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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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92화
92화
변화의 시초는 상관경의였다.
그는 싸움이 길어지면 신마성의 무사들이 몰려들 거라 생각했다. 설령 그게 아니라 해도 동귀어진의 형태가 될 공산이 컸다. 그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상황을 변화시키는 수밖에!’
이를 지그시 악문 그는 최후의 순간을 위해 남겨두었던 힘마저 모조리 끌어냈다.
그가 전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린 순간, 그의 검첨에서 뻗친 검강이 더욱 강한 빛을 발하고, 그의 몸을 중심으로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운조평과 등청은 강한 압박감을 느끼고 동시에 손을 썼다.
콰르르릉!
천둥소리가 터져 나오며 대기가 일그러졌다.
세 사람의 기운이 정면으로 충돌한 직후, 상관경의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단순히 밀려서 날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가 날아간 곳은 단천무령과 신마비원의 고수들이 격돌하고 있는 곳이었다.
상관경의는 앞뒤 가리지 않고 상대를 향해 검을 뻗었다.
느닷없는 그의 공격에 비원의 고수 중 감청색 장포를 입은 두양종이 이를 악물고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오냐, 이놈! 어디 얼마나 강한지 보자!”
상관경의는 무심한 눈으로 두양종을 노려보며 검을 떨쳤다.
폭죽 같은 검광이 두양종을 향해 쏟아졌다.
콰과과광!
일검, 일검을 막을 때마다 두양종의 얼굴이 구겨진 철판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결국, 한 줄기 검강이 어깨를 훑고 지나가자, 눈을 부릅뜬 두양종은 억눌린 신음을 토하며 뒤로 튕겨졌다.
“크으으윽…….”
제법 깊게 갈라진 듯 피 분수가 선연하게 솟구쳤다.
상관경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비원의 고수, 귀혼창(鬼魂槍) 여동사를 공격했다. 여동사는 악을 쓰며 창을 휘둘러 상관경의의 검을 막았다.
떠더더덩!
커다란 종을 쇠망치로 두들기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그때, 등청이 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교활한 놈! 네놈이 아무리 그래도 오늘 우리 손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여동사를 멀찌감치 튕겨낸 상관경의는 대기를 갈기갈기 찢으며 날아드는 도광 사이로 검을 밀어 넣었다.
쩌러렁!
당장 상관경의를 수백 조각 낼 것처럼 달려들던 등청은 눈을 부릅뜨고 뒤로 밀려났다.
‘정말 더럽게 강하군!’
그 사이 운조평이 상관경의를 공격했다.
우르르릉.
나직한 벽력음과 함께 바위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흑운장이 상관경의를 덮쳤다.
상관경의는 검을 열십자로 휘둘러서 운조평의 장세를 차단하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운조평도 가공할 검세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어디 이것도 받아봐라!”
등청이 다시 상관경의를 향해 쇄도했다. 운조평도 목구멍까지 차오른 핏덩이를 삼키고 다시 흑운장을 펼쳤다.
상관경의는 또다시 두 사람의 합공에 휘말려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전황이 거꾸로 돌아갔다.
풍천이 열을 세기도 전에 두양종의 가슴이 갈라졌다. 그리고 다시 열을 셀 때쯤, 여동사가 한 팔을 잃고 비칠거리며 정신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단천무령 역시 두 사람이 적잖은 부상을 입었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배어 나온 핏물이 그들의 다리를 타고 흘렀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붉은 족인이 찍혔다.
위태곤은 상황이 갑작스럽게 불리해지자 질린 표정으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일단 물러나도록 합시다!”
상관경의가 한 번 더 날뛰면 누구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목숨이 우선이었다.
운조평과 등청, 유광은 위태곤이 뒤로 빠지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잖아도 유리할 것이 없는 마당에 한 사람이 빠지면 필패의 상황인 것이다.
두 번째 후퇴. 자존심이 상한 운조평은 이를 으드득 갈며 상관경의에게 쏘아붙였다.
