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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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91화
91화
한참을 망설이던 동포동은 결국 눈을 비비며 기어 나왔다. 잠풍인지 개풍인지 모를 저놈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새벽부터 무슨 일인가?”
“새벽에 배를 타고 남창을 떠난 젊은 남녀가 있는지 알아봐주쇼.”
풍천은 동포동이 당연히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 생각한 듯 두 사람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알려주었다.
하지만 동포동은 지금까지 새벽에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꼴 보기 싫은 놈의 부탁은 더더욱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이 꼭두새벽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직접 선창가로 가보는 게…….”
슬며시 말꼬리를 흐린 그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풍천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도 새벽에 일을 시키는 놈을 아주 싫어했으니까.
더구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시킨 일이라면 때려죽여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을 더 자지.
그래서 그는 동포동을 더 다그치지 않고, 대신 가게를 다 때려 부수기로 했다.
“지미, 언제는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하더니…….”
퍽! 와장창!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휘익, 와직!
탁자 두 개가 벽에 부딪치며 박살나자 동포동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겼다.
“자, 잠깐만 기다리게! 한두 시진이면 내 동생들이 남창의 선창가를 다 뒤질 수 있을 거네!”
풍천은 들었던 탁자를 내려놓고 씩 웃었다.
“역시 덩치만큼이나 마음도 넓으시군요. 기왕이면 먹을 것도 좀 주쇼. 밤새 굶고 일을 했더니…….”
동포동은 손바닥처럼 두꺼운 입술을 씰룩이며 몸을 돌렸다.
‘해가 자식, 어디서 저런 미친 새끼를 데려와 가지고…… 씨발, 저 새끼가 남창에 말뚝 박고 남으면 내가 남창을 떠나야지.’
점소이를 부른 그는 풍천이 한 말을 재탕했다.
그리고 점소이가 주루보전의 사명을 띠고 밖으로 뛰어나가자, 전날 팔고 남은 음식 찌꺼기라도 챙기기 위해서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풍천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넌지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본문의 신법 중 합마공을 수련한 사람에게 알맞은 것이 하나 있는 것 같던데, 나에게는 필요 없으니 동 형이나 줄까? 흠, 일단 식사하고 나서 생각해봐야겠군.”
순간, 동포동의 커다란 덩치가 미미하게 출렁였다.
얻어맞는 건 자신 있었다. 하지만 그뿐, 몸이 워낙 둔해져서 상대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그 바람에 고수를 상대하는 건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자신에게 알맞은 신법이 있다고?
사실일까?
주루를 때려 부순다더니 정말 부수려 했던 놈이다. 성질은 지랄 맞지만 한번 자신이 뱉은 말은 지키는 놈. 사실일 가능성이 반은 될 것 같았다.
‘까짓 거, 밑지는 셈치고 인심 한번 쓰지 뭐.’
그렇게 생각한 동포동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오랜만에 요리솜씨를 발휘했다.
풍천은 동포동의 요리솜씨에 진정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동포동과 해동산은 풍천의 엄청난 식성을 보고 속으로나마 경이에 찬 찬사를 보냈다.
‘돼지도 저 정도는 못 먹을 거야!’
‘굉장해! 열흘 굶은 아귀가 뱃속에 열 마리쯤 들어 있는 것 같군!’
풍천은 배를 두드리며 이 자리에 초웅이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초웅이 있었으면 자신이 반도 못 먹었을 텐데.
“쩝, 정말 오랜만에 원 없이 먹어봤수. 요리 솜씨가 대단한데요? 제가 원래 뭘 많이 못 먹는데 말이죠. 하, 하, 하.”
기분 좋게 웃는 풍천의 입가에서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점소이가 주루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풍천이 배부른 강아지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주루를 나간 지 정확하게 한 시진 이 각 만이었다.
“공자! 그런 사람을 봤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풍천은 절대 졸지 않은 사람처럼 눈을 번쩍 뜨고 질문을 퍼부었다.
“그래? 언제 배를 탄 거야? 어디로 갔지?”
