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14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14화
114화
백초령은 멍하니 서 있는 그를 향해 툭 쏘아붙였다.
“뭐해요? 앞장서요.”
“응? 그래, 따라와.”
그런데 두 사람이 전각을 나서서 공손천우의 조부가 있다는 곳으로 가려 할 때였다. 한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누구야? 천우 아니냐?”
공손천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고개를 돌리자 서른 전후로 보이는 장한이 하늘색 청삼을 차려입고 뒷짐을 지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의 사촌 형 공손선우였다.
‘제기랄, 저 재수 없는 인간은 언제 나왔지?’
공손선우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백초령을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누구지? 본 천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내 손님이니 신경 쓰지 마시죠.”
“호오, 외인을 곡 안으로 데려왔다?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군.”
“다른 여자한테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형수한테나 잘해주시죠.”
그 말에 공손선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안 본 사이에 입이 거칠어졌구나.”
“내 입이 왜 거칠어졌는지 형님이 잘 알잖습니까?”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내가 네 형이라는 걸 잊지 마라.”
“걱정 마시죠.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니까. 자, 우린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공손천우는 손을 뻗어서 백초령의 손을 잡아당겼다.
갑자기 손이 잡힌 백초령은 공손천우에게 끌려가며 공손선우를 힐끔거렸다.
‘형과 사이가 안 좋은가? 하긴 왠지 음침한 인상이야.’
공손선우가 안 보일 때쯤 백초령은 공손천우의 손을 뿌리쳤다.
“누구 맘대로 손을 잡아요?”
공손천우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걱정 마셔, 좋아서 잡은 것 아니니까. 따라와.”
“당신 조부님 만나고 나면 바로 보내주기예요?”
움찔한 공손천우는 걱정 말라는 투로 말했다.
“난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야. 뭐해? 따라오라니까.”
그 말에 백초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풍천도 입만 열면 저렇게 허풍을 떨었는데…….’
풍천을 생각하자 기분이 울적해진 백초령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공손천우의 뒤를 따라갔다.
공손천우는 그런 백초령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뭐지? 왜 저런 표정이야?’
공손천우는 백초령을 데리고 조부가 사는 천상궁으로 갔다.
백초령은 천상궁에서 흐르는 거대한 기운에 압도당해서 입도 뻥끗 못 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용상에 앉아 있던 노인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백초령을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누구냐?”
“손자가 혼인을 하려고 데려온 여잡니다, 할아버지. 신검문 백무천 문주님의 둘째 딸입니다.”
백초령은 날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인간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뭐? 혼, 인?’
노인, 공손량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천우와 백초령을 번갈아 보았다.
남다른 자질과 셋째가 죽으면서 혼자 자란 것이 안타까워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생각한 손자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반항적인 기질이 튀어나오더니 최근 들어서는 엉뚱한 짓만 해댔다.
실망감이 든 그는 언제 한번 따끔하게 혼내주려 했다. 그런데 혼인할 여자를 데려오다니.
그간의 불만과 실망감이 눈 녹듯이 스러지고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맺혔다.
“호오, 그래? 그 녀석, 이제야 철이 드나 보구나.”
“조부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백무천의 딸이라면 제대로 배운 아이일 터,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내 허튼 짓만 하고 돌아다녔으면 가만두지 않으려 했는데 이 늙은이를 즐겁게 해주었으니 이번은 용서하마.”
“감사합니다, 조부님.”
“허허허. 아이야, 네가 백무천의 딸이라고?”
“예? 예, 어르신. 저 그런데 그게…….”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노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상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허허허, 천우가 여자를 제대로 골랐구나.”
공손천우는 짐짓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조부님.”
백초령은 이대로 끌려갈 수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발딱 들었다. 그때 한 줄기 전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냥 가만있어. 약속한 거 잊지 말고.]
‘이건 약속과 달라!’
그렇게 생각한 백초령이 입을 열려는데 또다시 공손천우의 사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 번만 봐줘라, 백초령. 이번만 넘기면 된다니까?]
멈칫한 백초령은 공손천우를 쏘아보았다. 그때 공손량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우야, 데려가서 쉬도록 해라. 그 아이도 많이 피곤한 것 같구나.”
멍한 정신으로 천상궁을 나온 백초령은 공손천우를 따라 천구전으로 갔다.
공손천우의 거처인 천구전은 멀지 않은 곳에 개울이 흐르고 있어서 나름대로 멋진 풍치를 자랑했다.
그러나 백초령의 눈에는 멋진 풍경이고 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공손천우를 따라서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눈에 쌍심지를 켰다.
“뭐라고요? 내가 당신과 혼인할 사람? 지금 장난하자는 거예요?”
“신경 쓸 것 없어. 조부님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거니까.”
“하, 나 참. 조부님께 그런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니…… 이제 보니 당신, 나쁜 사람이군요?”
“나도 하기 싫어. 그런데 조부님이 하도 닦달하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안심시켜드리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다 거짓말이란 게 알려지면 더 실망하실 거 아니에요? 아니지, 내가 왜 그런 걱정을 하지? 흥! 분명히 말하지만 엉뚱한 생각하지 말아욧!”
공손천우는 눈을 치켜뜨고 싸울 것처럼 대드는 백초령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훗, 내가 알기로는 혼인을 약조한 사람이 없다던데 그럼 나도 후보 정도는 될 수 있는 거 아냐?”
“뭐예요? 누구 맘대로! 흥! 내가 왜 약조한 사람이 없어요? 모르면 말이나 말지.”
