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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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95화
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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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점점 깊어져 어느 덧 해시를 넘어갔다.
어스름이 밀려들 무렵에 멈췄던 비가 그때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안개도 더욱 짙어져서 밤눈이 밝은 강호의 고수도 일이 장 앞을 내다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수십 명의 무사가 어둠과 안개를 헤치며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일절 소리를 내지 않고 부챗살처럼 퍼진 채 호숫가의 드넓은 갈대숲으로 접근했다.
위태곤은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무사들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운이 좋은 걸 보니 하늘은 아직 내 편인 것 같군.’
오백에 달하는 무사들이 천라지망을 펼쳐서 수색하고도 어둠이 밀려들 때까지 놈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호숫가에서 살아가는 어부 하나가 하는 말을 어촌을 수색하던 귀혼신마대의 대원이 들었다.
귀혼신마대원은 즉시 어부를 추궁했고 어부는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드넓은 갈대숲으로 이루어진 곳에 버려진 초막이 하나 있는데, 몇 사람이 들락거리는 게 보였다는 것이다.
귀혼신마대원은 즉시 어부가 말한 갈대숲을 조사해보았다. 그리고 멀리서 초막을 나오는 자를 본 후 즉시 위태곤에게 연락을 취했다.
위태곤은 보고를 받고 인근의 귀혼신마대와 마혼신마대를 소집했다. 운조평과 등청과 유광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상태. 그는 밤이 깊었음에도 공격을 강행하기로 했다.
수하들을 앞세워서 적의 힘을 빼면 자신들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적은 팔대신마 두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고수다. 그만 잡을 수 있다면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할 거야. 후후후.’
내심 즐거워진 위태곤의 입가에 득의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때 유광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안개가 더럽게도 많이 끼었군. 놈들이 도주할지 모르니 철저히 경계하면서 움직여야겠어.”
그는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안개 낀 밤에 강적을 공격한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부상을 치료한 적이 오히려 그러한 점을 이용해서 도주할지 모른다는 위태곤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투덜거리며 따라온 터였다. 그런데 막상 비마저 오고 안개가 더욱 깊어지니 짜증이 났다.
운조평도 그가 짜증내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 형이 좌측을 맡으시오. 중앙과 우측은 나와 등 형이 맡겠소.”
유광은 고개를 끄덕이고 좌측의 갈대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운조평은 짙은 어둠으로 사라지는 유광의 등을 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최소한 한 놈은 사로잡아야 한다. 놈들의 정체를 알아봐야 하니까.”
“그렇게 명을 내렸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사숙.”
위태곤이 자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등청이 탈혼도를 빼들고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사냥을 시작해볼까?”
풍천은 잠을 자다 말고 부스스 일어났다.
마치 강시가 일어나는 것처럼 상반신을 일으킨 그를 보고 진호량과 단천무령은 속으로 흠칫했다.
그들은 풍천의 자는 모습을 보고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갈등했었다.
‘자고 있을 때 죽일까?’
‘아니야, 명색이 천하를 위해 움직인다는 우리가 자존심 상하게 자고 있는 사람을 공격하다니. 그럴 수는 없지.’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죽이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런데 갑자기 몸을 일으킨 걸 보니 거짓으로 잠을 자는 척한 것 같았다. 만약 손을 썼으면, 저놈은 잘되었다는 듯 몇 사람을 죽이고, 당신들이 손을 써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을 것이다.
진호량은 아직도 조는 체하는 풍천이 더욱 얄밉게 보였다.
‘정말 교활한 놈이군. 잠자는 척하면서 우리를 시험하다니. 하마터면 속을 뻔했군.’
하지만 풍천은 조금 전까지 정말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일어난 것은 이원심법 중 깨어 있던 감각이 갈대숲으로 접근하는 기운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왔수.”
풍천이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바로 그때, 상관경의도 다가오는 기운을 감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이다. 호량, 네가 좌측을 맡아라. 그리고 잠풍, 자네가 우측을 맡아주게. 중앙은 내가 맡지.”
풍천은 머리를 흔들어서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짜증내듯이 말했다.
“지미, 잠도 없나. 오려면 아침에나 올 것이지, 왜 이렇게 일찍 오는 거야?”
그러고는 베개로 썼던 검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진호량은 하품을 하는 풍천을 수상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혹시 저놈이 남창에 갔을 때 신마성에 연락한 것이 아닐까?’
그러다 풍천이 고개를 돌리자 재빨리 눈을 돌렸다.
“하여간…….”
풍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단 한마디였다.
그럼에도 진호량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얼굴이 벌게졌다.
‘빌어먹을, 눈치는 정말 귀신같은 놈이군.’
그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은 자존심 타령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갈대숲 갈라지는 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들렸다. 놈들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진호량은 풍천을 쳐다보지도 않고 초막을 나갔다.
풍천도 목과 허리를 두어 바퀴 돌린 후 검을 빼들었다.
‘빌어먹을 놈들, 내일 오면 발바닥에 사마귀가 생기나? 내 이 자식들을……!’
밖으로 나간 풍천은 망설이지 않고 갈대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잠을 방해한 신마성 무사들을 단호하게 응징했다. 어차피 신마성 무사들에게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는 그가 아니던가.
휘이이이잉.
죽음의 바람이 안개 속을 휘저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곳에선 여지없이 피가 튀고, 비명과 신음이 흘러나왔다.
신마성 무사들은 소름이 돋았다. 팔십 명이라는 숫자로 자신만만했던 것도 한순간뿐이었다.
그들은 보이지도 않는 적과 상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절실하게 깨닫고 공포에 휩싸였다.
풍천은 단순히 신법만을 이용해서 적을 상대하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이용했다.
그는 서너 명의 무사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검면으로 갈대를 후려쳤다.
