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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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24화
124화
제10장. 붉은 손바닥
1
하늘에는 으스스할 정도로 밝은 보름달이 떠 있고 숲에서는 찌르레기 울음소리가 유난히 극성을 떨어대는 밤.
장 노인과 해동산은 어둠이 깔린 장원을 바라보았다.
오십여 장 앞에 노산대호(魯山大豪) 호은명이 기거하는 호가장(胡家莊)이 달빛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었다.
뎅, 뎅, 뎅…….
두 사람이 장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서 자시를 알리는 산사의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가 멎을 즈음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보름달이 혀를 차며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해동산은 슬쩍 고개를 돌려서 장 노인에게 물었다.
“정말 호 대협이 그곳에 대해서 알 거라 보십니까?”
장 노인은 주름인지 상처인지 모를 만큼 굴곡이 심한 이마를 찌푸리며 해동산을 째려보았다.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냐?”
“제가 어찌 감히…….”
“그럼 잔말 말고 이 어르신만 따라와라. 비록 이십여 년 전 일이지만, 헛소리한 것이 아니라면 그 친구는 분명히 그곳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분이 뭐라고 했는데요?”
“나더러 그러더군, 하늘 밖을 아냐고. 조심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당할지 모르니 살수직을 그만두라고.”
솔직히 말하면 깝죽대다 개죽음 당하지 말고 은퇴해서 마음 편히 살라고 했다. 하나 남은 고향 친구가 죽는 걸 원치 않는다면서.
그는 자존심이 상해서 코웃음 쳤다. 친구만 아니었다면 멱살을 잡고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려줬을 것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진 못하고 호탕하게 소리치며 그의 부탁 아닌 부탁을 거부했다.
“하늘 밖이든 안이든 다 오라고 그래! 내가 다 죽여줄 테니까!”
그가 그렇게 소리치자 친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는 그곳을 무척 두려워했지.’
호은명은 간이 작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간이 작았다면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하늘 밖’이라는 말을 할 때만큼은 그의 눈빛에 두려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딘지 몰라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알아봐야겠어.’
장 노인은 각오를 다지며 장원을 노려보았다.
곰처럼 생긴 놈에게 천풍장을 맡기고 온 터였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천풍장의 식량이 거덜 날 테니까.
그런데 호가장을 보면 볼수록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찜찜했다.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꼭 풍천이 저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쳐다만 보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장 노인은 안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하고 걸음을 옮겼다.
“일단 그 친구를 만나보자.”
해동산은 힐끔 장 노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는 장 노인의 말을 거역할 생각이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었다.
처음 장 노인을 만난 그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복날의 개보다 딱 세 배 더 두려움에 떨며 고생했다.
그리고 장 노인의 정체를 안 후에는 꿈에서라도 이를 갈까 봐 조심, 또 조심했다. 죽어서 정문에 거꾸로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씨발, 살수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흑야살이 장원이나 지키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런데 잠풍은 어떻게 장 노인을 총관으로 고용하고 있는 걸까?
장 노인은 오랜 시절의 약조 때문에, 그리고 노년을 힘들게 보내기 싫어서 천풍장에 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거라면 왜 잠풍의 이름을 듣고 말할 때마다 이를 간단 말인가?
‘잠풍? 그 자식, 또 어디서 사기 치고 다니는가 보군.’ 그러면서.
좌우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지미, 여차 하면 튀어야지. 잘못하면 복수도 못 하고 저 늙은이에게 시달리다가 죽을지 몰라.’
해동산은 장 노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장 노인이 스윽 고개를 돌리더니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다그쳤다.
“뭐해? 빨리 안 따라올 거야? 꼭 누구처럼 게으르기는…….”
해동산은 재빨리 주먹의 힘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장 노인과 해동산은 호가장의 담을 넘어 호은명의 거처인 은호전으로 갔다.
사실 낮에 찾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호의 비밀을 요하는 은밀한 이야기는 낮보다 밤이 나았고 두 사람은 직업상 밤이 더 편했다.
옷자락 날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은호전의 방문으로 다가간 장 노인은 전문가답게 경첩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방문을 열었다.
빛 한 점 없이 어두운 방 안에서는 날벌레 날아다니는 소리만 들렸다.
장 노인과 해동산은 물이 솜에 스며들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문을 닫고 돌아서려던 장 노인이 코를 찡긋거리며 이마를 좁혔다.
‘응?’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피 냄새?’
그때 보름달이 다시 구름 밖으로 나오고 희미한 달빛이 창문을 통해서 스며들자 방 안의 윤곽이 대충 드러났다.
순간 주위를 둘러보던 장 노인과 해동산은 얼어붙은 듯 몸이 굳었다.
침상 위에 칠순가량의 노인이 누워 있는데 침상 밑에 시커먼 물기가 흥건했다.
하지만 그것은 물기가 아니라 선혈이었다.
장 노인은 주름진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침상에 누워 있는 옛 친구를 바라보았다.
“어, 어떤 개만도 못한 놈이…….”
“어떻게 된 거죠?”
장 노인은 해동산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침상을 향해 다가갔다.
핏물이 발바닥을 적셨다. 고인 지 시간이 제법 되는 듯 핏물은 제법 끈끈하게 장 노인의 발길을 붙잡았다.
침상 앞에서 걸음을 멈춘 장 노인은 홑이불 바깥으로 늘어진 호은명의 손을 잡아 가슴에 얹어주었다.
그리고 부릅뜬 눈을 감겨준 후 쭈글쭈글한 입술을 잘게 떨었다.
“이십 년 만에 찾아왔는데 이야기 한마디 못 나누고 떠나보내는구먼.”
호은명은 그곳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들과 싸울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이 그곳을 알기 위해 찾아온 날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적인 운명일까?
