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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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43화
143화
“저기, 상관경의는 계약금으로 황금 오십 냥을 줬는데 말이죠. 대공께서는 몇 냥이나 주실 건가요?”
교비은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황금이라면 목숨도 걸 놈이군.’
하지만 그래서 더 다루기가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그는 빙긋 웃으며 순순히 대답했다.
“황금 백 냥을 주지. 됐나?”
풍천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교비은을 칭송했다.
“정말 화끈한 분이시군요. 감사합니다, 교 대협.”
“어차피 자네에게 줄 오백 냥 중 일부네. 너무 감격할 것은 없네. 하, 하, 하.”
“그래도 황금 백 냥이 어디 적은 돈입니까? 아참, 황금으로 들고 다니려면 힘드니까 기왕이면 보석으로 주십쇼.”
“알았네, 그리 하지.”
“그리고 말이죠, 저는 계산이 확실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 한 냥도 모자라면 안 됩니다.”
“알았다니까!”
교비은은 짧고 강하게 대답하고는 홱 몸을 돌렸다. 더 있어봐야 성질만 안 좋아질 것 같았다.
풍천은 교비은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딱 백 냥짜리 보석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럼 모자라지 않게 주려면 조금이라도 더 값나가는 걸 주겠지.
‘열 냥만 더 나가도 그게 어디야?’
풍천은 그 생각을 하며 교비은을 문밖까지 나가서 환송했다.
“안녕히 가십쇼.”
“잘 자게나.”
교비은은 건성으로 작별인사를 건네고는 함께 온 위사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풍천은 교비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방 안으로 들어가서 침상에 벌러덩 누웠다.
‘후와, 오늘은 황금 백 냥을 벌었군. 하루 일당치고는 굉장한데? 나중에 저자를 죽일 기회가 오면 깨끗하게 단칼로 죽여줘야지.’
3
교비은을 만난 다음 날 아침.
풍천이 뒷마당에서 광양검결을 수련하고 있는데 신예가 달려왔다.
“령주님, 령주님.”
검을 뻗은 채 고목을 원수처럼 바라보던 풍천은 슬쩍 눈알만 돌려서 신예를 바라보았다.
“왜 그리 방정이야?”
“화, 화 노야께서 찾아오셨어요.”
화 노야? 원로원의 그 불덩이 노인?
‘만나면 귀찮아질 것 같은데, 어디로 도망갈까?’
하지만 그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화문오가 먼저 들이닥쳤다.
“흥! 여기 있었군.”
풍천은 앞으로 뻗고 있던 검을 휘둘러서 최대한 멋지게 회수한 후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다른 사람은 다 속았을지 몰라도 나는 속지 않는다, 이놈.”
“제가 뭘 속였단 말씀입니까?”
“하오잡배 같은 놈이 늙은이들의 눈을 속이고 착한 척하다니, 생긴 것도 기녀 기둥서방 같은 놈이 너구리처럼 머리를 굴리는군.”
“아니, 그럼 제가 원로분들 앞에서 함부로 굴었어야 했단 말입니까?”
풍천이 계속 무게를 잡고 말하자 화문오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혹시 자신이 잘못 안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건 아니지만…….”
“제 성격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닙니다만 아무에게나 함부로 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화문오는 말에서 밀리자 발끈해서 억지를 부렸다.
“네놈의 성격이 어떻든 그건 상관없다! 나는 장부석을 부순 네놈에게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면 그뿐이니라!”
“바위 하나 때문에 단천무령의 령주인 저를 벌하겠다는 겁니까?”
“바위 하나 때문? 오냐, 이놈! 네놈의 목도 장부석처럼 두 조각을 만들어주마.”
버럭 소리친 화문오는 풍천을 향해 신형을 날리며 쌍장을 휘둘렀다.
풍천은 화문오의 공세를 기름칠한 미꾸라지처럼 피하며 주절거렸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투로.
