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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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76화
76화
제1장. 약속은 확실하게
1
흑서귀는 짜증을 내듯 이마를 찌푸리고 걸음을 옮겼다.
‘빌어먹을 놈, 잡기만 해봐라!’
자신은 내상을 입고 다른 동료는 머리에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약속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로 인해서 은자 오십 냥을 손해봤고, 분타주가 그 손해를 몽땅 그들에게 뒤집어씌웠다는 것이었다.
“네놈들이 벌어서 채워!”
당장 오십 냥을 어디서 번단 말인가? 어디 가서 강도질이라도 하면 몰라도.
화가 난 그는 그 돼지 같은 놈을 잡아서 목을 쳐버리기로 작정했다. 아니면 놈에게 은자 오십 냥의 빚을 뒤집어씌우든지.
그놈이 도망친 지 한 시진 이상 지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놈도 심한 내상을 입었으니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 정도 덩치라면 찾기 어려운 것도 없지.’
흑서귀는 냉소를 베어 물고 서문으로 향했다.
동문에서는 그런 놈이 나가는 걸 보지 못했다고 했다. 서문으로도 나가지 않았다면 경덕진 안에 있다는 말. 흑도의 건달들을 동원한다면 돼지 한 마리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서문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저 앞에 그 돼지와 싸웠던 젊은 놈이 있는 것이 아닌가.
풍천은 흑서귀가 자신을 보고 멈칫하자 씩 웃으며 다가갔다.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흑서귀는 눈살을 찌푸리고 풍천을 노려보았다.
“자네는……?”
“하, 하. 객잔서 보고 이곳에서 또 보다니, 보통 인연이 아니군요.”
흑서귀는 너스레를 떠는 풍천을 보고 경계심을 반쯤 풀었다. 그때 풍천이 넌지시 물었다.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자네 혹시 객잔에서 싸웠던 돼지 같은 놈을 보지 못했는가?”
“아, 그 왕곰?”
“맞네. 봤는가?”
“보긴 봤는데…….”
풍천이 말을 길게 늘이자 흑서귀의 작은 눈이 번들거렸다.
“그래? 언제, 어디서 봤지?”
“조금 전에 서문으로 나가던데요?”
“그래?”
“반 각이나 되었나? 몸이 많이 아픈지 진짜 어슬렁거리는 곰처럼 느릿느릿 나가더라고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반 각을 움직였으면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 같다. 내상이 심할 테니 도중에 쉬고 있을지도 모르고.
“훗, 잘됐군. 고맙네.”
“아, 제가 도와줄까요? 저도 그놈을 혼내주고 싶은데.”
흑서귀는 잠시 망설였지만, 혼자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동료를 부르러 간 사이 더 멀어지면 그것도 곤란하고.
“그러겠나? 놈을 잡으면 내가 한턱 내지.”
서문을 나선 풍천은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시원한 숲이 보이자 그 안으로 들어갔다.
흑서귀가 그 모습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리 들어가는가?”
풍천은 입술에 검지를 세우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쉿, 저 안에서 커다란 것이 움직였거든요.”
“그래?”
흑서귀도 눈을 빛내며 풍천을 바짝 따라왔다.
칠팔 장가량 안으로 들어간 풍천은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십쇼. 저어어기.”
바로 옆으로 다가온 흑서귀는 목을 길게 빼고 숲 안을 살펴보았다.
순간이었다. 풍천이 앞으로 뻗었던 검지로 거무스름한 흑서귀의 목을 쿡쿡 찔렀다.
“끅. 이, 이게 무슨…….”
“좀 씻고 다니지. 손가락 끝이 시커메졌네.”
풍천은 손가락을 흑서귀의 옷자락에 문지르며 두어 군데의 혈도를 더 짚었다.
흑서귀는 얼굴이 벌게진 채 몸을 덜덜 떨면서 땀을 비 오듯 흘렸다.
온몸이 저릿저릿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근육이 뒤틀린 것처럼 몸이 자꾸 꼬이고, 뼈 마디마디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 이…… 제, 제발…… 끄으으으…….”
풍천은 흑서귀의 신음을 못 들은 척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애원하는 흑서귀를 바라보면서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대답만 잘하면 고통을 덜어주죠. 무슨 말인지 알죠?”
