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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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11화
111화
“으으음, 그럼 제 목숨이 잘못될 수도 있단 말인데…… 그 정도라면 최소 황금 백한 냥은 받아야 합니다.”
오제 중 하나인 신검무제 백무천의 살해청부 건도 황금 백 냥이었지 않던가. 자신의 목숨 값으로 백무천보다 한 냥이라도 많이 받고 싶었다.
‘설마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상관경의는 그의 생각보다 통이 컸다.
“성공하든 못 하든 노력만 해주면 황금 이백 냥을 주지.”
황금 이백 냥!
오오오, 이제 천풍장에도 꽃이 피는구나!
주먹을 불끈 쥔 풍천은 당장 환호성을 내지르며 승낙하고 싶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표정을 관리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험, 뭐 그 정도라면 한번 해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말씀해보십쇼. 부탁이란 게 뭐죠?”
“최후의 순간에 한 사람을 지켜주는 일이네.”
정말 마음에 드는 청부군!
일의 경중이야 어쨌든 죽여달라는 청부보다는 보호해달라는 청부가 훨씬 더 나았다.
‘백서령을 지켜달라는 게 오십 냥이었니까, 무려 네 배군!’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직업에 충실한 질문을 던졌다.
“저기, 선금은 얼마나 주실 겁니까? 하, 하, 하. 원래 이런 일은 선금으로 삼 할 정도 받는데 상관 노형의 처지를 생각해서 이 할만 받죠.”
상관경의는 그런 풍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풍천은 슬그머니 눈을 돌리고는 인심 크게 쓴다는 듯 선금을 반으로 깎아주었다.
“뭐 당장 그만한 돈이 없다면 일 할이라도…….”
“원래 일 할 아닌가?”
움찔한 풍천은 한숨을 내쉬며 한 번 더 양보했다.
“평상시에는 그렇습니다만…… 후우, 좋습니다. 그럼 있는 대로만 받죠. 이거 마음이 이렇게 약하면 안 되는데…….”
상관경의는 오른손을 쭉 뻗어서 풍천을 가리켰다.
“왜…… 그러십니까? 뭐 묻었어요?”
풍천은 더듬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경비를 호량에게 맡겨놓아서 나에게는 은자 몇 냥밖에 없군. 우선 이 반지를 갖게. 선친께서 물려주신 건데 금 열 냥은 족히 나갈 거야.”
풍천은 상관경의의 손을 바라보았다. 파란 보석이 깊숙하게 박힌 금반지가 중지에 끼워져 있었다.
한참 만에 홱 몸을 돌린 그는 툭툭 쏘듯이 말했다.
“내가 뭐 선친의 유품을 뺐을 만큼 돈에 환장한 놈인 줄 아쇼? 됐네요! 까짓 거 후불로 받지 뭐.”
풍천을 바라보는 상관경의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정말 미워할 수 없는 친구야.’
‘제길, 이제 와서 돈주머니 챙긴 걸 말할 수도 없고…… 킁.’
풍천은 킁킁거리며 몇 번 콧소리를 내더니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누구를 지켜줘야 하는 거요?”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지.”
3
새벽 어스름이 밀려들 무렵, 풍천은 상관경의와 함께 해동산의 집을 나섰다. 혹시 몰라서 검은 보따리 속에 넣어 보이지 않게 했다.
선창에 있는 배는 고깃배와 강을 건너는 도선이 대부분이었다. 신마성의 입김이 닿는 배들은 모두 추격전에 나선 듯했다.
풍천은 배를 빌려서 파양(波陽)으로 건너갔다. 재수 없게 깐깐한 사공을 만나서 뱃삯을 곱으로 주었지만 아쉬운 건 자신들이니 속으로 화를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틀 후 파양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장 육로를 타고 북상했다.
여름이 다가오는지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고 쨍쨍 내리쬐는 햇볕이 뜨겁게 느껴졌다.
풍천이 화청백과 백초령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장강 가의 팽택(彭澤)에 도착해서 객잔에 머물 때였다.
감강을 건넌 화청백 등은 구강으로 가지 않고 무령현으로 꺾어진 후 북상해서 양신현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두 명이 죽긴 했지만 나머지 다섯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백초령이 아직 신검문에 돌아오지 않아서 백무천이 신마성에 이를 갈고 있다고 했다.
‘초령이는 아버지가 걱정할까 봐 신검문에 연락을 하려고 했을 거야. 그런데도 아직까지 신검문이 백초령의 생사를 모른다면 공손천우가 연락을 못 하게 한 것 같아. 그럼 정말로 초령이를 천외까지 데려갔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죽여서 파묻지 않았다면.
‘죽일 것 같았으면 남창에서 죽였겠지.’
겁탈하려고 했다면 도주하던 중 머물렀던 자리나 해동산의 집에 어떤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 흔적도 없었다.
풍천은 상관경의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공손천우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놈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네. 그래서 혼인을 하라고 해도 여태 총각으로 살고 있지.”
‘그 점은 정말 마음에 드는군.’
그런데 왜 초령이를 천외까지 데려가려는 걸까?
혹시 인질로 삼아서 신검문에 거액을 요구하려고?
‘맞아! 그럴지도…….’
풍천은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혹시 공손천우가 돈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도박 같은 거 하다가 빚진 거라도……?”
상관경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돈을 싫어하네.”
‘별놈 다 있군, 돈이 싫다니. 남들이 다 챙겨주니까 배가 불렀어.’
풍천은 공손천우를 배부른 돼지 정도로 판단하고 다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돈이 아니면 신검문의 세력을 이용해보려고? 흠, 그것도 말이 되는군.’
