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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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01화
101화
제1장. 신마성 월명야(神魔城 月明夜)
1
설추교의 멱살을 확 잡아당긴 풍천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또박또박 말했다.
“하마터면 잊고 갈 뻔했군요. 명심하쇼. 제가 살아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질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약속은 모두 취소되고 피바람이 불 것입니다.”
말을 하는 동안 그의 두 눈에서 푸른빛이 기이하게 일렁였다.
그 눈빛과 마주친 순간, 설추교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충격에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풍천은 석상처럼 굳은 설추교를 밀치고는 한마디 덧붙이며 몸을 돌렸다.
“제 말, 절대 잊지 마쇼.”
순간 설추교가 빤히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어둠 속으로 녹아들면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설추교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서 이를 악물었다.
어디에 있는 걸까? 방 안에 있는 걸까?
그때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며 덜컹거렸다. 미약한 소리인데도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충격이 설추교를 짓눌렀다.
설추교는 직감적으로 풍천이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느끼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서 요추 끝부분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혹시 유령총에서 죽은 그가 진짜 유령이 되어서 돌아온 것이 아닐까?’
설추교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비친 화톳불의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의 마음까지 흔들었다.
그때 풍천의 재촉하는 전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뭐하십니까? 앞장서라니까요?]
설추교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2
와우산 서쪽.
신마성 담장에서 백여 장 떨어진 계곡에 네 채의 전각이 울창한 숲과 암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세워져 있었다. 모두 일 층으로 된 전각이었는데 중 떠난 사찰처럼 조용했다.
하지만 그곳은 사찰이 아니라 신마성의 늙은 마귀들이 노년을 보내는 곳, 잠마원(潛魔院)이었다.
잠마원에는 모두 다섯 명의 노마가 기거했다. 그들의 평균 나이는 아흔에 가까웠는데, 가장 많은 사람은 백두 살의 연혼마종 은고평이었고 이청사는 아흔셋으로 은고평 바로 아래였다.
혁련궁은 노마두들이 세운 공을 생각해서 와우산의 계곡 중 가장 멋진 곳을 골라 잠마원을 지어주고 편안한 노후를 지내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유에 불과했다. 그가 노마두들을 위해 잠마원을 세워준 것은 마도무림의 절기 중 절기라 불리는 그들의 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노마두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 중 세상과 더 얽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순순히 잠마원에 들어가서 유유자적하며 지냈다. 제자가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잠마원이 있는 계곡으로 들어선 설추교는 곧장 이청사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환신술을 펼친 풍천은 설추교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잠마원을 살펴보았다.
세 채의 건물이 남쪽을 비워둔 채 망(亡)자 형태로 세워져 있고, 그 가운데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 정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건물 하나는 한쪽에 망자의 꼭지처럼 붙어서 지어져 있었는데, 음식 냄새가 흘러나오는 걸 보니 노마들의 식사를 만드는 주방인 듯했다.
‘냄새를 맡았더니 배가 고프네, 쩝.’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잠마원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지만 풍천은 거짓된 고요를 믿지 않았다.
빙 둘러진 숲속에 호원무사들이 매복해 있는 게 느껴졌다. 하나같이 은잠술(隱潛術)이 뛰어나고,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는 기운마저 감출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천풍의 후예인 풍천에게는 아이들 장난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어른이라 해서 아이들의 칼에 찔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방심했다가 아이들이 휘두른 칼에 찔리면 그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아예 다 제거해버릴까?’
매복해 있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풍천은 그들을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아직 볼일을 다 보지도 않았는데 저들을 긴장시켜봐야 이익될 게 없었다.
‘이 공자님께 볼일이 있는 걸 다행으로 아슈.’
설추교가 잠마원으로 들어가자 어둠 속에서 장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 장한은 설추교도 두어 번 본 자였다. 그러나 잠마원에 들어선 이상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분을 밝혀주시지요.”
설추교는 잠마원에 올 때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품속에서 장로들에게 지급된 은패를 꺼내 내밀었다.
장한은 은패를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로. 그런데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이청사 어르신을 만나러 왔네.”
장한은 설추교가 한 달에 한 번 꼴로 이청사를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들어가시지요.”
“그럼 수고하게.”
설추교는 곧장 이청사가 기거하는 건물로 향했다. 이청사의 방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요즘 밤늦도록 책을 보신다더니 아직도 주무시지 않나 보군.’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설추교는 풍천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이청사의 방문을 두드렸다.
역시 잠을 자고 있지 않았던 듯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누구냐?”
“추교입니다, 어르신.”
“들어오너라.”
설추교는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풍천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지?’
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유령 같은 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으로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밤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어르신.”
“괜찮다. 잠이 오지 않아서 책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네 뒤에 있는 젊은이는 누구냐?”
“예?”
흠칫한 설추교가 고개를 돌리려는데 풍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노선배님께 물어볼 게 있어서 설 장로님과 함께 왔습죠.”
설추교는 급살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어, 언제?’
그가 어찌 알까. 한 많은 벽라족의 특별한 기운이 있어야만 익힐 수 있다는 환신술의 신묘함을!
“나를?”
이청사는 의아한 투로 반문하고는 설추교를 바라보았다.
설추교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이청사는 주름이 가득한 눈으로 풍천을 응시했다.
자정이 넘어간 시간. 장로인 설추교를 앞세우고 자신을 찾아왔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봐도 결코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젊은이는 누군가?”
풍천은 대답에 앞서 이청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앉은 다음에 이야기하죠.”
이청사의 주름진 이마에 더욱 깊은 고랑이 파였다. 하지만 입을 열지 않고 풍천이 하는 행동만 지켜보았다.
풍천은 의자에 앉은 다음 찻주전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설추교에게 물었다.
“설 장로 방에 있던 것하고 같은 차 같은데요?”
