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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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94화
94화
풍천은 강아지를 동포동에게 넘기고 해동산을 바라보았다.
“신마성 놈들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뭔가 몰라도 중대한 변화가 생긴 것 같네. 성내에 있던 놈들 대부분이 밖으로 몰려나갔네.”
‘수색을 시작한 모양이군.’
“듣기로는 와우산에서도 고수들이 출동할 거라 하더군. 그런데 말이야, 신마성에서 숨기고 있던 고수들을 풀었다는 소문이 있네. 그동안 은밀하게 소문으로 돌던 일이 사실인 모양이더군.”
‘호오, 제법인데?’
풍천은 해동산을 새삼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때 문득 해동산의 집에 갔을 때 떠오른 의문이 생각났다.
‘정말 그자들이 해동산의 동생을 죽였을까?’
확실치는 않았다. 납치범 때문에 그리 생각하는 것일 뿐이니까.
풍천은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말하지 않기로 했다.
해동산의 입장으로는 그들을 다 죽이지 못하는 게 한일 터, 목적이 어떻든 동생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살귀들을 자신이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귀찮은 일이 발생할지 몰랐다.
‘대신 해 형의 동생을 죽인 자들이 누군지 확실하게 알게 되면 내가 복수를 도와주겠수.’
그는 상관경의 등과 함께 움직이는 동안, 혹시 모르는 상황을 예방하고 장 노인에게 자신의 말도 전할 겸 해동산을 천풍장에 보내기로 했다.
“해 형, 하남 상구현의 금산에 있는 천풍장에 좀 다녀오쇼.”
“천풍장?”
“그곳에 가면 장씨 성을 쓰는, 얼굴이 조금 험상궂은 노인이 있습니다. 그 노인에게 내 말을 전해주쇼.”
“무슨 말을……?”
“하남에서 ‘하늘 밖’이라는 말과 관련된 곳을 찾아보라고 하쇼. 어떤 마을일 수도 있고, 단체일 수도 있으니 미리 선입견을 가지지는 말라고 하고.”
“천외(天外)라는 말과 관련된 곳?”
“그렇습니다.”
해동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상구까지 가려면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걸리겠군. 경비가 제법 들 것 같은데…….”
풍천은 해동산을 흘겨보며 품속에서 은자 다섯 냥을 꺼내 내밀었다.
“경비로 쓰쇼. 그리고 장 노인에게, 내가 직접 알리기 전까지 나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쇼. 나는 현재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해동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별다른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해결사들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일을 해야 할 때가 자주 있으니까.
“알겠네. 그렇게 전하지.”
그때 풍천이 깜박했다는 듯 해동산에게 한 가지 일을 더 부탁했다.
“아,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덩치가 산만한 젊은 친구가 등왕각 앞에 나타날 거요. 이름은 초웅인데, 제 동생이니까 함께 가도록 하쇼. 초웅에게는 제가 돌아갈 때까지 천풍장 잘 지키면서 열심히 수련하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지. 그런데 덩치가 크면 먹는 것도 많이 먹을 것 같은데, 경비가 모자라지나 않을지 모르겠군.”
풍천이 왜 그걸 모를까.
그는 다섯 냥을 더 꺼냈다. 초웅의 먹성을 생각한다 해도 헤프게 쓰지만 않는다면 그 정도로 충분했다.
‘정 모자라면 두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뭐.’
풍천은 해동산과 초웅의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동포동에게 육 인분의 음식을 싸달라고 했다.
동포동은 유지에 싼 음식을 내주면서, 일전에 풍천이 말한 ‘합마공과 어울리는 무공’에 대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무공, 나에게 주면 안 되나? 대가는 서운치 않게 주겠네.”
풍천은 빙긋 웃으며 걱정 말라는 투로 말했다.
“집에 있소. 나중에 남창으로 돌아올 해 형 편에 보내도록 하죠.”
동포동의 포동포동한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정말 있기는 있는 거지?”
“믿지 못하겠으면 마시고.”
“아, 아니네. 하하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지.”
동포동은 두툼한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볼살, 뱃살, 허벅지살까지 출렁였다.
‘저 몸으로 통통 튀어 다니면 볼만 하겠군.’
풍천은 사문에 있는 무공을 동포동이 익혔을 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그 마음 그대로 마주 웃어주고는 음식 보따리를 들고 주루를 나섰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8장. 안개비 내리는 밤, 갈대숲에 피바람은 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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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경의 일행은 풍천이 음식 보따리를 들고 돌아오자 반색했다. 심지어 풍천을 그토록 싫어하던 진호량조차 표정이 달라졌다.
두 시진에 걸친 운기조식으로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상관경의 일행은, 풍천이 가져온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풍천은 그들이 바로 남창을 떠나지 않자 조금 실망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우려되는 것은, 한곳에서 지체할 경우 신마성의 천라지망에 노출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몇 사람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는 어차피 멀리 벗어나지도 못할 터. 그들이 발견하지 못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그날 밤.
초막을 나온 풍천은 호숫가의 바위 위에 앉아서 턱을 괸 채 안개가 자욱한 포양호를 바라보았다.
빛 한 점 없는 칙칙한 밤안개는 항상 태평스럽던 풍천의 마음마저 무겁게 했다.
‘시간이 얼마나 더 걸려야 봉인이 다 풀릴까?’
유령총에서 처음으로 기억을 떠올린 후, 시간 날 때마다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여전히 기억은 단편적이었고, 그조차도 희미했다. 심지어 부모님의 이름조차 아직 기억해내지 못했다.
성과라면, 자신의 기억을 봉인시켰던 사람이 자신의 숙부고, 자신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숙부가 자신의 기억을 봉인시킨 후 길거리에 버렸다는 것도.
