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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73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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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천풍전설 73화

 

73화

 

 

 

 

 

 

생각지도 못한 요구. 풍천은 멍하니 굳은 채 엉겁결에 대답했다.

 

아수비는 가만히 서 있는 풍천의 품에 안기더니 허리를 끌어안았다.

 

풍천은 미끈한 살결이 품에 안기자 정신이 다 몽롱해졌다.

 

“삼 년 후에 꼭 와야 해요, 꼭…….”

 

“어.”

 

아수비는 놓기 싫은 걸 억지로 놓는 사람처럼, 풍천의 허리를 감은 손을 느릿하니 풀었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를 지그시 악문 그녀는 몸을 돌려 한쪽 구석으로 갔다.

 

그곳에는 다섯 자 길이의 쇠로 된 봉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그녀가 쇠로 된 봉을 잡아 뽑자, 쇠사슬이 박힌 커다란 바위가 경사를 타고 조금씩 내려갔다. 동시에 일곱 자 두께의 벽이 조금씩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시원한 바깥바람이 안으로 밀려들었다.

 

풍천은 한 자 반가량 벌어진 틈을 보며 격동을 참기 위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가요, 곧 문이 다시 닫힐 거예요.”

 

아수비의 목소리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뭔가 대답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빨리 나가요.”

 

아수비가 재촉했다.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풍천은 틈바구니로 빠져나가며 잠깐 뒤를 바라보았다.

 

아수비가 바라보고 있었다. 떨리는 입술, 쪽빛 눈에는 물기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아수비! 일이 끝나면 바로 올게!”

 

풍천은 악을 쓰듯이 소리치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끝내 아수비의 눈에서 이슬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 역시 웃었다.

 

쿠르르릉.

 

석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쿵! 소리와 함께 본래대로 돌아갔다.

 

 

 

8

 

 

 

풍천이 나온 곳은 거의 수직으로 된 동굴이었다.

 

동굴은 상당히 넓고 깊었다. 입구에서는 넝쿨이 빽빽하게 뻗어내리고, 바닥의 크고 작은 바위 위에서는 이끼와 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높이는 근 이십 장 정도. 아마 지각에 이상이 생기면서 원형으로 푹 꺼진 듯했다.

 

풍천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자신이 나온 곳은 완전히 닫혀 있었다.

 

그것은 석문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였다. 이끼와 버섯이 잔뜩 자란 바위. 누구도 그 바위 뒤에 벽라동으로 통하는 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었다.

 

‘아수비, 조금만 기다려라. 다음에는 너에게도 세상 구경을 시켜주마. 세상에 꼭 나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

 

풍천은 소매로 쓱쓱 눈 주위의 물기를 닦아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공에 뜬 보름달과 눈처럼 흩뿌려진 별들이 보였다.

 

보름달은 풍천이 지금까지 봤던 어떤 보름달보다 컸다.

 

세상에, 보름달이 저렇게 아름답다니!

 

또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달도, 태양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하늘이 자신을 버린 줄 알았다. 그런 마음에 원망도 많이 했다.

 

그런데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니 원망은커녕 아쉬움만 남았다.

 

인간의 간사한 마음은 어쩔 수 없나?

 

풍천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후우, 초령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위태곤, 그 자식이 설마 엉뚱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궁금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의문도 많았다.

 

형의 죽음도 그렇고…….

 

‘일단 하나하나 알아보자.’

 

대지를 박찬 풍천은 보름달을 향해 수직으로 몸을 솟구쳤다.

 

 

 

 

 

제8장. 바람은 불고 

 

 

 

 

 

1

 

 

 

슥, 슥.

 

노인이 가위질을 할 때마다 썩은 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인은 만족할 때까지 가위질을 하고 다른 나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인의 뒤에 석상처럼 서 있던 청삼 중년인은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갔다. 노인의 입이 열린 것은 제법 커다란 배롱나무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깟 놈들 때문에 단천무령을 일곱이나 잃다니. 손해가 너무 많았어. 놈들도 너무 많이 살아났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천주. 미로가 통째로 무너지는 바람에 손을 쓸 새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유령총이 완전히 묻힌 것은 다행이다만…….”

 

노인은 배롱나무 가지를 살펴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래, 그들 중 우리 사람들을 알아본 자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조사는 철저히 해봐야겠지.”

 

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청삼 중년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남창으로 가라. 가서 신마성의 움직임을 감시하며 명을 기다려라.”

