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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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1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17화
117화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지. 당하에서 사신도를 긴장시킬 만한 사람은 그밖에 없으니까.”
관추양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나름대로 마음을 숨긴다 했는데 선배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나 봅니다.”
“구화장의 주인인 구화신검 나종화는 자네와 백 초를 겨룰 수 있는 고수네. 하나 그것도 자네가 부상을 입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 내 보기로는 좀 더 시간을 둔 후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네만.”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제 마음이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 급한 마음으로는 더욱더 불리할 거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그 친구의 손에 죽는 수밖에. 하지만 죽기 전에 그 친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명하게 말해줄 겁니다.”
두 사람의 말이 길어지자 풍천이 버럭 소리쳤다.
“식사 안 할 겁니까? 그럼 저 혼자 가서 먹습니다?”
상관경의는 그제야 말을 멈추고 풍천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돈은 다 자네에게 있지 않은가? 알아서 안내하게.”
풍천은 힐끔 상관경의를 째려보고 객잔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내가 뭐 돈을 억지로 뺏었나? 계약금과 치료비로 받은 거지? 그것도 조금밖에 주지 않았으면서, 쪼잔하기는…….’
풍천도 그 나름대로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황금 이백 냥을 위해서 상관경의의 자존심까진 건들지 않았다.
풍천은 대로를 걸어가며 객잔 중 이름이 마음에 드는 곳을 골랐다. 마침 눈에 띄는 이름이 보였다.
[백령객잔(白鈴客盞)]
그 객잔을 보니 백초령이 떠올랐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혹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슴이 찡하니 울렸다. 눈빛도 보일 듯 말 듯 살짝 떨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곧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불안한 마음을 털어냈다.
‘초령이 성질에 그 자식을 괴롭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위태곤도 백초령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등왕각을 들락거렸다.
하물며 상관경의에게 들은 대로라면 그의 조카는 마음이 독하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작자라고 해서 위태곤과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풍천은 손가락으로 백령객잔을 가리켰다.
“우리 저기로 가죠.”
그때였다. 이상할 정도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대로 끝자락에 십여 명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관추양은 풍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들을 주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무사들은 모두 열세 명이었는데 그가 잘 아는 사람이 선두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저는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군요.”
상관경의가 관추양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화장 사람들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오는 걸 미리 알고 마중을 나온 것 같습니다.”
관추양의 일에 끼어들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풍천은 빙긋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잘 가쇼. 나중에 봅시다.”
“나중에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좌우간 자네 도움은 잊지 않지.”
관추양은 풍천의 작별인사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언제나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풍천과 상관경의가 끼어들었다가 낭패라도 당할까 봐 그것이 더 걱정되었다.
“상관 선배도 잘 가십시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관추양은 상관경의를 향해 포권을 취하고는 사신도를 굳게 쥔 채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상황은 풍천과 관추양의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상관경의가 무엇을 느꼈는지 이마를 찌푸린 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멈추게. 아무래도 자네 혼자서 해결할 일이 아닌 것 같군.”
관추양은 세 걸음째에서 걸음을 멈추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여태까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피한 적이 없습니다. 걱정해주시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나도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 않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른 것 같군.”
풍천은 사사건건 끼어들려는 상관경의를 째려보았다.
“상관 노형, 친구 사이에 따질 일이 있다는데 왜 끼어들려고 합니까?”
그러다 백초령을 구하러 가는 길이 늦어지면 어쩌려고!
하지만 상관경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끼어들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예? 무슨 말……?”
풍천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구화장의 무사들 쪽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인근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구화장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기운과 완연히 다른 기운이었다.
“응? 뭐지? 저들 말고 누가 또 있나”
풍천이 뭔가를 느낀 듯 눈매를 좁히고 주위를 둘러보자 상관경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야 워낙 자주 접했던 기운이어서 내공을 사 할밖에 쓸 수 없는데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풍천은 달랐다.
천의 무사들이 고의적으로 숨기는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얼마나 될 것인가?
열? 스물? 아무리 많아도 서른은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럼 풍천이 그 정도 고수일까?
신법만 본다면 충분했다. 하지만 전체를 평가하자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젊은 나이여서 내공도 한계가 있어 보이고.
‘내가 잠풍을 잘못 평가한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풍천은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는데 자신은 처음 만났을 때 봤던 선입견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습군. 내 검을 단숨에 자신의 것으로 만든 저 괴물 같은 친구를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하다니.’
상관경의는 쓴웃음을 지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아무래도 천외에서 사람들이 나온 것 같군.”
그런데 허공을 바라보던 상관경의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들이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왜 관추양과 나종화의 일에 관여하는 것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든 것이다.
만약 저들의 목적이 관추양이 아니라면?
상관경의의 턱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두고 보면 알겠지.’
하지만 풍천은 상관경의의 입에서 천외라는 말이 나오자 인상을 풀고 걱정을 털어냈다.
“그럼 상관 노형이 나서면 해결되겠군요.”
평소라면 상관경의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천외천에서 그의 명령을 어길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그 사이 관추양과 구화장 무사들 간의 간격이 삼 장으로 좁혀들었다.
관추양이 걸음을 멈추자 구화장 무사들 중 선두에 서 있던 청색 비단장삼을 입은 장한이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추양. 왔으면 바로 나를 찾아오지 않고 왜 여기에 있는가?”