문득 툴툴거리며 웃음이 나왔다.
‘내가 버려진 아이였단 말이지?’
웃는데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
그분은 모든 걸 잊으라 했다. 자신의 처지에는 차라리 그게 나을 거라며.
자기를 원망하지 말라고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버려진 걸 생각하면 숙부라는 사람 말대로 그냥 잊고 사는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최소한 부모님의 얼굴만큼은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봐선 잘 사는 집안은 아닌 것 같았어.’
옷차림이 수수했다. 가난한 집안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부자도 아닌 듯싶었다.
무가(武家)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옷이 무복이 아니란 것은 분명했다.
운천.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의 이름을 한 자 더 기억해냈다, 하지만 성도 모르는 이름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조금 더 살아나면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반드시 알아볼 작정이었다.
자신이 왜 버려져야만 했는지. 숙부라는 분이 왜 모든 걸 잊고 사는 게 나을 거라고 했는지.
잊으라는 걸 보면 그리 좋은 추억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숙부의 말대로 기억해내지 못한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언젠가는 기억이 돌아오겠지. 아니, 반드시 기억해내고 말 거야!’
이를 악물고 각오를 다진 풍천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초령이를 찾는 일,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 벽라동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일, 그리고 신검문의 청부에 대한 걸 마무리하는 것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몸 하나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후우, 정신없이 바쁘게 생겼네, 젠장.’
품속의 돈주머니가 든든해진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 바쁜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부지런했다고 말이야. 돈은 부족해도 천풍장에서 유유자적 지내던 때가 좋았는데.
‘휴우, 역시 사람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돼. 죽을 때까지 일만 할 수는 없잖아?’
그때 뒤쪽으로 상관경의가 다가왔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그 말이 풍천에게는 ‘너 같은 사람에게도 고민이 있나 보군.’ 그런 말로 들렸다.
“나라고 고민이 없는 줄 아쇼?”
사실 상관경의도 풍천이 느낀 것처럼 생각한 면이 없지 않았다.
‘저런 버릇없는 말투를 쓰는 놈이 하는 고민이라면 뻔한 거겠지.’
그래도 겉으로는 담담히 말했다.
“뭔데 그런가? 한번 말해보게. 그래도 내가 자네보다 배는 산 거 같으니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혹시 백초령 때문에 그런가?”
풍천은 상관경의를 째려보며 툭 쏘듯이 말했다.
“내 고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신경 끄쇼.”
“젊은 친구가 꽉 막혔군. 고민이란 풀어놔야 가벼워지는 법이라네.”
‘나도 알아! 하지만 말하면 당장 죽이겠다고 달려들걸?’
한번 건드려봐?
풍천은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해서 꾹 참고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뭔가?”
“남창에는 왜 온 거요?”
풍천은 지나가듯이 묻긴 했지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상관경의를 살펴보았다.
상관경의의 눈빛이 찰나 간 떨렸다. 어둠으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풍천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풍천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계속 다그쳤다.
“신마성 때문에 온 거요? 아니면 위태곤을 죽이기 위해서?”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말게.”
“거참, 위태곤이 비록 신마성주의 둘째 제자라지만 귀하의 수하 한 사람도 당해내지 못하는 자인데 왜 그를 죽이려고 그런 거요? 그에게 혹시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수?”
“죽여야 할 자이기에 죽이려 한 것뿐이네.”
백초령도?
풍천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걸 참고 다시 물었다.
“신마성에 일도천살 유광처럼 알려지지 않은 자가 다수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수?”
상관경의의 눈에 곤혹감이 떠올랐다.
“그들이 나타난 것은 나도 의외였네.”
“그러한 자들이 더 있다면 당신들도 신마성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만리타향에서 다 죽기 전에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수?”
상관경의의 눈썹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다.
“신마성이 알려진 것보다 강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정도로는 우리의 뜻을 꺾을 수 없네. 자네도 곧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야.”
순간 풍천의 눈 깊은 곳에서 기광이 반짝였다.
곧 알게 된다?
그 말인 즉 ‘천외’라 불리는 곳이 곧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라는 뜻이 아닌가.
풍천은 조금 더 상관경의를 자극해보았다.
“천외라는 곳이 천하오패천보다 강한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천하에 그런 곳이 어디 있수? 기껏해야 구룡회 정도가 그럭저럭 그들과 비교될 수 있을 뿐인데. 에이, 사람 놀리지 마쇼.”
상관경의는 감정이 아무리 욱해도 경계를 넘지 않았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네. 자네도 나이가 더 들고 경험이 쌓이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아니 유령총에 대해선 내가 당신보다 더 많이 알지.’
풍천은 한 번 더 자극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처음부터 너무 심하게 나가면 역효과가 날지 몰랐다.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그는 짐짓 엄살을 부리며 엉덩이를 털었다.
“에구구, 바위 위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가 아파죽겠네. 졸리기도 하고. 하암, 나는 그만 자야겠수.”
그래도 졸린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관경의는 터벅터벅 걸어가는 풍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빛을 깊이 침잠시켰다.
‘정말 알 수가 없는 놈이야. 덜 떨어진 것처럼 보이면서도 빈틈이 보이지 않아. 어디서 저런 놈이 나타난 건지 도무지 모르겠군.’
이름이 잠풍이라 했다. 진짜 이름 같지는 않았다.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연결고리는 단 하나, 백초령뿐.
‘결국 백초령을 찾아야 저놈의 정체를 알 수 있단 말이군. 가만, 놈을 천으로 데려가 볼까?’
잠풍이 여타 특별한 단체에 속한 놈이 아니라면 ‘천’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천에 들어가면 저놈도 천방지축으로 행동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상관경의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