“흥! 기고만장하지 마라. 너희들은 절대 남창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상관경의는 그들을 쫓지 않고, 검을 사선으로 들고서 우뚝 선 채 오연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온전한 단천무령은 진호량을 비롯해서 단 셋뿐.
‘여기서 단천무령을 더 희생시키면 강서를 빠져나가는 게 그만큼 힘들어진다.’
지금은 적을 추격해서 죽이는 것보다 강서를 빠져나가는 걸 걱정해야 할 때였다.
휘이이잉!
싸움이 끝난 걸 하늘도 알았는지 거센 돌풍이 계곡 안을 휩쓸었다.
흙먼지가 솟구치고 장포가 펄럭였다.
신마성의 고수들이 언덕을 넘어 사라진 직후, 꽉 다문 상관경의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형님!”
진호량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상관경의가 핏물이 박힌 이를 드러내며 나직이 말했다.
“소리치지 마라. 놈들이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고는 부상을 입은 단천무령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몸을 추슬러라.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떠나야 하니까.”
‘둘이 합공하고도 저자를 묶어두지 못하다니. 처음부터 번갈아 손을 쓸 게 아니라 함께 손을 썼으면 이겼을지도 모르는데. 하여간 바보 같기는…….’
풍천은 운조평과 등청을 졸지에 바보로 만들고 상관경의의 등을 바라보았다.
살귀 여섯이 남았다. 둘은 중상이고, 넷은 경상이다. 저들 중 자신이 유령총에서 만났던 자는 없는 것 같다. 정체가 탄로 날 일은 없다는 말.
칠까?
다른 사람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혼자서 운조평과 등청을 상대한 자, 그가 걸릴 뿐.
하지만 유령총에서 죽어간 구자암과 궁이정이 떠오르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구자암에게 복수를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새벽에 죽인 세 사람이 본전이라면 이제 이자를 받아야 했다.
바위 뒤에서 몸을 일으킨 풍천은 언덕을 내려갔다.
상관경의는 언덕 위에서 내려오는 풍천을 보며 눈을 좁혔다. 그는 풍천이 얼굴을 가렸던 면사를 떼어냈는데도, 지난 새벽 장원의 지붕 위에서 마주친 자란 걸 알아보았다.
‘골치 아픈 놈을 만났군.’
그는 풍천이 십여 장 거리까지 다가온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신마성의 무사는 아닌 것 같던데, 무슨 일로 우리의 뒤를 쫓는 거지?”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리고 빚도 받아야 하고.”
풍천은 계속 걸음을 옮기며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먼저 질문부터 했다.
“등왕각에서 백초령을 납치해간 자가 누구요? 귀하라면 알 것도 같은데.”
뜻밖의 질문에 상관경의의 눈빛이 싸늘하게 반짝였다.
“왜 그걸 궁금해하지?”
“난 궁금한 것은 못 참거든요.”
“알려줄 수 없다면?”
“그럼 닦달해서라도 말하게 만드는 수밖에요.”
단천무령 중 한 사람이 풍천의 도발을 참지 못하고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건방진 놈이 감히 어디서 헛소리냐!”
그는 풍천이 상관경의와 지붕에서 싸웠던 사람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하기에 삼류 건달 같은 풍천의 목이라도 쳐서 동료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풀 생각이었다.
하지만 풍천은 삼류 건달도 아니었고, 자신의 목을 순순히 바칠 정도로 마음씨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풍천은 그자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공세 속으로 뛰어들었다.
“조심해라!”
상관경의가 악을 쓰며 경고했다.
그는 풍천이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내상을 입지 않았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라는 것도.
그래도 단천무령이 몇 초 정도는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경고만 한 채 그냥 놔두었다.
그러나 풍천은 상대의 도발을 유도할 때부터 손에 사정을 두지 않기로 작정한 터였다.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숫자를 먼저 줄일 생각이었다. 하나가 줄면 그만큼 편해질 테니까.
뻗어오는 검의 검면을 슬쩍 밀쳐서 머리카락 하나 차이로 상대의 공세를 흘려보낸 풍천은 상대의 가슴으로 뛰어들며 좌수를 뻗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망설임 없는 일수. 거기에 강력한 위력마저 실려 있다.