그가 바로 관추양의 어릴 적 친구이며 당하 일대를 장악한 구화장의 주인, 구화신검(九化神劍) 나종화였다.
관추양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일행이 있어서 식사를 하고 찾아가려 했네.”
“저런, 저런. 내가 손님 받는 걸 좋아한다는 걸 몰랐나?”
“알고 있네. 하지만 바로 떠날 분들이어서 자네 집으로 함께 가기가 뭐하더군.”
“흠, 뉘신지 소개시켜주게나. 천하의 사신도와 일행이라면 보통 분들이 아니신 것 같은데 말이야.”
나종화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며 상관경의와 풍천을 쳐다보았다.
풍천은 눈이 마주치자 툭 쏘듯이 말했다.
“신경 끄쇼.”
멈칫한 나종화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곧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면 그럴 수도 있겠지, 생각하며 다시 입가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하하, 젊은 친구가 너무 매몰차게 말하는군. 나는 나종화라 하네. 강호의 친구들은 구화신검이라 부르기도 하지. 자넨 이름이 어떻게 되나?”
“신경 끄시라니까? 내가 왜 당신에게 이름을 알려줘야 되는데요?”
풍천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걸 원치 않았다. 그들 중 신검문에서 자신을 본 사람이라도 있으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
하지만 풍천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나종화에겐 그의 말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저 건방진 놈이!’
주인의 마음을 읽은 듯 그의 뒤에 서 있던 무사들 중 하나가 눈에 힘을 주고 싸늘하게 소리쳤다.
“어린놈의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거 이상한 사람들이네. 내가 언제 당신들하고 인사하자고 했수? 하기 싫다는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쇼?”
“뭐야?”
발끈한 무사가 당장 검을 뽑을 것처럼 등 뒤로 가져가며 한 걸음 내딛었다.
그때 관추양이 마주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냉랭히 말했다.
“저 친구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자네가 저 친구의 이름까지 알 필요는 없잖은가? 안 그런가, 종화?”
나종화는 서리가 겹겹이 내린 눈빛으로 풍천을 보면서 분노를 억눌렀다.
“자네가 그리 말하니 내가 참지.”
“고맙네. 그럼 이제 그 친구와 말다툼하는 것은 잠시 미루고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주었으면 싶군.”
나종화는 천천히 눈을 돌려서 관추양을 직시했다.
“말해보게.”
“지 숙부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이 정말 자넨가?”
나종화는 고개를 느릿하니 끄덕였다.
“맞네. 하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이유? 대체 어떤 이유가 은인인 지 숙부를 죽이게 만들었단 말인가?”
“지 숙부께서는 끼어들지 말아야 할 일에 끼어드셨네. 그리고 나는 그로 인해서 엄청난 손해를 보고 말았지. 사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분을 용서해드리려고 했네. 그런데 그분이 거꾸로 내 뒤통수를 치더군.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그분을 칠 수밖에 없었네.”
“무창 대화장과의 일 말인가?”
“그렇다네.”
“내가 알기로 그 일은 자네가 잘못한 것이라 들었네만. 자네가 대화장과의 협정을 먼저 어기고 한수에서 내려가는 물건을 가로채지 않았나?”
“상권 경쟁은 전쟁이나 마찬가지네. 그리고 전쟁에서는 승자가 옳은 법이지. 나라고 해서 언제까지 대화장의 그늘에 묻혀 있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많이 달라졌군. 십 년 전만 해도 순수함이 남아 있었는데 말이야.”
“순수? 훗, 하하하하! 사신도가 그런 말을 하니 어울리지 않는군.”
관추양은 비웃음이 담긴 표정으로 대소를 터트리는 나종화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스로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실토한 이상 그는 더 이상 나종화를 친구로 보지 않았다.
“자네가 이곳까지 나온 걸 보니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보군.”
“친구가 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눈이 어둡지는 않다네.”
“혹시 궁호충을 나에게 보낸 것도 자네가 아닌가?”
“멍청한 친구. 상황을 잘 설명하고 이해시키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모양이군.”
“그리 생각하고 보냈다면 사람을 잘못 보냈네. 그는 말이 서툴더군. 그리고 검도 자네만 못했어. 그 바람에 목이 잘린 채 지옥으로 갔지.”
“아쉽군. 그래도 쓸 만한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조금도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는 나종화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간다면 자네와 나 사이의 관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거네.”
나종화를 바라보는 관추양의 시선도 서리가 내린 것처럼 차갑게 변했다.
“자네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지금은 그게 진실일 뿐이지.”
“어리석군, 어리석어. 추양, 왜 나를 자꾸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나?”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자네가 그리 변한 것이야.”
“내가 변했다? 정말 그런가? 흐으음····· 어쩔 수 없군. 자네와는 계속 친구로서 지내고 싶었거늘.”
나종화는 정말 어쩔 수 없이 결정했다는 듯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등 뒤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그의 뒤에 있던 무사들이 앞으로 나오면서 반원을 그리며 세 사람을 포위했다.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이 대로를 만 근 무게로 짓눌렀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풍천이 말 몇 마디로 만 근 무게를 날려버렸다.
“이보쇼, 싸움이 끝나면 저 백령객잔에 갈 생각인데 음식솜씨가 어떤지 아쇼?”
“미친놈!”
조금 전부터 풍천을 노리고 있던 자가 검을 뽑으며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