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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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18화
118화
2
천응단의 부단주인 조양경은 객잔의 이층 객방에서 창문 틈으로 대로를 내려다보았다.
나종화가 관추양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나종화의 뒤에는 열한 명의 무사가 서 있고, 관추양의 뒤에는 중년인과 청년이 서 있었다.
칼날 같은 광채가 번뜩이는 눈으로 관추양의 뒤를 바라보던 조양경은 느릿하니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만사 귀찮은 표정으로 서 있는 젊은 놈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주시하는 사람은 젊은 놈과 나란히 서 있는 중년인이었다.
‘령주, 운명은 우리를 이렇게 만나게 하는구려.’
그는 한때 상관경의의 수하였다. 그는 상관경의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난날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송곳니가 빠지고 발톱이 빠진 호랑이일 뿐이었다.
‘당신은 내 뺨에 검흔을 남겼지만 나는 당신의 심장에 검흔을 남길 것이오. 기대해도 좋소.’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상관경의를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그것은 송곳니가 빠졌든 발톱이 빠졌든 그가 호랑이임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이를 지그시 악문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신의 뒤에 시립해 있는 수하에게 말했다.
“일단은 구화장이 처리하는 걸 지켜보면서 저들의 상태를 확인해봐야겠어. 모두에게 명이 떨어질 때까지 거리를 두고 움직이지 말라고 해라.”
뒤에 서 있던 허름한 갈색 무복의 무사가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그때 구화장의 무사가 몸을 날리는 게 보였다.
3
풍천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천천히 검을 뽑았다.
너무 느려서 상대의 검이 심장에 박힐 때까지 다 뽑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상관경의의 눈빛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풍천의 검이 느리게 보이는 것은 너무 빠르다 보니 잔상이 남은 것일 뿐이었다.
‘어, 언제 저렇게 늘었지?’
풍천을 공격하던 자는 비웃음을 띤 채 풍천의 가슴을 향해서 검을 내질렀다.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의 눈앞에 뾰족한 검이 보였다.
분명 상대의 검은 아직도 검집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것 같거늘!
‘헉!’
기겁한 그는 다급히 머리를 틀었다.
덕분에 다행히도 검이 이마에 꽂히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풍천의 검은 그의 이마를 뚫지 못하는 대신 목에 자그마한 상처를 남겼다.
털썩.
풍천을 공격하던 무사가 제풀에 쓰러진 것처럼 풍천의 옆을 스쳐 지나가서 바닥에 쓰러지자 분위기가 묘하게 흘렀다.
“쓸 만하군.”
풍천은 상관경의에게 배운 비월신검을 실전에서 처음으로 써보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
동료가 어이없이 쓰러지자 포위하고 있던 자들 중 두 사람이 풍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풍천은 손속에 조금의 인정도 두지 않았다.
살짝 몸을 트는 것으로 두 사람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한 그는 실낱같은 틈 사이로 검을 뻗었다.
구화십이검수는 약한 자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일류 수준에 도달한 자들로 나종화의 직속 호위무사들이었다. 하지만 풍천을 적으로 맞이한 것이 그들에게는 불행이었다.
한 줄기 빛처럼 뻗어 나간 천풍검은 두 사람에게 피할 틈도 주지 않고 목과 옆구리에 구멍을 냈다.
갑자기 풍천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당황하던 두 사람은 급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쓰러졌다.
그제야 구화장의 무사들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보통 놈이 아니다! 모두 최선을 다해서 공격해라!”
나종화도 구화십이검수가 눈 깜짝할 순간에 셋이나 당하자 이를 갈았다.
“추양, 네가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종화로 인해 뒤를 돌아볼 수 없는 관추양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나종화와 구화장의 무사들이 바짝 긴장한 걸 보니 풍천과 상관경의가 자신의 예상보다 강한 것 같아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종화, 이제 우리의 일을 매듭짓자.”
“흥, 그것도 좋겠지!”
나종화는 코웃음을 치며 관추양을 향해 죽 미끄러져 갔다.
