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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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02화
102화
진기로 목소리를 막지 않았더니 누군가가 듣고 찾아온 듯했다. 게다가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봐서 잠마원에 있다는 다른 노마두인 것 같았다.
‘오래전에 죽었다고 소문난 사람들인데 얼굴 한번 보는 것도 괜찮겠지.’
풍천은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서 다시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이청사는 그런 풍천을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별일 아니네. 장로원의 추교가 와서 이야기 중이라네.”
“젊은 목소리도 들리던데…… 들어가도 되겠소? 나도 잠이 안 오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면 함께 즐깁시다.”
미처 이청사가 말릴 틈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반점이 가득한 노인은 이청사의 허락이 없는데도 방 안으로 들어오며 눈알을 굴렸다.
곁눈질로 그 노인의 모습을 재빨리 훑어본 풍천은 머릿속의 기억창고를 뒤져보았다.
난장이처럼 작은 키, 뒷짐 진 손에 들린 작은 지팡이 하나.
곧 적당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쇄혼곤왜(碎魂棍矮) 곡남초?’
잠마원의 다섯 노마두 중의 하나로 다섯 중 가장 잔인한 악명을 떨친 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곡남초였다.
곡남초는 곁눈질로 자신을 쳐다보는 풍천의 태도가 무척 기분 나빴다. 새카맣게 어린놈이 어디서 저런 건방진 태도로 어른을 바라본단 말인가?
“이 형, 저 건방진 꼬마는 누구요?”
기분 나쁜 것은 풍천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를 끊은 것도 모자라서 건방진 꼬마라고?
“제가 누구든, 노인네가 뭔 상관입니까?”
“그놈, 어른 대하는 태도가 영 글러먹었군.”
“제 걱정 마시고 가서 주무시죠? 귀신 돌아다니는 시간에 노인네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놀랄지 모르니까요.”
“뭐야? 클클. 그놈, 목숨이 몇 개 되는 모양이구나.”
“참나, 여기 노인네들은 왜 이렇게 성질이 사나운 건지 모르겠네. 말끝마다 사람 죽일 것처럼 말을 하니 원. 그러다 젊은 놈한테 한소리 들으면 또 기분 나쁘다고 하겠죠?”
곡남초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번뜩였다.
이청사와 설추교는 두 사람을 말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곡남초가 잠마원에 있긴 해도 아직 왕년의 실력이 완전히 녹슨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칠팔 할 정도의 실력은 발휘할 수 있을 터, 곡남초를 통해서 풍천의 진정한 실력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곡남초는 두 사람의 바람대로 움직였다.
“내 이 형을 대신해 저놈의 건방진 주둥이를 뭉개서 버릇을 좀 고쳐놓아야겠소.”
주름진 입술을 비틀며 몇 마디 내뱉은 그는 풍천에게 다가가며 지팡이를 내밀었다.
“이리 오너라, 이놈. 어르신이 네놈의 버릇을 확실하게 고쳐주마.”
그의 지팡이 끝부분에는 작은 갈고리가 양쪽으로 두 개 달려 있었다. 그는 그 갈고리로 풍천의 뒷덜미 옷을 낚아챘다. 다른 때 같으면 옷이 아니라 입이든 귀든 아니면 눈구멍이라도 뚫어서 잡아당겼을 테지만 이청사의 손님이니 꾹 참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당연히 무게가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풍천은 그가 당기는 방향으로 날아가며 곡남초가 빤히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뒤로 돌아갔다.
이청사와 설추교가 그걸 보고 입을 벌렸을 때는 이미 풍천이 곡남초의 뒤에 내려선 뒤였다.
하지만 곡남초도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사람답게 풍차처럼 몸을 돌리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휘이잉!
그러나 혼을 부순다는 그의 지팡이도 풍천의 빠름을 잡지 못했다.
풍천은 휘둘러지는 지팡이를 따라 돌며 좌수를 뻗었다. 그리고 지팡이의 중간을 잡아서 끌어당기고, 우수로는 천라신수를 펼쳐 곡남초의 어깨를 후려쳤다.