갈대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수전(水箭)으로 화한 채 사방으로 튀고, 부서진 갈대들은 암기가 되어 날아갔다.
쏴아아아! 쉬이익!
퍼버벅!
“헉! 암기다!”
“크으으으…….”
온몸이 벌집처럼 뚫린 자들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직후 바람이 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사풍(死風)이!
일순간, 신음이 비명과 공포에 찬 외침으로 변했다.
“크억!”
“조심해라!”
“일단 갈대숲을 빠져나가!”
풍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근처에 있는 자들을 주살했다. 비가 내리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는 가히 우중사신(雨中死神)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측을 치고 들어오던 이십여 명을 제거한 풍천은 다음 상대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순간, 갈대를 스치며 날아가던 그는 눈에 익은 자를 발견하고 냉소를 지었다. 뒤로 빠져 있던 일도천살 유광이 수하들의 비명을 듣고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풍천은 천풍무영류로 몸을 감추고 유광을 향해 접근했다.
‘음?’
유광은 섬뜩한 느낌이 밀려들자 솜털이 곤두섰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도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쩡!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불꽃이 튀었다.
뒤이어 목덜미가 오싹한 느낌이 들자 몸을 홱 돌리며 다시 도를 쳐올렸다.
도가 허공을 갈랐다는 걸 느낀 순간, 그는 눈앞에 들이닥친 손바닥을 보고 다급히 몸을 뒤로 눕혔다.
하지만 손바닥은 눈이 달린 듯 아래로 꺾어지더니 그의 가슴으로 처박혔다. 고수들과의 연이은 격전을 치르면서 진기운용이 훨씬 더 능숙해지자 천라신수의 변화가 더욱 신묘해진 것이다.
유광은 해쓱하니 질린 얼굴로 도를 휘두르며 뒤로 몸을 날렸다.
풍천의 잔영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비에 젖은 대지를 두들겼다.
“크윽!”
유광은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서너 바퀴 굴렀다.
그래도 절정에 이른 고수답게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는 상대의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그때 서늘한 느낌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유광은 빙글 몸을 돌리며 일수유의 순간에 십팔도를 휘둘렀다.
“죽어라, 이놈!”
전면 일 장 공간이 그의 도세에 갈기갈기 찢기고, 빗물과 부서진 갈대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풍천은 유광의 악에 바친 공세를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았다. 천풍무영류로 공세를 피해낸 그는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는 유광의 빈틈을 노렸다.
유광은 자신의 비장절기인 폭풍만류도를 펼치며 모든 감각을 집중해서 적의 위치를 찾았다.
분명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도 감각에 아무것도 걸리지 앉는다. 놈은 정말 유령이란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이 생긴 유광은 주춤거리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순간 한 줄기 섬전이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풍천의 검은 전보다 배는 빠르고 강했다. 그리고 냉정했다.
빈틈을 파고든 섬전은 유광이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어깨를 뚫어버렸다.
“크억!”
유광은 비명을 토해내면서도 도를 휘둘렀다.
풍천은 어깨에 꽂힌 검을 사선으로 끌어당기며 유광의 머리를 타넘었다.
유광이 발악처럼 휘두른 칼날이 허공을 가르고, 길게 갈라진 어깨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풍천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좌수로 유광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는 충격!
목뼈가 산산조각나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빈 유광은 입을 쩍 벌리며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풍천은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무너지는 유광을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풍천이 갈대숲 속에서 다시 십여 명을 처리했을 때, 초막이 있던 곳에서 어둠을 흔드는 외침이 들려왔다.
“조항!”
조항은 상관경의 일행 중 하나. 아무래도 한 팔을 쓰지 못하는 그가 신마성 무사들에게 당한 듯했다.
하지만 풍천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아직까지 갈대숲을 헤매고 있는 자들을 처리했다.
유광이 왔다면 운조평과 등청, 위태곤도 왔을 가능성이 크다. 얼굴을 조금 바꾸긴 했지만 그들이라면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
그럼 상관경의와 진호량도 알게 될 터. 자신의 계획이 어긋나게 된다. 그건 절대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하나만 살아라. 안내자는 하나만 있어도 되니까.’
풍천은 상관경의와 진호량의 생사를 하늘에 맡겼다.
반 각 후. 풍천은 갈대숲에 적이 더 이상 없다는 걸 알고 초막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예상했던 대로 운조평과 등청과 위태곤이 보였다.
상관경의 일행은 상관경의와 진호량, 그리고 우진이라는 자까지 세 사람이 살아남은 상태였다. 나머지 셋은 죽은 듯 미동도 없었다.
초막 앞 공터를 둘러싼 자는 삼십여 명.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제기랄, 포위되기 전에 갈대숲으로 뛰어들지.’
아마도 부상을 입은 사람들 때문에 탈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은 스스로를, 피로써 강호를 지키는 정의의 수호자라 여기고 있으니까. 자신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정의는 개뿔이나. 정의를 가장한 이기적인 자들이지.’
풍천이 바라보고 있는 사이, 위태곤을 상대하던 우진이라는 자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위태곤은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후후후후, 감히 우리 신마성을 건드린 죄다, 이놈들.”
풍천은 당장 뛰쳐나가서 초막 입구에 있는 썩은 쥐새끼를 위태곤의 웃는 입에 처박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위태곤. 썩은 쥐새끼든 똥 덩어리든, 반드시 네놈의 입에 처넣어줄 테니까.’
그 와중에도 상관경의와 진호량은 악전고투를 벌였다. 상관경의는 운조평과 등청을 상대했고, 진호량은 마혼신마대주 육종계와 두 명의 고수를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바보같이, 언제까지 그곳에서 싸우고 있을 거야?’
풍천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