당연히 그럴 것이었다. 이청사가 마시는 차는 설추교가 대주었으니까.
설추교는 풍천의 행동에 차마 소리를 지르진 못하고 눈만 부라렸다.
그러든 말든 풍천은 고개를 돌려 이청사를 바라보았다.
“저기, 한 잔 마셔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잔은 여기 있네.”
이청사는 별놈 다 본다는 눈빛으로 풍천을 보며 찻잔을 하나 밀어주었다.
찻잔 가득 차를 따른 풍천은 허기진 배를 차로 채웠다.
풍천이 단숨에 비운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자 이청사가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이 늙은이를 찾아온 건가?”
“오래전의 일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오래전이라…… 이 늙은이가 이곳에 머문 지 이십 년, 한 번도 와우산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네. 그런데 언제 적 일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아마 사십 년쯤 되었을 겁니다.”
이청사의 노안에 의아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사십 년 전의 일로 만나러 왔다니, 그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말해보게. 뭘 물어보겠다는 건가?”
“혹시 사십여 년 전에 누군가가 이 노선배님을 죽이기 위해서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이청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름이 가득한 눈꺼풀이 잘게 떨리고 쪼글쪼글한 입술이 열릴 듯 말 듯 들썩였다.
“네가 그 일을 어떻게 아는 것이냐?”
“책에서 봤거든요.”
“책에서?”
“저희 사문에선 중요한 청부를 맡을 때마다 청부 건에 대해서 은어로 적어놓죠. 그래야 실패했을 경우 후예가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네가 당시 나를 죽이려고 왔던 놈의 후예다, 그 말이냐?”
풍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한마디 한 것 가지고 저에 대한 것을 간단하게 유추하시다니, 아직 정정하시군요. 그 정도면 뭐 당분간 치매 걸려서 여기저기 그림 그릴 걱정은……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그걸 몰라서 물어?
이청사는 분노와 어이없음이 뒤섞여서 바로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당황한 설추교가 급히 나서서 풍천을 나무랬다.
“무슨 짓인가? 예의를 갖추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저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요? 아니, 아흔이 넘은 노인에게 정정하시다고 한 것이 잘못입니까?”
“누가 그걸 말하는가?”
“그럼 치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게 잘못입니까?”
설추교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렇게 따로따로 말하면 분명 잘못한 것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당시의 말투는 분명 상대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고도 남았다. 더구나 상대는 아흔이 넘은 노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설추교는 더 이상 다그치지 못했다.
화가 나서 나무라긴 했지만 지금은 풍천의 비위를 거스를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그치기는커녕 풍천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때 마침 이청사가 입을 열었다.
“됐다, 내가 처리하마.”
처리?
화들짝 놀란 설추교가 다급히 나섰다.
“어르신, 일단 나머지 말부터 들어보시고……”
하지만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이청사가 우수를 뻗었다.
풍천과 그의 거리는 여섯 자가 넘었다. 게다가 이청사는 엉덩이도 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청사의 손은 풍천의 멱살을 정확히 잡아갔다. 앉아 있던 의자가 얼음 위의 접시처럼 미끄러져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시퍼런 기운이 어려 있는 우수를 뻗으며 이청사는 오랜만에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덥석.
단숨에 풍천의 멱살을 잡은 그는 득의에 찬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놈, 어디 다시 한번 말해봐라. 치매 걸려서 벽에 그림 그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풍천은 멱살이 잡히고도 태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치매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는데 그 성질이 문제군요. 아흔이 넘으셨으면 이제 성질도 죽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뭐, 뭐라?”
이청사의 두 눈에서 살기가 감돌았다. 혼쭐만 내주고 말 생각이었거늘 건방진 놈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질 않는가 말이다.
그러나 풍천은 그런 이청사의 눈빛을 보고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설추교에게 말했다.
“설 장로님, 이제 저보고 뭐라 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분명히 약속을 지켰으니까요.”
솔직히 설추교는 풍천의 멱살이 이청사에게 잡히자 자신이 풍천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풍천의 말을 듣고 나서야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자, 잠깐만 기다리게!”
다급히 소리친 그는 이청사에게 사정했다.
“어르신, 일단 그 손을 놓으시고 저 젊은 친구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흥, 이놈은 사십 년 전에 나를 죽이러 왔던 놈의 후예다. 그러데 내가 왜 이 녀석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냐?”
“제가 어찌 어르신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제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만…….”
이청사는 풍천을 당장 죽일 것처럼 쏘아보았다.
“잘못했다고 빌어라, 이놈. 그럼 용서하고 손을 쓰지 않으마.”
“거참, 정말 앞뒤 분간 못 하시는 분이네. 쳇, 마음 같아서는 그냥 모른 척하고 싶은데 설 장로님이 그리 나오시니 제가 참죠.”
“뭐? 어디서 이런 미친놈이…….”
이청사는 어이가 없어서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끌어당겼다.
설추교가 저리 사정하니 심장을 부수진 못해도 주둥이 정도는 한 대 쳐서 이 몇 개 부러뜨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손을 당기다 말고 멈칫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에 쥐어져 있던 옷자락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툭툭 옷자락을 턴 풍천이 눈꺼풀을 잘게 떨고 있는 이청사를 째려보았다.
“운 좋은 줄 아쇼. 만약 손에 살기가 담겨 있었다면 손목이 부러졌을 거요.”
이청사는 몇 개 안 남은 이를 악물고 풍천을 노려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눈 한번 깜박 안 하고 있었는데 언제 빠져나갔단 말인가?
두 사람이 눈싸움을 벌이자 설추교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재빨리 나섰다.
“이보게, 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게.”
하지만 풍천이 질문하기 전에 밖에서 먼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이 형, 무슨 일이오? 손님이라도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