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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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96화
96화
어느새 비는 멈춘 상태였다. 바람이 불자 자욱한 안개가 호수 쪽에서 밀려들었다.
기회라면 기회다. 더 늦으면 빠져나가지도 못한다.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는 하나라도 살려야 한다.
천풍신공을 전신에 퍼뜨린 그는 유혼의 기운마저 일으켰다. 아직 초기 단계인 환신술이지만 지금처럼 안개가 낀 밤이라면 적잖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공력소모가 클지 모른다는 것인데…….
‘어쩔 수 없지. 당장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중요하니까.’
그때였다.
콰광!
폭음이 일면서 상관경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신마성 무사 십여 명을 처리하느라 낮에 입은 내상이 도진 상태였다. 그 몸으로 운조평과 등청을 상대했으니 성할 리가 없었다.
“크하하하! 이제 그만 누워라!”
상관경의의 상태를 알아본 듯 등청이 호탕한 대소를 터트리며 탈혼도를 휘둘렀다.
탈혼도에서 뻗친 도강이 안개를 갈가리 찢어발기며 상관경의를 덮쳤다.
내상이 악화된 상관경의는 이를 악물고 등청의 공세를 받아냈다.
쩌저저정!
밀려들던 안개가 두 사람의 기운이 부딪친 여파에 폭죽처럼 터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상관경의도 연이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뒤로 물러섰다.
순간 운조평이 쌍장을 휘두르며 상관경의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상관경의는 검으로 등청의 공세를 막고, 좌수의 봉마인으로 운조평의 흑운장을 상대했다.
쩌저정! 콰광!
귀청을 찢는 격돌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상관경의가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운조평과 등청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노회한 강호의 고수답게 한 번 잡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두려울 정도로 강한 저자를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잡을 수 있으랴!
“죽어라, 이놈!”
“하아앗!”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상관경의를 공격했다.
상관경의도 혼신을 다해 검을 뻗고 장을 내질렀다. 그러나 내력이 뒤틀린 그의 공세는 전에 비해 반의 위력밖에 발휘하지 못했다.
일순간, 탈혼도의 도강이 상관경의의 검을 밀어내고 가슴을 훑으며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운조평의 흑운장력이 상관경의의 좌수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우드득.
상관경의의 좌수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크으으윽.”
끝내 참고 있던 신음을 토해낸 상관경의의 몸이 이 장 뒤로 날아갔다.
진호량이 비명처럼 외치며 눈을 부릅떴다.
“형니이이임!”
하지만 세 사람에게 둘러싸인 그는 상관경의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운조평과 등청은 상관경의가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었음을 알고 그를 사로잡기 위해서 손을 늦추었다.
바로 그때였다. 진호량을 둘러싸고 있던 자들 중 하나가 고개를 번쩍 쳐들며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토했다.
“컥!”
모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간 순간, 한 줄기 전음이 진호량의 귀청을 울렸다.
[어서 도망치쇼!]
진호량은 그 목소리가 잠풍, 풍천의 것임을 알고 최후의 진력까지 모조리 끌어올렸다.
풍천은 진호량을 상대하던 자 하나를 처치해서 그쪽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돌리고 상관경의를 향해 날아갔다.
그때까지도 신마성 사람들 누구도 풍천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다.
[나를 꽉 잡으쇼!]
먼저 전음을 보낸 풍천은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상관경의를 낚아챘다.
순간, 어둠 속에서 상관경의가 갑자기 허공으로 떠올랐다. 환신술을 펼쳐서 어둠에 녹아든 풍천은 보이지도 않았다.
대경한 운조평과 등청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웬 놈이냐!”
“감히 어디서 헛수작을 부리는 거냐!”
상관경의를 어깨에 걸친 풍천은 찰나 간에 신마성 무사들의 머리를 타넘은 후 갈대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진호량의 광소가 어둠을 뒤흔들었다.
“우하하하하! 가려거든 내 몸을 짓밟고 가라, 신마성의 마졸들아!”
운조평과 등청은 풍천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풍천이 상관경의를 구하려 한다는 걸 안 진호량이 상대하던 자들을 놔두고 한 발 먼저 두 사람을 공격한 것이다.