그럼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백무천이 무조건 그의 요구를 수용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심 결론을 내린 풍천은 엽차로 입술을 축였다.
‘좌우간 화청백도 무사히 빠져나갔다니, 이제 신검문도 뭔가 대책을 세우겠지.’
자신이 구룡회의 안전까지 생각해줄 이유는 없었다.
정 그럴 마음이 있다 해도 신검문 정도만 도와주면 되었다. 물론 엄청난 거금을 내밀면서 ‘도와주시게!’ 하면 몰라도.
‘해결사는 난세가 대목이라고 했지. 흐흐흐, 이 기회에 한몫 잡는 거야. 뭐 상관 노형의 일만 잘 처리해도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지만.’
그리고 예쁘고 마음씨 고운 여자를 얻어서 재미있게 살아야지. 아들딸 구별 말고 다섯 정도 낳아서.
그런데 자식을 낳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울적해졌다.
‘내 진짜 성은 뭐일까?’
기억이 조금만 더 돌아오면 알 것도 같은데…….
4
노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백의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경의와 단천무령이 신마성에게 당했다고?”
“그렇습니다, 아버님. 놈들의 힘이 저희가 파악하고 있던 것보다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경의는 어떻게 되었느냐?”
“잠영(潛影)의 보고에 의하면 누군가의 도움으로 놈들의 포위망을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진호량은 놈들에게 잡혔는데 잠영의 형제가 처리한 것 같습니다.”
노인의 흰 눈썹이 미미하게 꺾어졌다. 노기를 억누르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둘째 제자가 중상을 입고 신마성에 쫓기고 있거늘 어찌 기분이 좋을 것인가.
“경의를 곤란케 했다면 신마성에서 팔대신마 중 몇이 나섰겠군.”
“팔대신마 중에서 나선 자들은 흑운신마와 탈혼신마뿐입니다. 문제는 일도천살 유광과 그가 이끌고 나타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십여 년 전에 행방이 사라진 자들로 죽거나 은거한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이번에 신마성에서 나타났습니다. 잠양은 그들이 신마비원이라는 곳에서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버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신마성이 비밀리에 강호고수를 모아 힘을 키웠다는 뜻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더 위험한 자들이라는 말이기도 하지요.”
“숨기고 있던 힘을 드러냈다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에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더냐?”
“구룡회를 칠 계획인 것 같습니다.”
노인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그어졌다.
“흐음, 구룡회라…….”
“본격적으로 욕심을 내보겠다는 것이겠지요.”
“혁련궁도 나이를 먹어가니 마음이 조급해지나 보군.”
“죽기 전에 신마성을 천하제일세로 만들고 싶을 겁니다.”
백의중년인은 일단 그쯤에서 말을 맺고 노인을 직시했다.
“아버님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어디 네 생각을 말해봐라.”
“소자의 생각으로는 구룡회에 은혜를 베푸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 자칫 우리의 실체가 드러날 수가 있어.”
“경의와 단천무령이 당했습니다. 게다가 신마성의 전력이 짐작하고 있던 것보다 더 강한 판국입니다. 전력을 드러내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아버님.”
“나도 안다. 하지만 구룡회가 비록 오패천만은 못하다 해도 그들의 힘을 모두 합하면 결코 오패천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일단은 그들의 힘만으로 신마성을 상대케 하고 결정적일 때 나서서 신마성을 물리치면, 굳이 우리를 드러내지 않아도 될 게야.”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버님, 저에게 잠영과 묵천의 지휘권을 주십시오. 그럼 적당한 선에서 신마성의 공격흐름을 끊도록 하겠습니다.”
노인은 백의중년인을 지긋이 응시했다.
천외천의 무력은 모두 아홉 개로 나누어져 있다. 그중 잠영과 묵천을 합하면 천외천 전력의 삼 할에 이른다. 그 지휘권을 넘길 경우, 기존의 힘을 포함해 천외천 전력의 반 이상이 아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 정도면 아들이 가슴에 도사린 욕망을 표출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다.
‘정녕 이 아이의 뜻을 막을 수 없음인가?’
자신은 늙었고 아들은 젊다. 더 우려되는 것은 천외천 사람들의 가슴에도 욕망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들이 비록 가슴에 욕망을 품었을지언정 악을 품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
노인은 답답함을 억누르고 재차 다짐을 받았다.
“무백, 천의 존재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백의중년인, 공손무백은 고개를 숙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잠영과 묵천의 지휘권을 주지. 단, 아니다 싶으면 즉시 회수할 것이니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공손무백은 차로 입술을 적시고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안에 웅크리고 있기에는 저희가 너무 커졌습니다. 차면 넘칠 수밖에 없는 법이지요.’
반 각이나 지났을까, 사십 초반의 중년인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서생들이 입는 펑퍼짐한 옷을 입은 그는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들어오더니 공손무백의 옆에 선 후에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제야 눈을 뜬 공손무백은 그림자처럼 옆에 서 있는 중년 서생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비은, 잠영과 묵천을 얻었다.”
“감축하옵니다, 주군.”
“이제 좀 뭐가 돼가는 것 같군.”
“하늘이 주군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비연. 네가 책임지고 경의를 찾아내라. 천에 도착하기 전에 말이야.”
중년 서생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주군.”
“천응단을 보내.”
흠칫한 중년 서생은 눈을 살짝 들고 공손무백을 응시했다.
“어느 선까지 처리해야 하는 일인지요.”
공손무백의 눈에서 찰나 간 한광이 번뜩였다.
“놈이 다시는 둘째 옆에 서지 못하게 해.”
“그리합지요.”
대답하며 허리를 숙이는 중년서생의 가느다란 눈에서 밤 고양이의 눈빛 같은 노란 살기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