그런데 식사는 어떻게 해? 사냥해야 돼? 저 산은 근처에 사람이 많아서 짐승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돈 없어?”
“형 만나던 그날 다 썼어.”
힐끔 초웅을 쳐다본 풍천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은자 반 냥을 주었다.
“아껴서 사 먹어. 모자라면 멧돼지라도 잡아먹고.”
“응.”
‘그래도 반 냥은 아끼겠군.’
수련을 핑계 삼아 초웅을 산으로 보내기로 한 것은 괜찮은 생각이었다. 꼭 돈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이야 믿은 말든.
‘한 삼 일 후에 만나자고 할 걸 그랬나?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는데.’
3
홀가분해진 풍천은 일단 얼굴을 조금 손보고 남창성 안으로 들어갔다.
신마성으로 가기 전에 정보를 더 모을 생각이었는데, 마침 남창성에는 그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동서로 쭉 뻗은 대로를 지난 풍천은 그물처럼 펼쳐진 수로를 몇 개 건너서 미로처럼 뻗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곳에서부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몇 번 물어본 끝에 그는 자신이 목적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왜 이리 구석진 곳에 사는 거야?”
그는 짜증을 내며 문 옆 기둥에 내걸린 깃발을 바라보았다. 꼬질꼬질 때가 묻은 깃발에는 알아보기도 힘든 글씨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만사형통(萬事亨通)]
‘찾긴 제대로 찾았군.’
글자 그대로 생각하면 대단한 곳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는 곳처럼 생각되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풍천은 그 말에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이곳의 주인이 얼마나 실없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있는지 모르겠군.’
이곳의 주인인 해동산과 만난 것은 일 년 전, 청부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강(九江)에 갔을 때였다. 청부자가 자신과 해동산을 동시에 고용한 것이다.
당시에 봤던 해동산은 멀쩡하게 보이는 나이 서른다섯의 장한이었는데, 침소봉대(針小棒大)를 밥 먹듯이 하는 버릇이 있었다.
‘신마성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도 했지.’
그런데 나중에 꼬치꼬치 물어보니 어물거리며 대충 넘겼다. 아무래도 신마성에 끄나풀이 하나 있어서 이런저런 말을 주워들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가 해동산을 찾아온 것은 받아야 할 빚이 있기 때문이었다. 잘하면 뜻밖의 정보를 얻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남창에서 오래 살아왔다고 했으니 최소한의 도움은 될 것이었다.
풍천은 주위를 슬쩍 둘러본 후 닫혀 있는 문을 두들겼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가 두들기자 문 한쪽이 비명을 지르며 스르르 열렸다.
끼이이이.
‘응?’
살수가 사는 집 문이 열려 있다니. 정상이 아니었다.
풍천은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들어가자 희미한 피 냄새가 맡아졌다.
인기척도 없는 집에서 흘러나오는 피 냄새. 풍천은 머뭇거리지 않고 방문을 열었다.
덜컹.
방문을 열자 비릿한 혈향이 밀려왔다.
안으로 들어간 풍천은 눈살을 찌푸리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탁자 아래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흥건한 핏물 위에 쓰러져 있는 삼십 대 장한, 해동산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해동산의 시신을 보자 분노가 끓어올랐다.
‘어떤 새끼들이…… 아직 빚도 다 못 받았는데…….’
그때였다.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허리를 숙인 풍천은 해동산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느 순간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걸렸다.
고개를 든 그는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오른쪽 벽으로 다가가서 벽을 여기저기 두들겨보았다.
툭, 툭, 퉁.
몇 번 두들기던 중 다른 소리가 들렸다.
그는 벽 주위를 살펴보고는 장식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수실을 당겼다.
철컥.
벽 안쪽에서 걸쇠 풀리는 소리가 미미하게 났다.
손으로 벽을 밀자, 벽이 안쪽으로 밀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제길, 지하는 지겨운데…….’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둘 수도 없는 일. 풍천은 기둥에 붙어 있는 등잔을 떼어서 불을 붙이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두 번 정도 꺾어지자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철문의 걸쇠가 있을 법한 곳에 손바닥을 붙이고 지그시 밀었다.
우직.
안쪽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길게 뻗은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그때 통로 끝에 있는 석실에서 다급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풍천이 급히 소리쳤다.
“해 형, 접니다. 구강에서 만난 잘생긴 청년, 잠풍(潛風)이요!”
안쪽이 조용해졌다.
곧 석실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등잔불에 비친 그 얼굴은 밖에 쓰러져 있는 해동산과 똑같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의 눈초리로 풍천을 살펴보았다. 풍천은 그가 의심하는 이유를 알기에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놈들이 있어서 얼굴을 조금 바꿨습니다.”
해동산은 풍천의 눈을 한참 응시한 후에야 의심을 풀었다.
그와 풍천은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 변용하는 거야 일상적인 일이었다. 해서 그들 업종의 사람들은 얼굴 모습보다 눈빛으로 상대를 기억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나른한 눈빛을 하고 있는 걸 보니 틀림없이 잠풍이었다.
해동산은 석실로 들어서는 풍천을 보며 철문 쪽을 힐끔거렸다.
“밖에 아무도 없었나?”
“아무도 없던데요?”