“너…… 공자는 누구……?”
말을 바로 바꾸는 걸 보니 그래도 상황파악이 무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흑서귀의 빠른 눈치가 마음에 든 풍천은 가슴 쪽의 혈도를 풀어주고 웃는 얼굴로 질문을 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 것 없고…… 혹시 최근에 높은 사람들이 동마부를 방문한 적 없수? 에, 성주님의 제자라든가 아니면 팔대신마 같은 사람 말이오.”
흑서귀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신마성의 비밀을 위해서 목숨을 걸 생각도 없었다.
“십여 일 전에 왔었다고 들었……습니다.”
“누구누구 왔는지 자세히 말해보쇼.”
“저 같은 외부 무사는 그것까진 알 수가 없…… 으으으…….”
“정말 많이 아픈가 보군. 조금만 참으쇼. 곧 아프지 않게 해줄 테니까. 그럼 동마부의 지리에 대해서 말해보쇼. 특히 고위 간부들이 사는 곳에 대해서 말이오.”
“어디를…… 저는 상주 무사가 아니라서 내부 깊숙한 곳은 잘 모르는데…….”
“이거 생각보다 쓸모가 없군. 별수 없지. 모른다는데 뭐 어떻게 하겠수?”
풍천은 실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흑서귀는 작은 눈을 좌우로 굴리며 조금이라도 더 좋은 생각을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동천장 앞에 있는 마을에 가면…… 간부들이 술 마시러 많이 나오는데…….”
턱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바람에 말도 많이 떨려서 몇 마디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풍천은 흑서귀의 노력을 생각해서 신중한 표정으로 그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말을 맺은 흑서귀가 덜덜 떨며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수고했수. 나도 이렇게 독한 수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시끄러운 걸 워낙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이게 다 위태곤이라는 놈 때문이라 생각하고, 지옥에 가거든 그놈을 실컷 욕하쇼.”
초웅을 찾아다니지만 않았어도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풍천은 흑서귀의 선택을 애석해하며 검지로 인중을 쿡 찔렀다. 약속대로 더 이상 고통은 없을 것이었다.
2
경덕진 서문을 나와 서남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수만 평의 거대한 장원이 하나 나온다.
고루거각이 즐비한 거대한 장원은, 구화산과 황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경덕진을 거쳐 포양호로 흘러드는 창강(昌江)을 허리에 끼고 있었다.
장원의 정문 위에는 동천장(東天莊)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신마성 사대지부 중 동부를 총괄하는 동마부였다.
상주 무사 육백여 명, 직접 관리하는 외부 무사가 오백여 명.
동마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대문파였다. 그들은 경덕진에서 포양호에 이르는 상권을 장악하고, 경덕진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의 운송과 판매를 도맡다시피 했다.
그 덕에 사대지부 중 가장 막강한 자금력과 무력을 자랑하며, 신마성이 가장 중요시하는 지부가 될 수 있었다.
지부장은 신월마신(新月魔神) 좌궁화.
그는 팔대신마와 함께 신마성 무력의 최정점에 서 있는 사마신 중 하나로, 어떤 사람들은 그를 동천마신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한 신마성의 주인인 남천신마 혁련궁의 의제였다.
어둠이 세상을 완전히 뒤덮은 술시 무렵.
풍천은 동천장 정문에서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강가의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은 절반이 주루와 객잔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동천장을 위해서 세워진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간부들이 많이 놀러 온단 말이지?’
흑서귀는 선착장가의 기루에 저녁마다 간부들이 놀러 간다고 했다. 그곳으로 가면 하다못해 중간 간부 정도는 있을 것이었다.
풍천은 곧장 선착장 쪽으로 향했다.
선착장에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가 이삼십 척 정박해 있었다. 대부분이 경덕진의 특산품인 도자기를 실어 나르는 배였다.
그리고 선착장 옆에는 서너 채의 객잔과 주루가 있었는데, 선원과 동천장 무사들이 손님의 대부분이었다.
‘어디 쓸 만한 놈 하나 없나?’