“거참, 노인네가 왜 그리 성격이 급하십니까? 어이쿠, 무시무시한 장력이군요. 그런 정도로는 저를 잡기 힘들겠는데요? 다 늙은 분이 힘도 좋으시네. 적당히 하시죠. 그러다 급사라도 하시면 저만 나쁜 놈처럼 보일 것 아닙니까?”
간간이 화문오도 노성을 터트렸다.
“머리를 부숴버리겠다, 이놈!”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그럴수록 화문오는 더욱더 미친 듯이 날뛰고, 풍천은 측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만 진정하시고, 정 더 싸우시려면 물 좀 드시고 하시죠. 그러다 숨넘어가겠습니다. 제가 말이죠, 화 노야처럼 달려들다가 심장이 멈춰서 뒈진 사람들 많이 봤거든요.”
“으아아아, 죽어라 이노오오옴!”
“아,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
화운장의 위세는 무시무시했다.
뒷마당에 있던 바위가 부서지고 허벅지 굵기의 나무가 가루로 화해서 허공에 흩날렸다.
풍천은 정말 죽일 것처럼 공격하는 화문오에게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원로인 화문오보다 강하다는 게 알려지면 대공과 교비연이 경계심을 품을지 몰랐다.
오십여 초가 흐르자 화운장의 폭풍 같은 위력에 뒷마당이 평평해졌다. 그리고 백 초가 가까워지자 화문오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졌다.
풍천은 일체의 반격을 하지 않고 귀환신법과 비영산화보, 팔방만취보를 적절히 펼쳐서 화문오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나이는 못 속이는 법이라니까?’
화문오는 쉬지 않고 백 초식을 펼친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풍천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헉, 헉, 헉. 너…… 누구냐?”
“단천무령의 신임 령주 대풍이죠.”
“뭐, 뭐, 뭐하던 놈이야? 헉, 헉.”
“솔직히 말해서…… 해결사였죠.”
“해, 해, 해결사? 청부살인하는 놈?”
“청부살수가 아니라 해결사라니까요.”
“조, 좋다. 그, 그, 그런데 해결사 주제에 왜 이렇게 빨라?”
“제가 좀 빠르긴 하죠. 그런데 물 좀 드릴까요? 신예야! 물 좀 가져와라!”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멀찌감치 도망가 있던 신예가 주춤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화문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풍천만 노려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숨이 안정된 화문오가 불쑥 물었다.
“너…… 여기에 왜 들어온 거냐?”
“그야 상관 노형이 단천무령을 맡아달라고 해서 들어온 거죠.”
“거짓말 말고 솔직히 말해!”
“속고만 사셨나? 사실이라니까요?”
화문오는 풍천의 머리에 구멍을 내버릴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때 신예가 물이 찰랑거리는 대접을 들고 왔다.
“노야, 여기 물 가져왔사옵니다.”
화문오는 손을 뻗어서 대접을 받아 들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면서도 풍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빈 대접을 신예에게 넘긴 화문오는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네놈이 무슨 뜻을 품고 들어왔는지 몰라도 네놈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천외천은 강호 정의의 마지막 보루니라. 혹시라도 대공의 청을 받고 들어온 거라면 지금이라도 그냥 떠나라. 여긴 너 따위 놈들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지면 안 되는 곳이니까.”
‘강호 정의의 마지막 보루? 웃기시네!’
은근히 화가 난 풍천은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비꼬듯 말했다.
“천외천이 뭐 엄청나게 깨끗한 곳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제 눈에는 구정물 통처럼 보이는데.”
“네놈이 감히……!”
“온갖 사악한 짓은 다 저질러놓고 혼자서만 깨끗하다고 하면 누가 믿어요?”
“우리가 언제 사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냐, 이놈!”
“모릅니까? 정말 몰라요? 하긴, 뭐 모를 수도 있겠죠.”