퍽!
순간적으로 중심이 무너진 곡남초는 어깨를 맞고 한쪽으로 나뒹굴었다.
옆에서 보기에는 간단한 동작에 무너진 듯 보였다. 그러나 이청사와 설추교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방심했다 해도 그렇지, 쇄혼곤왜 곡남초가 눈 한 번 깜박일 동안에 무너졌거늘 어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이보게 잠깐만…….”
“손을 멈추게나.”
눈이 한껏 커진 두 사람은 다급히 싸움을 말렸다.
풍천은 마지못한 듯 손을 털며 짜증 내듯이 말했다.
“왜 좋은 입 놔두고 꼭 힘을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네. 노인네들의 뼈는 약해서 한 대 맞으면 그냥 부러질지 모르는데.”
손에 공력을 강하게 주입하지 않았으니 중상을 입지는 않았겠지만 한동안 한쪽 어깨를 쓰지 못할 정도는 되었다.
적진에서 더 이상의 소란을 피워봐야 좋을 게 없는 상황. 그는 이 정도에서 참기로 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곡남초는 눈에서 불길을 활활 뿜어내며 풍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바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두어 수만에 당하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네놈은 누구냐?”
“나요? 잘생긴 고금제일의 해결사, 잠풍.”
뭐?
저런 미친놈에게 당하다니.
곡남초는 분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때 이청사가 입을 열어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래도 일을 크게 벌여봐야 좋은 꼴 볼 것 같지가 않았다.
“저 젊은 친구는 내 손님이네. 자네가 먼저 손을 쓴 것도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 참게. 말투가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어쩌겠나? 청부업이나 하는 자가 예절교육을 받았을 리가 없잖은가?”
그는 그 와중에도 풍천에게 소심한 복수를 했다.
그러나 풍천도 할 말은 있었다.
“눈떠서 잠들 때까지 죽어라 수련만 하다 보니까 예절교육 같은 것은 받을 시간도 없었죠. 그래도 곱게 말하는 사람한테는 저도 함부로 말 안 합니다. 두 분이 저를 어떻게 대했나 생각해보쇼. 꼭 고집불통 노인네들처럼 몰아붙이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이청사와 곡남초가 문제라는 말.
‘저놈이…….’
하지만 이청사는 더 이상 말꼬리 잡지 않고 한껏 짜증이 난 목소리로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래,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던데, 뭐냐?
“왜 짜증을 냅니까?”
“…….”
‘이놈이 정말……!’
이청사의 얼굴이 벌게지자 결국 설추교가 나섰다.
“어서 말해보게.”
“좋습니다. 설 장로님의 얼굴을 봐서 한 번 더 참죠. 얼마 남지도 않은 분들이 왜들 저러는지 원…….”
굳이 뭐가 얼마 남았는지 물어볼 것도 없었다. 뻔했으니까.
“이……!”
이청사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설추교는 이청사의 소맷자락을 슬쩍 잡아당기며 풍천에게 말했다.
“자네도 원하는 것을 빨리 알아내고 가야 하지 않겠나?”
그때 풍천이 홱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곡남초가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풍천의 눈이 향한 곳은 곡남초가 아니라 방문이었다.
“밖에서 쥐가 엿듣는데 말해도 될지 모르겠군요.”
직후 헛기침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방문이 열렸다.
“험험, 이 늙은 쥐도 무슨 일인지 알고 싶군.”
문밖에 있던 자는 얼굴이 불그레한 백발노인이었다. 그를 보더니 앉아 있던 이청사가 일어났다.
“공연히 소란을 피워서 잠을 깨웠습니다, 원주…….”
“아직 죽을 때가 되진 않았나 보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야.”
백발노인은 담담히 말하며 시선을 풍천에게로 향했다.
풍천은 노인이 누군지 알아채고 입맛을 다셨다.
‘제길, 수십 년 전에 죽었다던 마귀들이 모두 모이는군.’
그는 잠마원에서 가장 큰 어른인 연혼마종 은고평이었다. 구마존 이전에 마도를 지배했던 팔대마종 중 한 사람이며 신마성주 혁련궁에게 사숙이 되는 자.
