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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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36화
136화
감능하는 불에 댄 사람처럼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저기 감 형, 만약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내가 일일이 내려가야 하는 거요?”
“걱정 마십시오. 령주께서 오셨으니 곧 시비가 배정될 겁니다. 저기 저 방이 시비가 머무르는 방이니 시킬 일이 있으면 시비를 부르십시오.”
시비? 여자가 시중을 든단 말이지?
풍천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지금까지 시중이라고는 장 노인의 시중을 받은 것밖에 없었다. 시중이라기보다 잡일을 한 정도지만.
그런데 여자가 시중을 들다니. 더구나 시비가 자신과 함께 산다지 않는가?
‘초령이가 오해하면 안 되는데…….’
풍천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동안 감능하는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대주인 양곽연이 이상하게 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 같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풍천의 안내를 맡기고는 ‘절대 그놈하고 가까이 하지 마라. 불행해질지 모르니까.’ 그렇게 나직이 말했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자세한 설명을 들을 필요까진 없었다.
보고, 듣고, 직접 당해봤으니까.
풍천이 고개를 돌렸을 때 감능하는 이미 십여 장 밖을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무지 바쁜가 보네. 몇 가지 물어보려고 했더니, 다음에 물어봐야겠군. 바쁜 사람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면 나라도 싫을 거야.’
그는 감능하의 처지를 이해하며 전각으로 다가갔다.
전각의 구조는 단순했다. 크고 작은 두 개의 방과 다용도실 하나, 그리고 부엌으로 보이는 곳이 작은방 옆에 붙어 있었다.
큰방은 상관경의가 사용하던 곳이고, 작은방은 시비가 머무는 곳인 듯했다. 다용도실은 그 사이에 있었다.
풍천은 큰방 앞에 섰다.
방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부술 수는 없는 일.
“어떻게 열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고개를 돌리고 저만치 걸어가는 감능하를 불렀다.
“감 형, 여기 자물쇠는 어떻게 여는 거요? 나는 열쇠가 없는데.”
감능하는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말했다.
“전임 령주께 받지 못했습니까? 그럼 곧 시비가 올 테니 시비에게 열어달라 하십쇼. 시비는 비상열쇠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풍천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한쪽에 있는 개울가로 갔다. 열쇠가 없으니 시비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개울가에 주저앉은 풍천은 두 손으로 물을 떠서 얼굴을 적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서 맑은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건가?’
반 시진 후. 풍천이 개울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어린 소녀가 올라왔다.
이제 열네댓 살 정도? 키는 자신의 가슴밖에 닿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눈이 커서 귀여운 인상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걸음이 무척 느렸다. 오기 싫은데 억지로 오는 사람처럼.
풍천은 개울에서 발을 빼고 전각으로 갔다.
소녀는 풍천을 보더니 겁이 잔뜩 질린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 령주님을 모실 신예이옵니다.”
“어, 나는 풍…… 대풍이라고 한다. 네가 내 시중을 들 시비야?”
“예, 령주님.”
겁을 잔뜩 먹은 신예의 얼굴을 보고 풍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어?”
신예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신임 단천무령주가 느닷없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불귀곡을 뒤흔들었다. 반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신임 령주가 젊다는 말에 시비들을 움직이는 비연당(婢練堂)의 여자들은 분주히 돌아다니며 새로운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 후, 비연당에선 신임 령주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괴팍한 성질을 지녔으며 예의도 없고, 제멋대로이며 무공도 별로면서 지위로 남을 억누르는 사람.
한마디로 가까이해선 안 될 사람, 상대함에 있어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호천대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특히 양곽연의 몇 마디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어쨌든 그런 결론을 내린 비연당에선 서로 신임 령주의 시비로 가지 않으려 했다.
멀쩡하던 홍비는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뒷간으로 갔고 아침 잘 처먹고 늘어지게 트림을 했던 청랑은 체한 것 같다며 약을 타기 위해 약당에 갔다.
남은 사람은 어린 신예뿐. 비연당주 화소연은 어쩔 수 없이 신예를 신임 령주의 시비로 보내기로 했다. 이제 열다섯이 되었으니 만약 령주가 수상한 일을 시켜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서.
그렇게 선배들에게 떠밀려 억지로 온 신예는 신임 령주가 소문처럼 괴팍하거나 무서운 사람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그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조금 맹하게 보였다.
“아뇨.”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대답하고 슬쩍 눈을 들어 풍천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깜박이는 눈에 잔뜩 졸음이 들어차 있었다.
‘이분이 정말 신임 령주일까? 혹시 신임 령주의 부하 아닐까?’
그때 풍천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하음, 시비에게 열쇠가 있을 거라고 하던데, 있어?”
“예, 령주님.”
“그럼 방 좀 열어줘.”
신예는 힐끔 풍천을 쳐다보고는 품에서 열쇠 세 개를 꺼냈다.
풍천은 신예가 자물쇠를 열고 재빨리 한쪽으로 물러서자 방문을 열어보았다.
안쪽에 침상이 있고, 방 가운데에 대여섯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의 서가에는 수백 권의 서책이 꽂혀 있었다.
풍천은 최대한 순진하게 보이도록 웃음을 지으며 신예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난 한숨 잘 테니까 들어가서 쉬고 있어. 나중에 필요하면 부를게.”
신예가 보기에는 왠지 엉큼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예, 령주님.”
대답하는 신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설마…… 대낮부터 이상한 일을 시키는 건 아니겠지? 아이, 그럼 어떡하지?’
풍천은 침상에 털썩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신예를 불렀다.