풍천을 얕보고 있던 단천무령이 대경해서 피하려 했을 때는, 이미 천라신수가 석 자 거리를 격한 채 그의 가슴을 두들긴 후였다.
쾅!
“크억!”
단천무령은 이 장을 날아간 후 바닥을 뒹굴었다. 단천무령이 설마 단 일수에 당할 줄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상관경의의 두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때 분노한 진호량이 먼저 풍천을 향해서 몸을 날리며 노성을 터트렸다.
“이놈!”
상관경의가 다급히 소리치며 말렸다.
“물러서라, 호량!”
하지만 진호량의 검에서 뻗어 나온 채찍 같은 검기는 이미 풍천의 몸을 두 쪽 낼 것처럼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풍천은 그의 검이 머리 위로 떨어진 순간, 귀환신법을 펼쳐서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진호량은 자신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는 걸 깨닫고는, 바닥에 내려선 즉시 몸을 틀었다.
상대는 보이지도 않고, 뒤쪽 일 장 높이 허공에서 검기 다발이 쏟아지고 있었다.
진호량은 피할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정신없이 검을 내질렀다.
쩌저저정!
잘게 쪼개진 검광이 비산하며 귀청을 찢는 굉음이 울렸다.
풍천은 진호량이 팔대신마나 유광에게 뒤지지 않는 고수라는 걸 알고 있기에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찰나 간에 열 번의 검을 내지른 그는 귀신도 곡할 천풍무영류로 방향을 틀고는 진호량의 목을 향해 검을 뻗었다.
진호량은 섬뜩한 느낌에 다급히 몸을 틀었다.
그러나 풍천의 검은 눈이라도 달린 듯 진호량을 따라가며 거리를 주지 않았다.
그때 예리한 검기가 풍천의 우측으로 파고들었다. 상관경의가 더 두고 보지 못하고 공격한 것이다.
한 놈 죽이자고 부상을 입을 수는 없는 일. 풍천은 흐르는 바람처럼 미끄러지며 상관경의의 공세를 피했다.
찌이익.
풍천의 검에서 뻗친 검기가 스치면서 진호량의 어깨 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섬뜩한 느낌에 다급히 몸을 튼 진호량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어깨가 시렸다. 뜨거운 핏물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어깨가 아니라 목이 뚫렸을 것이다.
모골이 송연해진 진호량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 사이 풍천은 상관경의의 공격을 피하고 이 장을 날아가 내려섰다.
상관경의는 흩어진 내력을 최대한 모으고, 한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풍천을 노려보았다.
“젊은 놈이 대단하구나. 천하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남자답게 떳떳이 정체를 밝혀라.”
남은 사람은 셋.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숫자다.
주도권을 자신이 쥐었다 생각한 풍천은 여유만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알아서 뭐하게요? 그냥, 남창에 갔더니 멋진 청년이 하나 있더라, 그렇게 생각하고 마쇼.”
상관경의와 진호량 등은 이를 갈면서도 풍천의 황당한 대답에 바로 대꾸하지를 못했다.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풍천처럼 대답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정말 알 수가 없는 놈이군.’
‘뭐 저런 놈이 있지?’
하지만 풍천은 그들의 반응에 눈썹 한 올 움직이지도 않고, 조금 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재촉했다.
“그보다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하시죠. 백초령을 납치해간 자는 누구죠? 당신들하고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상관경의는 분노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신마성의 고수들이 언제 몰려올지 모르는 상황. 눈앞에 있는 이상한 놈까지 적으로 만들면 강서를 빠져나가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넌지시 풍천을 떠보았다.
“알려주면 어떤 대가를 내놓을 것이냐?”
풍천은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 곧바로 대답했다.
“그가 누구고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면, 당신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죠.”
어차피 신마성과 싸워야 할 입장인 풍천으로선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이들과 함께 신마성을 상대한다면 혼자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꿩 먹고, 알 먹고.
‘거래란 이렇게 하는 거지.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