“동이 틀 무렵에 어떤 놈팽이와 계집년이 나타나서 하가 노인을 닦달…….”
순간, 풍천이 쑥 손을 뻗어 점소이의 멱살을 확 잡아당겼다.
달달달달.
점소이는 멱살이 잡힌 채 몸을 떨었다. 코앞에 풍천의 얼굴이 보였는데, 입가에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것이 꼭 자신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풍천은 점소이를 물어뜯지 않고 단어 하나만 교정시켜주었다.
“아, 가, 씨. 좀 더 고상한 말로는 아름다운 아가씨. 놈팽이는 좀 더 심한 말을 써도 상관없고.”
점소이는 눈치 빠르게 자신의 말을 바로 교정했다.
“노, 노, 놈팽이와 아름다운 아가씨가 하가 노인을 닦달해서 포양호로 나갔다고…… 살려줍쇼, 흑흑흑.”
풍천은 점소이를 놓아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왜 이래? 나처럼 순박한 사람을 보고 왜 울어?”
해동산이 입을 닦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기름기라도 닦게. 내가 봐도 좀 그렇군.”
풍천은 탁자 위에 있는 엽차를 손바닥에 부어서 대충 기름기를 닦아내고, 남은 것은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기분이 찝찝해서 입술이 더러운 것쯤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젠장, 꼭 안 좋은 일은 예상이 잘 맞는다니까.’
포양호로 나갔다면 추적하기는 틀렸다. 남창을 떠나기로 작정한 이상 그들은 가까운 곳에 내리지 않을 터. 그럼 하가 노인도 바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결국 내린 곳을 알려면 하가 노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
풍천은 하 노인이 올 때까지 놈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살귀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들이 모두 자결을 택할 정도로 독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신마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럼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단 말인데…….’
6
풍천은 해동산에게 남창 성내의 신마성 무사들 움직임을 살펴보라고 했다. 그리고 동포동에게는 하가 노인이 돌아오면 그들을 어디에다 내려줬는지 정확히 알아보라고 했다.
두 사람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한 그는 주루를 나와 상관경의 일행이 머물던 작은 장원으로 다시 갔다.
장원 안으로 들어가자, 먹을 것을 찾아서 돌아다니던 강아지 한 마리만이 꼬리를 흔들며 그를 반겼다. 장원의 주인은 신마성이 닦달할 것이 두려워서 몸을 피한 듯했다.
풍천은 배고픔을 호소하는 강아지의 눈망울을 보고 차마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주방을 찾아서 대충 음식 찌꺼기를 모은 다음 강아지 앞에 던져주고 장원을 나섰다.
‘나중에 다시 올 때까지 주인이 안 나타나면 돼지네 집에 데려다줘야지.’
장원을 나선 풍천은 상관경의 일행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비록 신마성 무사들이 뒤를 쫓는 바람에 흔적이 뒤섞였지만, 그의 불가사의한 감각은 상관경의 일행의 흔적을 정확히 찾아냈다.
그렇게 흔적을 쫓아간 지 일 각. 땅을 바라보던 풍천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제 추적하는 신마성의 무사들 중 평무사들의 흔적은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남은 것은 희미한 발자국 십여 개뿐. 그런데 동일인의 발자국이 칠팔 장 간격으로 나 있는 걸 보니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만이 추적하고 있는 듯했다.
풍천은 그들이 청의인들과 싸웠던 신마성의 고수들일 거라 생각하고 냉소를 지었다.
‘어디 실컷 싸워봐라. 나는 재미있게 구경해줄 테니까.’
그들의 죽음은 자신과 하등 상관이 없었다. 살귀들 중 하나만 살아주면 되었다. 납치범의 정체를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는 한 놈만.
풍천은 희미한 발자국이 이어져 있는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발자국은 남창을 벗어나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7장. 거래(去來), 꿩 먹고 알 먹고
1
상관경의 일행은 장원에서 삼십 리를 벗어났지만 결국 신마성에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상관경의는 도주를 포기하고 적당한 곳에서 추적자들을 처리하기로 작정했다.