 

“예, 천주. 하온데 유령총에 들어갔던 자들을 제가 제거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단, 매사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혁련궁은 지금까지 네가 상대했던 누구와도 다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만 가보아라.”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청삼 중년인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 뒷걸음질로 서너 걸음 물러난 후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갔다.

 

청삼 중년인이 정원을 떠난 직후였다. 오십 대 중반의 초로인이 노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경의만 보내도 되겠습니까, 아버님?”

 

노인은 조용히 웃으며 가지치기를 계속했다.

 

“처음으로 실패를 겪었으니 느낀 것이 많았을 게야. 뛰어난 아이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이번 일로 한바탕 바람이 불 것 같습니다만, 아버님께선 어찌 보시는지요?”

 

“한번 정리할 때가 되었단 말이 아니겠느냐?”

 

순간, 초로인의 두 눈 깊은 곳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오패천이 너무 커졌습니다. 어느 선까지 정리를 하실 생각이신지요?”

 

“물이 너무 오래 고여 있으면 썩게 된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변화는 있어야 하지.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친 변화는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법. 정리는 그걸 염두에 두고 해야 할 것이야. 해서 하는 말이다만…… 마도세력 중 가장 강한 신마성을 지워서 모두에게 경고를 주는 게 적당할 것 같다. 물론 우리를 드러내선 안 되겠지.”

 

“적은 피로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설령 천하가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다 해도 아버님의 고심을 이해할 겁니다.”

 

“허허허허, 나 자신만 떳떳하면 욕을 얻어먹은들 무슨 상관이겠느냐?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노인은 가위를 거두고 초로인을 바라보았다.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우리가 존재해온 의미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이 세상에 내던져질 게야.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야. 과연 세상에 나가게 되었을 때도 지금의 순수함이 유지될 것인지…….”

 

“때로는 힘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을 혼란케 하는 자들을 억제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야 효과는 있겠지. 그런데 말이야,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어서 그 자리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아. 더구나 남보다 강력한 힘이 있다면 더욱 그런 마음이 들겠지. 그럼 결국…… 군림의 길을 가게 될 거고 우리 역시 다른 이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될 거다.”

 

“너무 염려가 과하십니다. 아버님이 계시는데 설마 그렇게 되겠습니까?”

 

“허허허허, 이 애비도 사람이니라. 갈 날이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노인은 너털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가위질을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초로인은 노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은 사람이지요. 하늘의 힘을 지닌 사람. 하지만 그런 아버님도 사람인 이상 영원할 수 없음이니…….’

 

그때 노인이 멈칫하며 지나가듯이 말했다.

 

“선우가 폐관에서 나왔다고 들었다, 언제 한번 데려오도록 해라.”

 

초로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녀석이 아버님을 실망시켜드리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천우도 함께 오라고 해라. 본 지 벌써 한 달이 넘은 것 같군. 원, 코앞에 살면서 한 달 동안 얼굴도 내밀지 않다니, 어떻게 된 놈이, 쯔쯔쯔쯔.”

 

“그 녀석은…… 어제 곡을 나갔습니다, 아버님.”

 

대답하는 초로인의 깊은 눈빛에서 은은한 한광이 흘러나왔다.

 

그때 노인이 고개를 돌리며 이마를 찌푸렸다.

 

“천우가 곡을 나갔다고?”

 

“이전처럼 며칠 떠돌다가 들어오겠지요. 너무 심려 마십시오.”

 

“혼인할 나이가 되었으면 그 버릇을 고칠 때도 되었거늘 아직도 그 모양이라니, 으으음, 그럼 그놈은 놔두도록 해라. 돌아와도 부르지 말고. 더 이상은 봐주지 않을 게야.”

 

초로인은 짐짓 화를 내는 노인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잘 타이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

 

공손천우는 오 년 전에 죽은 셋째 동생의 아들로 자신의 아들과 상극이었다.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는데, 성격이 괴이해서 평상시에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만 지냈다.

 

게다가 역마살이 있어서 일 년에 대여섯 번씩 집을 나가 십여 일씩 놀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런 말썽을 부림에도 부친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천우를 감싸고돌았다. 일찍 죽은 동생 때문인 듯했다.

 

초로인은 그래서 천우가 싫었다.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는 아들과 매일 말썽이나 부리는 놈이 같은 취급을 받다니.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게 너에게 더 좋을 것이다, 천우.’