그러니 천하제일의 간담을 지닌 풍천이라 해도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풍천이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닫고 있자 은고평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가달라면 나가주겠네.”
풍천은 대범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제가 통이 좀 크거든요.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알아야 속이 시원해지는 법이죠. 노인들은 속병이 들면 더 빨리 죽는다는데 제가 거부하면 빨리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는 은고평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든 말든 이청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설 장로님의 말씀도 있고, 그럼 일을 빨리 매듭짓지요. 그때 노선배님을 공격했던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청사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그자는 내 가슴에 검을 꽂은 후 도주했지. 하지만 그도 내 손에 가슴을 격중 당해서 중상을 입었을 거다.”
“그랬군요. 어쩐지 사문으로 돌아오시지 않았다고 하더라니…….”
“그 후 나는 죽은 것처럼 소문내고 몸을 고쳤다. 다행히도 검이 심장을 비켜나가서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는데 예전과 같은 무공을 회복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지.”
“결국 그분은 죽고 노선배님은 살아났군요. 그럼 청부를 실패한 게 확실하단 말인데…… 결국 내가 처리해야 하나?”
그 말을 들은 이청사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을 지금이라도 죽이겠다는 건가?
곡남초와 은고평도 주름진 입술을 살짝 벌리고 풍천과 이청사를 번갈아 보았다.
대체 뭔 말이야? 그런 표정이었다.
설추교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위약금을 주었으니 자네 사문과 어르신 사이의 일은 끝난 걸로 알아도 되겠지?”
풍천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질문은 이제 끝났나?”
“대충은.”
“그럼 내가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뭔데요?”
“그 청부를 한 자가 누군가?”
“그건 말 못 하죠. 해결사에게도 나름의 지켜야 할 법이 있거든요.”
“돈을 더 주겠네.”
“내가 뭐 돈에 환장한 놈인 줄 아쇼?”
“그럼 어떻게 해야 알려줄 수 있는가?”
“청부자들이 먼저 약속을 어기기 전에는 절대 말할 수 없어요.”
“그래도 사십 년 전의 일인데…….”
풍천은 설추교를 빤히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말이죠,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모험할 생각 마쇼. 무슨 말인지 알죠?”
설추교는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방 안에 이청사와 곡남초는 물론 은고평까지 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잠마원의 두 사람도 소란이 더 커지면 나타날 것이다.
비록 나이가 워낙 많이 들어서 예전과 같은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지만, 모두가 전대의 노고수들이 아니던가.
거기다 열두 명의 호원무사들까지.
풍천이 이들을 뚫고 도망갈 수 있을까?
평소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곡남초가 눈 깜짝할 순간에 당한 걸 본 후였다. 거기다 자신은 느낄 수도 없을 만큼 은밀한 신법을 펼치는 놈이었다. 유령이나 다름없는 놈.
‘후우우, 도주하려고 마음먹으면 누구도 이놈을 잡을 수 없어. 제기랄.’
결국 그렇게 결론 내린 설추교는 풍천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언제든 청부자를 밝힐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나에게 알려주게. 그럼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풍천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이 되면 얼마든지 거래하죠. 흠, 이제 대충 일이 마무리된 것 같은데…….”
풍천은 스윽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청사와 은고평과 곡남초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풍천은 그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빙긋 웃어주었다.
“그럼 기회가 되면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저는 바빠서 이만…….”
그러고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치 않고 몸을 돌렸다. 그가 방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뒤에서 새파랗게 날 선 창날 같은 눈빛들이 쏟아졌다.
“달이 참 밝군. 신마성 월명야(神魔城 月明夜)라…….”
방을 나서던 풍천은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민 달빛을 태연하게 올려다보고 되지도 않는 시를 한 구절 읊었다.
그러고는 이청사의 방문이 닫히자마자 즉시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방에서 호원무사들의 기운이 밀려들었다.
풍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지가 빠지도록 전력을 다해서 잠마원으로부터 멀어졌다.
‘지미, 객기 부리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