사실 그들이 따라잡힌 것은, 신마성이 끈질기게 추적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추적자들을 떨쳐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이 그들에게 없었다는 게 더 옳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쫓는 일만 해왔지 쫓기는 입장은 되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나타난 자들을 바라본 상관경의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숫자는 많지 않았는데,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자들이 추적해온 것이다.
일도천살 유광과 그의 일행 넷. 흑운신마 운조평과 탈혼신마 등청, 그리고 위태곤과 장로급 고수 셋까지. 숫자는 모두 열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고수라 불릴 수 있는 자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정말 의외군.’
상관경의는 한 번도 신마성을 대단하다 여긴 적이 없었다.
유령총에 있는 자들을 칠 때도 그랬고, 남창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마성에서 자신의 적은 오직 둘, 남천신마 혁련궁과 건곤신마 섭위릉뿐이라 여겼다.
그러나 신마성은 그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강했다. 일부 몇 명만으로 자신들에게 위협을 줄 정도라니.
그는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놀라운 일이오. 신마성이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미처 몰랐소.”
운조평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강한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오늘은 그때와 상황이 다를 거다.”
유광도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나는 그대들이 더 놀랍다. 천하에 그대들처럼 강한 자들을 휘하에 둔 세력이 어딘지 정말 궁금하군.”
상관경의는 천천히 검을 빼들며 왠지 모르게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곧 알게 될지도 모르겠소. 오늘 그대들을 만남으로써 하늘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까.”
“무슨 뜻이지?”
“그것 역시 얼마 후면 저절로 알게 될 거요.”
상관경의는 여전히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하늘보다 더 파란 기운이 그의 검첨에서 쭉 뻗어 나왔다.
순간, 등청이 탈혼도를 앞세우고 상관경의를 향해 달려들었다.
“개소리 말고 이거나 받아봐라! 유령총에서의 빚을 갚아주마!”
상관경의는 달려드는 등청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휘황한 청색 검강이 죽 뻗어 나가며 등청의 도세를 뚫었다.
쩌정!
맑은 격돌음이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렸다.
뒤로 서너 걸음 주르륵 밀려난 등청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비록 단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상대의 강함을 깨닫기에 충분한 충격이 그의 기운을 뒤흔든 것이다.
“들었던 것보다 더 강하구나. 하지만 아무리 네놈이 강하다 해도 오늘은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유광이 냉랭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놈들을 공격하게!”
묵묵히 서 있던 신마비원의 고수 넷이 청의인들을 향해서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리고 뒤이어서 위태곤과 장로들도 공격에 가세했다.
진호량을 비롯한 단천무령은 비장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풍천은 저 멀리 언덕 너머에서 강력한 기운이 폭죽처럼 솟구치는 걸 느끼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언덕 위에 올라간 그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다.
대접처럼 완만하게 경사진 계곡 안쪽에서 시퍼런 검광 도광이 난무했다.
생사를 건 치열한 격전!
절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의 격전은 무사 수백 명이 뒤엉켜서 싸우는 것보다 더 치열하고 삼엄했다.
콰르르릉! 쩌저적!
끊임없이 울리는 천둥소리,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벼락 줄기가 허공을 터트리고 대지를 뒤엎는다.
신음도, 비명도 없다. 핏발 선 눈에선 오직 상대를 죽이겠다는 각오만이 넘실거린다.
풍천은 그 와중에 운조평과 등청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인간들도 기어 나왔군.’
팔대신마에 속하는 두 사람이 자존심도 팽개치고 청삼 중년인을 합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청삼 중년인이 미세하게 밀리긴 해도 표가 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 다 죽고 살귀 중 한 놈만 살아남아라.’
풍천으로선 급할 것이 없었다.
막상막하의 접전.
어느덧 바닥에 쓰러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가 일곱이나 되었다. 그 중 살귀가 셋, 신마성의 고수가 넷이었다.
이대로 가면 어느 쪽이 이긴다 해도 엄청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을 터, 자신은 상황이 종료될 즈음 나서서 정리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상황이 돌변한 것은 풍천이 도착한 지 반의반 각쯤 지났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