‘누구든, 자네를 죽인 놈은 내 손으로 직접 목을 따버리겠네.’
해동산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석상처럼 굳어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으시네. 진짜로 절친하게 지내셨나 보군.’
그사이 장 노인은 호은명의 사인을 살펴보았다.
피는 반쯤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온 듯했다. 입술에 검붉은 피가 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피가 입에서 흘러나오려면 심장이 부서지고 피가 역류했을 때나 가능했다.
호은명의 몸을 세세히 살피던 그의 눈에서 새파란 살광이 번뜩였다.
예상대로 심장 부위의 갈비뼈가 박살 나고 심장이 파괴되어 있었다.
‘단 일장에 절정고수의 심장을 부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더구나 이 친구가 죽은 걸로 봐서 급습을 당한 것 같다. 즉 잘 아는 사람이 손을 썼다는 것.’
그는 호은명과 가까운 사람 중 장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생각해보면서 옷자락을 들춰보았다.
심장이 있는 곳에 시커먼 장인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등잔을 이리 줘라. 그리고 이불로 저쪽 창문을 막아.”
장 노인의 말에 해동산은 탁자 위의 등잔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불을 펴서 창문을 막았다.
장 노인은 등잔의 심지를 작게 한 다음 삼매진화로 불을 붙이고 장인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손의 넓이, 손가락 하나하나의 길이, 그리고 모양까지.
어둠 속에서 본 장인은 시커멨지만 불을 켜고 보자 검붉은 빛이었다.
‘처음에는 시뻘건 핏빛이었겠군. 죽은 피 때문에 더 검어졌어.’
모든 것을 살펴본 그는 불을 끄고 옷을 여며주며 중얼거렸다.
“안타까워 말게. 내가 반드시 잡아서 죽일 테니까.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해동산은 그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싸한 느낌에 전신이 오들오들 떨렸다. 장 노인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런 느낌이 들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았다. 삼 년 전 청부를 맡았다가 함정에 빠졌을 때도 이런 느낌이 들었었고, 가장 최근에만 해도 쌍둥이 동생이 죽기 직전에 이런 느낌이 들었었다.
“저기, 장 어르신.”
장 노인이 홱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파란 살광이 번들거렸다.
해동산은 입이 얼어붙어서 더 이상 말문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장 노인도 해동산 때문에 살기를 뿜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초여름 밤을 바짝 긴장시키는 기운이 장원을 향해 밀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호은명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해동산에게 나직이 말했다.
“따라와라.”
그러고는 창문을 밀치고 허깨비처럼 몸을 날렸다.
해동산은 정확히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면서도 무작정 장 노인을 따라 방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몇 사람이 은호전 앞마당에 내려섰다. 그리고 곧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 대협, 밤늦은 시간에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방에 계십니까?”
방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고 오히려 다른 건물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뉘신데 장주님을 깨우시는 겁니까?”
앞마당에 내려선 사람 중 오십 대 중반의 초로인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천의맹의 종자서라 하오. 호 대협을 뵈려고 왔는데 대답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소이다.”
다른 건물에서 나온 사람 중 사십 대 중년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 천의맹의 종 장로님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중년인은 등불을 들고서 은호전으로 갔다.
그는 두어 번 호은명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장주님!”
종자서와 천의맹의 사람들은 그 고함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했다.
그들 중 두어 명이 날듯이 뛰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 대협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로님!”
“창문이 열려 있다! 빠져나간 놈들이 있는지 주위를 살펴봐라!”
천의맹 무사 중 세 명이 지붕 위로 올라갔다.
곧 그들 중 하나가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기 도주하는 놈이 있다! 쫓아라!”
2
뜨겁게 달궈진 태양, 이글이글 타오르는 대지.
풍천은 죽립을 하나 구해 쓰고 웅이산 쪽으로 향했다.
삼산은 석인산과 천보산과 노군산을 말하는 것이고, 불귀곡은 그 사이의 직경 백 리나 되는 방대한 지역 안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천 년 동안 불귀곡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사람이 없어서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게으른 풍천으로서는 그 말만 듣고도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왜 범의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밀어 넣어야 하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 안에 백초령이 있는 이상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곳에 천외천이 있고, 천외천이 천상신문이라는 걸 안 이상 무조건 찾아가야 했다.
‘사냥꾼들에게 물어보면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야.’
찾기만 하면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에게는 상관경의가 남긴 영패가 있으니까. 진호량이 남긴 것도 있고.
정작 큰 문제는 안에 들어간 후였다.
‘천응단 놈들이 보고를 올렸다면 보자마자 죽이려고 환장할 텐데.’
물론 안에서는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할 수도 있었다. 상관경의를 공격한 것이 대공이란 자의 개인적인 결정이라면 드러내놓고 죽이려 하지는 못할 테니까.
사실 그걸 믿고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이긴 한데, 그래도 등 뒤에서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칼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씨발, 건드리기만 해봐라. 한바탕 난리를 피워서 뒤집어엎을 테니까.’
남소현(南召縣)에 도착한 풍천은 객잔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이틀 동안 먹을 건포를 샀다. 그리고 객잔을 나와서 웅이산으로 가기 위해 동쪽으로 뻗은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그가 남소의 외곽지역을 지나갈 때였다. 뒤쪽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가벼운 발걸음, 정심한 기운이 바람과 함께 밀려든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이십 장의 거리.
주위를 구경하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풍천의 눈에 다가오는 자들이 보였다.
남자가 넷, 여자가 하나였다. 그들은 각기 다른 도복을 입은 도인 둘, 승려 하나, 속인이 둘이었는데 무기를 빼 든 채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천의맹 사람들이잖아? 무슨 일이지?’
그때였다. 다섯 사람 중 앞서 달려오던 속인 하나가 풍천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잠깐 멈추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