관추양 역시 마다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갔다.
쩌저저정!
일순간 두 사람의 도검이 얽혀들고 붉은빛으로 물든 허공이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 사이 풍천은 네 사람의 합공을 받아야만 했다.
바짝 긴장한 구화십이검수는 조금 전과 달랐다. 비록 한순간의 방심으로 세 사람이 쓰러지긴 했어도 그들은 나종화가 삼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끌어들인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풍천은 그들이 강력하게 합공하며 압박하는 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상관경의를 걱정하며 적을 상대했다.
“무리하지 말고 달려드는 자들만 막고 있으쇼. 나머지 떨거지들은 내가 대충 처리할 테니까.”
구화십이검수는 그 말을 듣고 모닥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분노가 솟구쳤다.
“죽일 놈!”
“사지를 잘라서 죽여버리겠다, 이놈!”
하지만 풍천은 그들의 위협에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낯빛이 변하기는커녕 자신이 익힌 낙성천류검과 비월신검을 다듬기라도 하려는 듯 십이초의 모든 초식을 골고루 펼치며 그들을 상대했다.
쩌정! 떠더덩!
뒤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풍천이 딱 그 꼴이었다.
그는 검법만으로 적을 상대하는 게 즐거웠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비파를 탄주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언제까지 즐기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전면을 막고 있음에도 세 사람이 상관경의를 공격하고, 두 사람은 언제라도 뛰어들 것처럼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이었다면 상관경의의 일검도 받아내지 못할 자들이었다. 하지만 왼손을 쓰지 못하고 공력도 삼사 할밖에 쓰지 못하는 상관경의 입장에서는 그들 셋조차 버거운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풍천의 의문이 깊어졌다.
‘천외에서 온 것 같다는 놈들은 왜 나타나서 상관 노형을 구해주지 않는 거지?’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나타날 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뜻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버마재비를 뒤에서 노리는 참새처럼.
이상함을 느낀 풍천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구화장의 무사들을 처리하기로 작정했다.
그가 귀환신법을 펼친 순간 그의 모습이 환영처럼 사라졌다. 네 명의 무사들은 느닷없는 상황에 눈을 크게 뜨고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찰나, 시퍼런 검광이 허공을 가로로 그으며 뻗어 나갔다.
“컥!”
“피해! 크윽!”
두 사람이 목과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풍천은 남은 두 사람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사이 상관경의를 공격하고 있는 자들을 쳤다.
그런데 그가 한 사람의 가슴에 구멍을 냈을 때 관추양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으으윽.”
‘빌어먹을! 그놈의 고집은…….’
풍천 역시 관추양이 질지 모른다는 걸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슬쩍 쳐다보니 신음을 흘리며 물러서는 관추양의 어깨에서 피가 다시 흐르고, 옆구리와 다리에도 제법 깊은 상처가 더해져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풍천은 일단 구화십이검수 중 남은 자들을 덮쳤다.
진호량은 뭔가를 우려하면서 상관 노형을 부탁한다고 했다. 그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면서. 만약 그가 말한 ‘그들’이 내부의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구화장의 무사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천외에서 왔다는 자들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제길,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군.’
작정을 한 풍천의 공격에 또다시 한 사람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꼬꾸라졌다.
풍천은 쓰러지는 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일 장 밖에 있는 자를 향해 날아가며 좌수를 휘둘렀다.
허공이 손 그림자로 뒤덮였다.
구화장의 검수는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 채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천라신수는 그의 검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쾅!
천라신수에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자가 이 장이나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유령과 같은 움직임,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검, 거기다 막강한 장력까지.
풍천의 적극적인 공세는 그러잖아도 두려움을 느낀 구화장의 무사들 표정을 해쓱하게 만들어버렸다.
관추양을 몰아붙이던 나종화는 그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과 구화십이검수면 충분할 줄 알았거늘, 보잘것없는 놈으로 봤던 자와 병자처럼 보이는 자에게 구화십이검수가 여덟이나 당하다니.