상관경의만은 못하다지만 운조평이나 등청에게 뒤지지 않는 고수가 바로 진호량이다. 죽음을 각오한 그의 공격은 두 사람조차 섬뜩할 정도였다.
그들이 잠깐 주춤하는 사이 풍천과 상관경의의 모습은 완전히 갈대숲 속으로 사라졌다.
뒤늦게 위태곤과 육종계가 갈대숲 속으로 몸을 날리며 악을 쓰듯 외쳤다.
“놈을 쫓아라!”
“놓치면 안 된다!”
위태곤은 분노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대체 어떤 놈이 감히 신마성의 일을 방해한단 말인가!
‘어떻게 잡은 기횐데’
그때 문득, 상관경의를 낚아채가던 자의 유령 같은 신법이 누군가가 펼치던 신법과 겹쳐졌다.
‘서, 설마……?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놈은 그곳에서 죽었어!’
3
단숨에 갈대숲을 벗어난 풍천은 곧장 북쪽으로 달렸다.
그는 진호량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걸 알고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의심해서 그렇지 우직한 맛이 있어서 밉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신마성의 손에 죽을 거라 생각하니 아쉽기만 했다.
‘위태곤 같은 놈이 죽어야 하는데, 어째 꼭 죽어야 할 놈은 안 죽고 아까운 사람들이 먼저 죽는다니까. 하늘도 참…….’
사부님도 그렇고, 형도 일찍 죽지 않았는가 말이다. 빌어먹을!
‘당신은 복 받은 줄 아쇼.’
그때 상관경의의 신음소리가 어깨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으으음.”
그제야 풍천은 상관경의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당장 적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먼저였으니 이해하쇼.’
풍천은 걸음을 늦추고 근처의 풀밭에 상관경의를 눕혔다.
갈라진 가슴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갔다면 부상보다 과다출혈로 죽었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풍천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일단 상관경의의 손을 풀고 검을 떼어냈다.
기절한 와중에도 상관경의는 검을 놓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손과 검의 손잡이는 핏물로 젖어 있었는데, 마치 핏물이 손과 검을 아교처럼 붙여놓은 것 같았다.
‘비싼 검인가?’
풍천은 그다운 생각을 하며 검을 한 번 훑어보고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혈을 눌러 지혈부터 하고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슴에서 어깨까지 이어진 도상은 한 자 길이에 깊이도 깊은 곳은 반 치나 되었다. 하지만 심장은 이상이 없었고 동맥도 잘라진 곳이 없었다.
하긴 그곳이 다쳤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지혈도 하지 않고 십 리를 달렸으니.
풍천은 상관경의의 장포를 찢어 상처 부위를 꽁꽁 동여맸다. 조금 답답할 테지만 상처가 커서 벌어지면 안 되었다.
가슴의 상처를 손본 그는 좌수를 살펴보았다.
팔꿈치가 탈골되고 손목뼈가 으스러져 있었다.
‘이건 좀 골치군. 낫는다 해도 왼손으로 상승 무공을 펼치지는 못하겠는데?’
그래도 일단 팔꿈치의 어긋난 뼈를 맞추고, 손목 역시 부서진 뼈를 어느 정도 맞춘 다음 주위에서 주운 나뭇가지를 댄 후, 장포를 찢은 천으로 감쌌다.
일단 외상을 대충 치료한 풍천은 상관경의의 내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보았다.
잠시 후, 풍천은 이마를 찌푸리며 상관경의의 몸에서 손을 뗐다.
예상했던 것보다 내상이 심했다. 여기저기 혈도가 막혀 있고, 내장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이삼 일을 버티지 못하고 죽을지 모를 정도로.
갈등이 일었다.
내상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공력을 주입해야 한다. 하다못해 주요혈도 두어 군데라도 뚫어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산다 해도 무공을 영원히 잃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자신이 공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상관경의의 내상을 치료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자신은 천외가 천상신문인지,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된다. 그것만 알면 초령이도 구할 수 있고, 아극사의 부탁도 들어줄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상태라면 대답해줄지 몰라.’
바로 그때, 진호량의 목소리가 저편 어딘가에서 귀청을 쩌렁거리며 울리는 듯했다.
“비겁한 놈! 옹졸한 놈! 역시 너는 그런 놈이었구나! 네놈은 남자 새끼도 아니다!”
흠칫한 풍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비겁하다고? 옹졸하다고? 남자 새끼도 아니라고?