풍천은 선착장을 걸으면서 눈알을 굴려 일대를 살펴보았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객잔과 주루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특히 이층의 붉은 등이 켜진 기루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두어 마디마다 쌍욕과 음담패설이 꼭 섞여 있었다.
“낄낄낄, 고년. 가슴은 별론데 엉덩이는 통통하네. 조심해 이것아. 그렇게 무릎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작대기가 엉덩이를 쿡 찌르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부당주님도 참 별 걱정을 다하셔. 그럼 폴짝폴짝 뛰죠 뭐. 깔깔깔깔.”
“근데 이 계집은 속에다 뭘 이렇게 많이 입었어?”
“세상에 못된 망아지가 넘쳐나니 별수 있나요? 억지로 찌르면 툭 부러질지 모르니 조심하라구요.”
“주둥이도 두툼한 게, 말은 청산유수네. 흐흐흐흐, 어때? 오늘 이 어르신하고 신선이 사는 곳에 가서 하룻밤 놀지 않겠느냐?”
“호호호호, 제가 허락하면 앞에 있는 무사님이 나으리의 목에 칼을 들이댈 것 같은데요?”
“걱정 마라, 내가 먼저 목을 잘라버리면 되니까. 흐흐흐흐.”
풍천은 그 주루를 째려보았다.
‘그 자식들, 누가 마도 놈들 아니랄까 봐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그때였다.
와장창! 챙! 퍼벅!
그가 바라보고 있던 주루의 이층에서 한바탕 소란이 이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떨어졌다.
퍽!
“우하하하! 어떠냐, 이놈! 뭐? 내 목을 잘라? 미친놈!”
이층에서 한 사람이 부서진 창문 밖을 내다보며 대소를 터트렸다.
큰소리로 음담패설을 하던 두 사람 중 하나였다.
아마 밖으로 떨어진 자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동료의 목을 먼저 잘라버리겠다고 한 자인 듯했다.
풍천은 밖으로 떨어진 자를 바라보았다.
서너 바퀴 바닥을 구른 그는 손으로 땅을 짚고 겨우 일어서고 있었다.
“퉤! 개새끼, 장난 한번 했다고 진짜 손을 쓰다니. 두고 보자, 고동청. 내 반드시 네놈의 목을 쳐버릴 테니까.”
그는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한 주먹 뱉어내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당장 복수할 생각은 없는지, 주루를 한 번 노려보고는 비틀거리며 선착장 구석으로 향했다.
풍천은 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만취한 채 중심을 잃고 떨어졌는데도 다친 곳이 거의 없다. 땅에 떨어진 순간, 본능적으로 신법을 펼친 덕분이다. 삼류 무사는 흉내 낼 수 없는 임기응변.
비틀거린 것도 다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일 뿐이었다.
풍천은 기녀의 말을 떠올리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흠, 부당주란 말이지?’
그가 바라보는 사이, 비틀거리며 걷던 자가 강가의 갈대숲 쪽으로 갔다. 그리고 바지를 풀더니 소변을 봤다.
풍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가는 자도 없고, 주루나 객잔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자도 없었다.
그는 소변을 보고 있는 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섯 걸음 만에 십오 장을 움직인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지켜보는 것은 하늘에 뜬 달과 별뿐이었다.
‘기다려줄까? 그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에이, 모르겠다.’
바람처럼 다가간 풍천은 소변을 보고 있는 자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퍽!
“켁!”
오줌통을 시원하게 다 비우고 어깨를 부르르 떨던 구기홍은 날벼락이 엉덩이에 꽂히면서 갈대숲 속에 처박혔다.
장강혈을 세차게 얻어맞은 그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엉덩이를 쳐들고 부들부들 떨면서 이를 갈았다.
“으, 어, 어떤 놈이…….”
풍천은 구기홍의 아혈과 마혈을 제압해서 질질 끌고 갈대숲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고는 사방이 갈대로 막힌 곳에 도착한 후 한쪽에 대충 던져놓았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구기홍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풍천을 노려보았다.
감히 신마성 동마부의 도호당 부당주를 발로 차다니! 죽일 놈!
풍천은 그런 구기홍을 보며, 당신 마음 다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화가 단단히 났군. 기루에서 싸웠던 자를 죽이고 싶은가 보지?”
그러고는 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