“개새끼들…….”
탁자에 두 팔을 얹은 해동산은 머리를 감싸고 이를 갈았다.
풍천은 탁자에 등잔을 내려놓고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해동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슬픔과 자괴감이 범벅되어 잘게 떨리는 눈빛. 두 눈에 고인 물기가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소매로 대충 물기를 찍어낸 그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신마성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한 시진 전쯤 두 놈이 정보를 사겠다고 찾아왔네.”
‘정말 대단해. 이 와중에도 허풍이라니.’
“그런데 이것저것 물을 것 다 묻고는, 대답이 끝나자 대뜸 심장에 검을 틀어박지 뭔가. 내가 나서서 막을 새도 없이 말이야. 죽일 놈의 새끼들!”
“쓰러져 있는 사람은 누구죠? 인피면구를 쓰거나 특별하게 변용한 것 같지는 않던데요.”
순간 해동산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에 다시 물기가 맺혔다.
“내…… 동생이네. 쌍둥이 동생.”
그제야 풍천은 해동산이 왜 슬픔과 자괴감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쌍둥이 동생이 죽어가는 걸 보고도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숨을 죽이고 이곳으로 피했을 터. 얼마나 자신이 원망스럽겠는가.
“놈들이 누군지 아쇼?”
해동산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놈들이네. 소문으로도 들어보지 못한 놈들이었어. 두 놈 다 짙은 색 청의를 입었는데, 나보다 조금 강할 것 같더군.”
조금? 그랬으면 나서서 싸웠겠지. 동생이 죽어가는데.
하지만 풍천은 해동산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았다.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은 그였다.
한번은 힘도 없는 놈이 죽일 테면 죽이라며 게거품을 물고 달려드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자신을 미친놈 보듯 쳐다봐서 짜증 난 적이 있었다.
‘돌아가신 선친처럼 단명할지 모르니 못생긴 얼굴로 여자 좀 적당히 밝히라고 말한 게 뭐 화낼 일이라고 말이지. 아무리 부인이 옆에 있어도 그렇지, 저 생각해서 한 말인데…….’
어쨌든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서는 우는 사람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기로 했다.
‘해 형이 독사눈을 본 쥐처럼 꼼짝도 못 했을 정도라면 보통 놈들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군.’
풍천은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최대한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놈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수?”
“물론이지. 내 어찌 잊겠나?”
풍천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한쪽에 있는 문방사우를 발견하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놈의 얼굴을 그려보쇼. 강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마주칠지 모르니까.”
“알겠네.”
해동산은 머뭇거리더니 벼루에 먹을 갈았다. 그리고 붓을 들더니 누런 종이에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잠시 후, 풍천은 죄 없는 종이만 두 장 찢어버리고 초상화 그리는 것을 중단시켰다.
눈, 코, 입, 귀가 있는 것만 사람과 비슷할 뿐, 도무지 사람 얼굴 같지가 않았다.
설마 괴물이 해동산의 동생을 죽이지는 않았을 터. 계속 그려봐야 종이만 아까웠다.
그래도 해동산은 자신의 그림솜씨가 형편없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았다.
“음, 예전에는 잘 그렸는데, 오랫동안 그려보지 않아서 잘 안 되는군. 내가 설명해줄 테니 자네가 그려보게.”
풍천은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제가 글씨라면 남 못지않게 쓰고 산수화도 좀 그리는데, 초상을 그리는 것은 조금 딸립니다. 어차피 초상화로 사람을 알아보려면 최대한 비슷해야 하는데, 초상을 전문으로 그리는 사람에게 부탁해보는 게 낫지 않겠수?”
“하긴, 그게 낫겠군.”
풍천은 해동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빨리 말을 돌렸다.
“동생을 죽인 놈들이 뭘 물어봤죠?”
해동산의 얼굴에 다시 슬픔이 떠올랐다.
“최근 남창으로 들어온 신마성의 고수에 대해서 묻더군.”
응?
풍천의 눈이 반짝였다.
“신마성의 고수라면 누굴……?”
“이공자인 위태곤과 팔대신마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서 물었지. 사실 남창에서는 신마성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들에 대해서 우리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거든.”
“동생분은 뭐라고 했죠?”
해동산은 별다른 의심 없이 다 말해주었다.
풍천은 그의 말에 일절 끼어들지 않고 듣기만 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순전히 허풍쟁이인 줄 알았는데,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위태곤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의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위태곤이 어디서 계집 하나를 데려왔는데, 요즘 그 여자에게 푹 빠져서 다른 계집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하더군.”
풍천의 눈매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설마 둘이……?’
갑자기 속이 쓰렸다. 뒤통수에서 살짝 열도 났다.
“그런데 묘하게도 여자는 위태곤을 좋아하지 않는다더군. 아니 좋아하기는커녕 한겨울 북해의 바람처럼 쌀쌀맞게 대한다고 하네.”
풍천의 입술이 씰룩였다.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쓰리던 속이 편해지고, 뒤통수의 열도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크크크, 초령이 고것이 막 쏘아대면 정신없을걸?’
그가 속으로 웃는 동안 해동산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남창으로 나와서 선물도 사주고,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준다고 하네.”
순간 풍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창으로 자주 나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