“혼인을 약조한 사람이 있다고? 백서령은 정혼한 사람이 있어도 백초령은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
백초령은 공손천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똑 부러지게 말했다.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구요.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구요. 우린 죽어도 함께 죽기로 했으니까 당신은 절대로 끼어들 생각하지 말아요.”
공손천우의 눈빛이 묘하게 이지러졌다.
조부님께 혼나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기 위해 데려온 여자다.
물론 사심이 조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백초령 정도면 어디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정말 혼인을 하게 된다면 모르는 여자를 택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랑?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백초령의 말을 들으니 이상할 정도로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래서 그런지 묻는 목소리에도 날이 섰다.
“그게 누구지?”
“알아서 뭐하게요?”
“그냥, 네가 좋아하는 놈이 누군지 궁금해서.”
“신경 끄세요. 말해줘도 모를 테니까. 좌우간 나는 당신의 부탁대로 가만히 있었어요. 이제 집으로 보내줘요.”
“오자마자 나가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러니 푹 쉬면서 며칠만 기다려. 조부님의 관심이 조금 덜어지면 그때 보내주지.”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예요?”
“어기는 게 아니라니까. 며칠 후에 보내주면 될 거 아냐?”
풍천처럼 허풍을 떨 때부터 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약속을 뒤집는다. 표정을 보니 강하게 나간들 보내줄 것 같지도 않고.
씩씩거리던 그녀는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한 발 물러섰다.
“정말 며칠 후에는 보내주는 거죠?”
“물론이지.”
“만약 안 보내주면 당신 조부님을 찾아갈 거예요.”
“알았다니까.”
“좋아요, 대신 나는 이곳에서 지낼 수 없어요. 그러니 여자들이 기거하는 곳에 방을 내줘요.”
“왜? 내가 어떻게 할까 봐? 걱정 마. 손도 까딱하지 않을 테니까.”
“늑대 말을 어떻게 믿어요? 잔소리 말고 내 말대로 해줘요. 만약 해주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서 당신이 지금까지 거짓말했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를 거예요.”
“알았어, 알았어. 정 그걸 바란다면 내 알아보지.”
대답하는 공손천우의 두 눈 깊은 곳에서 기광이 일렁였다.
보면 볼수록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끌렸다.
지금껏 천의 여자는 물론이고 강호의 여자를 보고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백초령과 공손천우가 투닥거리고 있던 그 시각, 남쪽의 천궁전에서는 공손무백과 공손선우가 마주 앉았다.
“천우가 혼인할 사람을 데려왔단 말이지?”
“예, 아버님.”
“교활한 놈. 교묘하게 아버님의 환심을 사는군.”
“너무 걱정 마십시오. 놈은 강호에 아무런 욕심도 없는 놈입니다. 무헌 숙부의 사람 외에는 따르는 사람도 없고요. 설령 놈의 생각이 바뀌어서 저희를 막으려 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건 그렇지. 후후후후, 잠영과 묵천이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둘째는 더 이상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야.”
“그런데 아버님, 신마성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소자가 밖으로 나가볼까 합니다만.”
“네가?”
“이번 전쟁이 세상을 경험하기에는 좋은 기회라 봅니다.”
“흐으음,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래, 간다면 어디로 갈 생각이냐?”
공손선우의 입가로 냉소가 번졌다.
“천의맹을 먼저 구경해볼 생각입니다.”
제6장. 사람 말을 왜 못 믿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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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각에서 날린 전서구가 신검문에 도착한 것은 가랑비가 내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백유현은 전서를 읽고 눈을 번뜩였다.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백무현을 찾아갔다.
“청백이와 본문의 사람들이 검각에 들렀다 합니다, 형님.”
“초령이는?”
“아직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합니다. 그리고 신마성이 구룡회를 치기 위해서 움직일 거라는 소식입니다.”
시기가 조금 빠를 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아무래도 그들은 남창의 일을 핑계 삼아서 움직일 생각인 듯했다.
백무천으로선 백초령의 일도 중요하지만 신마성의 북상을 간과할 수도 없었다.
“신마성이 언제쯤 움직일 것 같으냐?”
“빠르면 한 달 정도? 하지만 그 안이라도 천혈궁을 먼저 움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지휘체계를 이원화해서 본문을 지킬 힘과 구룡회의 타 세력과 결집할 힘을 분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휘체계를 둘로 나눈다?”
“어차피 본문의 전 무력이 움직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일일이 명을 내리고 그 명을 받아서 움직일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구룡회에 보내는 힘을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비상시에는 형님께서 총지휘를 하시는 거지요.”
“생각해볼 일이군. 좌우간 그 일은 청백이 돌아오는 대로 상의해보도록 하고, 아우는 추검당을 보내서 초령이에 대한 것을 알아보도록 해라. 정 안 되겠으면 개방의 힘이라도 빌리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형님. 너무 심려 마십시오. 초령이의 행방이 남창 일대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아이가 이미 그곳을 벗어났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곧 연락이 오겠지요.”
“그랬으면 좋으련만…… 하아…….”
풍천이라도 있으면 초령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거늘. 백무천은 그의 죽음이 정말로 아쉬웠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백유현이 나가자 백무천은 태사의에 몸을 깊게 묻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때 뒤쪽 휘장이 미미하게 펄럭이는가 싶더니 영호관이 걸어 나와 백무천의 뒤에 섰다.
백무천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왔느냐,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