풍천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으로 화문오를 직시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푸르스름한 눈빛에 화문오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때 풍천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말이죠, 노인장이 모른다고 해서 사실이 거짓으로 변하지는 않는 법이죠. 저 땅끝에 묻혔으니 누구도 모를 거라 생각해도 세상의 일이란 게 워낙 오묘해서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나게 돼 있거든요?”
“무, 무슨 말이냐?”
풍천은 냉소를 지은 채 몸을 돌렸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노인장이 직접 알아보쇼. 아, 혹시 이공께선 아실지도 모르겠군요.”
막상 화가 나서 저질러놓긴 했는데 돌아서자마자 후회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화문오가 대공 쪽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씨발, 별수 없지 뭐.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잖아?’
화문오는 풍천이 전각 쪽으로 다가가는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그런지 몰라도 가슴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감춰진 전설의 진실. 설마 그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풍천이 무심헌으로 들어간 후에야 몸을 돌렸다.
‘외숙부를 만나 봐야 할 것 같군. 어쩌면 그날이 다가온 것인지도 모르겠어.’
제8장. 남자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니까!
1
다행히도 화문오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풍천은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백초령이 사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찾아가서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하하하, 초령아! 나야 나, 풍천! 많이 기다렸지!
그렇게 소리치면 눈물을 흘리며 반길지 몰랐다. 달려와서 품에 안길지도 모르고.
‘잘하면 입술을 부딪혀볼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주위에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중에는 대공의 눈도 있을 게 분명했다. 그들이 자신과 백초령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면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될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아니어도, 백초령이 이공에게 입방정이라도 떨면 일이 엉뚱하게 흐를지 몰랐다.
백초령을 신검문에 데려다 주는 걸 이공이 허락한 것은 그녀를 공손천우의 배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 그런데 백초령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말이다.
‘속은 줄 알고 마음을 바꿀지 몰라.’
이공을 적으로 만들면 일이 몇 배는 더 힘들어질 것이었다. 황금 이백 냥도 날아갈 것이고.
그러니 당장은 멀리서 지켜보는 수밖에.
‘쳇, 저 말괄량이는 내 속도 모르고 잘 놀고 있네.’
풍천은 멀리 떨어진 나무 위에 누워서 백초령이 사는 전각을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백초령이 보였다.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표정이 어찌나 밝은지 납치당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
‘혹시 초령이도 공손천우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
한번 그런 의심이 들자 의문점이 하나둘 더 떠올랐다.
여기까지 왜 그렇게 순순히 따라왔을까? 정말로 신검문에 탈출 소식을 알릴 기회가 전혀 없었을까?
은근슬쩍 화가 났다.
자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들어왔는데 웃으면서 놀고 있다니…….
‘하긴 초령이가 누구를 좋아하든 내가 무슨 자격으로 상관할 수 있겠어. 안 그래? 구해서 데려다 주고 돈만 받으면 되지.’
한편으로는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만약 백초령과 자신이 서로 좋아한다고 하면 백무천이 어떻게 나올까?’라는 생각마저 하니 더욱 어깨가 처졌다.
‘설령 백초령이 나를 좋아한다 해도 문주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일반 사람들도 해결사를 싫어하는데 하물며 정파의 대문파 주인이 좋아하겠어?’
형처럼 사문을 버리고 완전히 신검문 사람이 된다면 몰라도.
하지만 풍천은 백무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사문을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사부님이 너무 불쌍했다.
‘쳇, 나는 역시 평범한 여자가 어울려. 초령이처럼 성질이 사나운 여자보다 부드럽고 순한 여자가…….’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허전하지?
제기랄.
‘사실 초령이만 뭐라고 할 것도 아니지 뭐. 내가 생각해도 해결사 마누라보다는 천외천 이공자의 마누라가 훨씬 더 멋져 보이는데.’
이래저래 힘이 빠진 풍천은 늦가을 찬바람에 떨어지는 색 바랜 단풍잎처럼 나무에서 툭 떨어져 내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봐요!”
아름다운 여자의 목소리.
풍천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피부가 눈처럼 하얀 여인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