 

 

 

2

 

 

 

백무천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삼백에 가까운 사람들이 들어가서 삼십여 명만이 살아나왔다. 유령총 외부에서 신마성과 싸우다 죽은 사람은 불과 오십여 명, 나머지는 유령총의 미로에서 죽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신마성에, 그리고 나중에는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에게. 심지어 신마성의 무사들조차 흑의인들에게 죽었다고 한다.

 

그나마도 유령총과 계곡이 통째로 무너지면서 살아나온 사람들 중 반 가까이서 죽었으니, 성패여부를 떠나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중에는 딸인 백초령도 있지 않은가.

 

‘후우, 내가 직접 가봤어야 하거늘…….’

 

허공을 노려보던 백무천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는 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직접 갔다면 딸만큼은 구했을지 몰랐다.

 

비감에 젖었던 백무천은 한참만에야 이를 악물고 고개를 쳐들었다.

 

‘만약 정말로 초령이가 죽었고 흑의인들이 그곳과 연관된 자들이라면, 더 이상은 절대 참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쳐든 그의 눈에서 새파란 광망이 흘러나왔다.

 

능력이 있음에도, 그가 문파의 세를 확장하지 않는 것은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호가 강호의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걸. 하늘 밖에 또 하나의 하늘이 있고, 그 하늘이 암중으로 강호를 움직이고 있다는 걸.

 

그래서 그는 신검문을 어느 한계 이상으로 키우지 않았다. 하늘 밖에 있는 자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한마디로, 죽 쑤어서 개 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정말 자신의 추측이 옳다면 모든 것을 걸고 하늘을 뒤집을 작정이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꼴이 될지라도.

 

‘네놈들은 아직 나를 몰라. 나, 백무천이 어떤 사람인지.’

 

바로 그때 백유현이 전각문을 부서질 듯이 열고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형님!”

 

백무천은 눈빛을 가라앉히고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그리 서두르느냐?”

 

“초령이를, 초령이를 남창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백무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이마에 깊게 파였던 주름이 거짓말처럼 펴졌다.

 

“뭐야? 그게 정말인가?”

 

“예, 형님!”

 

“확실히 초령이라더냐?”

 

“직접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만, 위태곤과 운조평, 등청이 젊은 여자를 데리고 남창의 부둣가에 내리는 걸 봤다고 합니다. 행색이나 상황을 봐서 초령이일 확률이 열 중 여덟 이상은 될 것 같습니다.” 

 

죽은 줄 알았다. 살아있을 확률이 열 중 하나둘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확률이 여덟아홉으로 변했다.

 

그것만 해도 어디란 말인가!

 

“사람을 보내서 즉시 확인해보도록 해라!”

 

백무천의 상기된 목소리가 대전을 울리는 와중에 한 사람이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사부님, 제가 가겠습니다.”

 

화청백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며 백무천을 바라보았다.

 

“너는 아직 몸이 온전치 않으니 쉬도록 해라.”

 

“아닙니다, 사부님. 공력도 팔 할 정도 되찾았고 다른 곳도 별 이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초령이를 찾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제자의 마음을 헤아려주십시오!”

 

백무천이 어찌 화청백의 마음을 모를까. 게다가 비록 몸은 다쳤지만 유령총의 일로 한 단계 더 성숙해진 화청백이었다.

 

“으음, 좋다. 그럼 너에게 맡길 것이니, 믿을 만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사부님!”

 

 

 

화청백이 남창으로 떠날 별동조를 꾸리는 동안, 한곳에서는 나직한 말이 오갔다.

 

백의 중년인은 찻잔을 입에서 떼며 담담히 말했다.

 

“백초령이 살아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눈두덩이 시커멓게 멍든 악진표가 고개를 숙였다.

 

“예, 틀림없이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 자식은?”

 

“그 개자식에 대한 것은 아직…….”

 

두 사람은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고도 그게 누구를 지칭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게으르고 형편없는 놈일수록 명이 긴 법이다. 백초령이 살아 있다면, 그놈도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 화청백이 구출대를 꾸리고 있다 했지? 그 안에 우리 사람을 심어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주군.”

 

“만약 놈을 발견하면 확실하게 지우도록 해라. 그리고 천풍장도 깨끗하게 정리해. 이번에도 일을 망치면, 네놈의 눈을 뽑아버릴 것이니, 내 말을 명심하도록.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악진표는 식은땀을 흘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 개자식이 아무 것도 전해주지 않고 그곳에 묻힐 줄 누가 알았나? 제길, 아무래도 안 되겠군. 이곳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 있는 게 낫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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