‘제기랄! 장로들을 대동하고 왔어야 했어!’
아니 구화장의 삼 백 무사를 모조리 대동했어야 했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은 법이었다.
구화십이검수 중 남은 자는 넷. 이대로 가면 관추양을 죽이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죽는다. 아니 그 전에 저 알 수 없는 놈이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
마음이 흔들린 나종화는 피를 흘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관추양을 놔두고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적은 관추양뿐이었다. 다른 두 놈과는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모두 물러서라!”
그가 악을 쓰듯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 구화십이검수 중 살아남은 네 사람이 썰물처럼 뒤로 몸을 뺐다.
나종화는 풍천을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면서 빠르게 멀어졌다.
‘죽일 놈! 네놈은 그들에게 맡기마.’
풍천은 그들을 쫓지 않고 관추양을 바라보았다.
“괜찮수?”
관추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풍천을 바라보았다.
문득 풍천에게 빚 대신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떠올랐다. 창백하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나도 미친놈이군.’
풍천이 그런 관추양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내상이 심합니까?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네요?”
관추양은 더욱 진하게 붉어진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아니네. 으음…….”
아니라면 다행이었다. 지금은 내상을 치료한답시고 시간을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빨리 상처를 손보쇼. 바로 이곳을 떠야 하니까.”
“나종화가 다시 올까 봐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빨리 상처부터 손보라니까요.”
풍천은 관추양을 다그치고 상관경의를 바라보았다.
상관경의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이 왜 안 나타났다고 보시죠?”
풍천의 질문에 상관경의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자네 말대로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먼저일 것 같군.”
상관경의는 확실한 답을 회피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풍천의 눈이 커졌다. 돌아선 상관경의의 발자국에 핏물이 고여 있는 것이 아닌가.
“잠깐만요. 어디 또 다쳤어요?”
“심한 것은 아니네.”
“나 참! 많이 다쳤다고 하면 제가 뭐라고 합니까? 왜들 그렇게 상처를 감춰요?”
상관경의는 쓴웃음을 지으며 별것 아닌 듯이 말했다.
“너무 걱정 말게. 지혈했으니 여기를 벗어날 동안은 괜찮을 거야.”
풍천은 상관경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가벼운 상처라고 하기에는 흐르는 피가 너무 많았다.
“벗어봐요.”
상관경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네. 설마 여기서 바지를 벗으란 말은 아니겠지?”
“어디를 다쳤습니까?”
“허벅지 뒤쪽이네. 왼손이 불편하다 보니 빈틈이 드러난 모양이야.”
풍천은 쓰러져 있는 구화십이검수 중 하나에게 다가가더니 옷자락을 몇 조각 쭉쭉 찢었다. 그리고 상관경의에게 다가가서 허벅지를 살펴보았다.
그의 말대로 허벅지 뒤쪽 옷자락이 갈라져 있었는데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풍천이 천으로 상관경의의 허벅지를 싸매는 동안 관추양도 죽은 자의 옷자락으로 상처를 싸매고 일어났다.
조양경은 당하를 떠나는 풍천일행을 보며 서릿발 같은 눈빛을 번뜩였다.
‘구화십이검수 셋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면 어렵지 않겠는데…….’
문제는 젊은 놈이었다. 신출귀몰한 신법을 제외하면 그리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구화십이검수 여덟이 대부분 놈에게 당했다. 처음 셋이야 방심하고 달려들었다가 당했지만 나중에 당한 다섯은 온전히 실력에서 밀린 것이다.
‘내가 잘못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분명 낙성천류검과 비월신검이었어. 설마 령주가 제자를 받아들인 건가?’
그렇지 않다면 젊은 놈이 그 두 가지 검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천응단의 단원들은 구화십이검수와 격이 달랐다. 하나하나가 나종화와 일대일로 겨룰 수 있는 고수들이다.
저 젊은 놈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셋이면 충분히 목을 자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풍천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직이 말했다.
“단주께 말씀드려라. 십리림(十里林)에서 저들을 처리할 것이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갈색 무복의 무사가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