‘흥! 내가 누군지 알면 그런 소리하지 못할걸?’
하지만 그는 꿈속에서라도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진호량이 진짜로 꿈속에까지 나타나는 것은 더욱 원치 않았다.
‘좋아, 이번만은 봐주지! 이 공자님께서 대범하고 남자답다는 걸 보여주겠어!’
풍천은 진호량의 영혼에게 들으라는 듯 속으로 크게 외쳤다. 그리고 상관경의의 내상을 간단하게나마 손보기로 했다.
좀 더 확실하게 치료하는 것은 신마성의 추적을 벗어난 다음의 일이었다. 상관경의의 내상을 치료한답시고 공력을 소모했다가 신마성 놈들을 만나면 큰일이 아닌가 말이다.
일 각 후. 상관경의의 몸에서 손을 뗀 풍천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처음으로 해본 진기요상대법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막힌 혈도 일곱 군데 중 두 곳을 뚫었고, 뒤틀린 내력도 바로잡아서 실낱같은 길을 만들어놓았다. 당장은 실낱같은 통로지만 시간이 가면 점점 넓어질 것이다.
‘이제 당신이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쇼. 이 정도만 해도 크게 인심 쓴 거니까.’
몸을 일으킨 풍천은 상관경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서 어깨에 걸쳤다.
그때였다. 상관경의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고맙네…….”
풍천은 이상한 기분에 얼굴이 벌게졌다. 괜히 히죽 웃음이 나오고, 몸에 힘이 솟는 듯했다.
‘뭐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
4
금마문에 머물던 위태곤은 날이 밝은 때까지 사라진 적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지 않자 맥이 쭉 빠졌다.
‘정말 그 자식이 살아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없어. 절대!
위태곤은 세차게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할 거냐?”
운조평이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위태곤은 이를 악물고 잇새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일단 보고를 올리고 천라지망을 더 강화할 생각입니다.”
“그자를 구해간 놈에게 유광과 본성의 무사 삼십여 명이 죽었다. 어지간한 포위망으로는 놈을 잡을 수 없을 거다.”
“그렇다고 도망가게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후우…….”
한숨을 내쉬는 운조평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
‘유광은 공포에 질린 채 죽어갔다. 일도천살 유광이…… 직접 본 나도 믿을 수 없거늘, 천하의 누가 그 말을 믿을까?’
끈적끈적한 지옥의 늪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
솔직히 그는 더 이상 미지의 인물을 추적하고 싶지 않았다.
“나와 등 형은 잠시 성으로 들어가서 내상을 다스릴 생각이다. 괜찮겠느냐?”
“저는 여기서 계속 추적을 지휘하겠습니다. 숙부께선 군사께 말씀드려서 신마비원의 무객 몇 분만 보내달라 해주십시오.”
“알겠다. 말해보마.”
5
운조평은 신마성에 도착하자마자 사우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사우는 운조평의 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째 잠을 설쳤지만 정신만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성주님을 만나 뵐 생각인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혁련궁은 운조평의 보고를 받고 눈을 가늘게 떴다.
“흠, 결국 유광까지 다 죽었단 말이지?”
사우가 먼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적을 너무 얕본 제 실수입니다.”
“아냐, 아냐. 네 실수라고 할 것도 없다. 그만큼 놈들이 강하다는 말이니까. 더구나 놈들도 두 놈만 살았다 하지 않았느냐?”
혁련궁이 손사래를 치며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운조평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둘이 아니라 셋이 될 수도 있다. 자신과 등청이 괴인물을 쫓아간 후 자신들의 앞을 막았던 덩치 큰 자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채 갈대숲으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위태곤의 말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상태라고 했지만 사람의 목숨은 의외로 질긴 면이 있었다.
더구나 낮에 싸웠을 때 봤던 자들은 도주한 둘을 제외하고 그곳에서 모두 죽어 있었다.
그럼 적의 수장을 구해간 자는 누구란 말인가?
‘제삼의 인물이 나타났단 건데, 도무지 누군지를 모르겠군.’
그가 그자에 대한 걸 따로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사우가 그동안 가슴 안에 품고 있던 의문을 밖으로 드러냈다.
“정말 그놈들이 성주께서 말씀하신 그자들일 거라 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