“저기, 신예야. 잠깐 좀 들어와 봐.”
“예? 예에에에.”
화들짝 놀란 대답. 들어오는 모습이 어째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강아지 같다.
“왜 그렇게 놀래?”
“저, 저, 저기, 무슨 일로……? 저는 아직 어려서…….”
“그렇게 어려 보이지도 않는데 뭐…….”
신예는 간절한 눈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저는 아직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령주님.”
그제야 이상한 느낌이 든 풍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 해봐? 뭘?”
“잠자리 시중드는 거…….”
‘잠자리 시중? 헉!’
그제야 신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풍천은 자신도 모르게 침상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그러고는 신예보다 더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말이야? 자, 잠은 나 혼자 자면 되는데…….”
“정말……이에요?”
“그, 그러어엄!”
신예는 그래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왜 부르신 거예요?”
“어? 어, 그거야 내가 이곳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으니 물어보려고 부른 거지.”
신예는 눈을 반짝이며 신임 령주를 바라보았다.
행동과 말투를 보니 소문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단천무령의 령주가 된 걸까?
그때 풍천이 다탁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그리 앉아라. 물어볼 게 많으니까.”
신예는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서 풍천을 주시했다.
풍천은 그녀의 반대편에 앉아서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험, 사실 령주가 되긴 했는데 워낙 갑자기 되어서 아는 게 거의 없거든. 멋모르고 함부로 움직이다 욕먹으면 그게 무슨 창피냐? 안 그래? 그래서 묻는 건데, 너 천외천의 기본 구조에 대해서 알고 있어?”
“당연하죠. 시비를 하려면 그 정도는 기본이죠.”
“그래? 그럼 먼저 천외천의 구조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봐라.”
“정말 모르세요?”
“모르니까 묻지.”
신예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며 풍천을 탐색한 후 진심이라는 걸 알고 긴장을 완전히 풀었다.
“좋아요, 그럼 천외천을 이루는 줄기부터 말씀드릴게요. 먼저 천주님이 계시고,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기거하시는 원로원, 천상선원이 있어요. 그리고…….”
천외천은 천주가 움직이는 쌍령(雙令)과 원로원 외에 열세 개의 단체가 존재했다.
그중에는 무력단체가 아홉 개로, 대외에 무력을 행사하는 은천(隱天), 묵천(墨天) 천응(天鷹), 도룡(屠龍)의 사단(四團)이 있고, 정보를 관장하는 이비(二秘), 경호와 순찰 등을 책임진 호천(護天), 수경(首警), 비응(秘鷹)의 삼대(三隊)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사당(四堂)이 대내외의 일반 대소사를 처리했다.
또한 천외천에는 수십 개의 성씨를 지닌 사람들이 있지만 천외천을 쥐고 흔드는 것은 단 세 개의 성씨를 지닌 사람들, 일명 삼대가문이었다.
신예는 쉬거나 머뭇거리지도 않고 일 각 동안 입을 놀려서 그중 이비를 제외한 나머지 세력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이비인 잠영(潛影)과 망혼(忘魂)은 워낙 비밀에 쌓여 있어서 저도 그 이름밖에 몰라요.”
일 각 동안 쉬지 않고 조잘거리던 신예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풍천은 그제야 반쯤 앞으로 기울였던 허리를 세웠다.
‘쪼그만 게 진짜 말 잘하네.’
마치 그 이야기를 며칠간 준비한 사람처럼 조리 있게,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두루마리 펼치듯 늘어놓은 신예였다.
그녀 말재주에 감탄한 풍천은 앞으로 입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 잘하는 여자치고 어디 가서 조용히 있는 법이 없었다. 나이 어린 계집아이들일수록 더했다. 그러니 시비들끼리 모이면 온갖 이야기를 다 나눌 터, 실수하면 자신에 대한 것이 금방 소문날 것이 분명했다.
‘제일 먼저 이 꼬마 계집애의 입부터 단속해야겠군.’
어쨌든 신예의 설명으로 봉사가 한쪽 눈을 반쯤 뜬 정도가 된 풍천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귀곡 내에는 모두 일천오백여 명의 사람들이 기거하는데 그들 중 아이와 무공이 약한 여자, 노인이 반이고 무사는 팔백 정도 된다고 했다.
또한 불귀곡 바깥에서 천외천을 신처럼 받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삼천이나 된다고 하니 웅이산 일대에 그들만의 작은 왕국이 세워진 셈이었다.
‘후우우우, 이들의 영향이 미치는 문파까지 합한다면 정말 왕국이라 해도 되겠는데?’
풍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아까 천외천에 삼대가문이 있다고 했지?”
“맞아요. 얼마 전까지는 사대가문으로 불렸는데 사공가는 가세가 많이 기울어서 공손가나 용가, 등가와 비교가 안 돼요.”
“용가와 등가가 공손가와 힘을 겨룰 정도로 세력이 크단 말이야?”
“그 정도는 안 돼요. 천주님의 공손가가 워낙 강해서 본천의 힘 중 칠 할을 차지하는데요 뭐.”
“칠 할? 공손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가?”
“피이, 그게 아니고요. 공손가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그래요.”
슬쩍 던져본 말에 신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웃으니 새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손가를 따르는 사람이 그렇게 많단 말이지?’
잠시 신예의 이야기를 정리한 풍천은 그쯤에서 질문을 멈추고 화제를 돌렸다.
“신예는 지금 몇 살이지?”
“열다섯요. 나이는 왜요?”
신예가 다시 경계심을 드러내며 반문했다.
“왜는 인마, 예뻐서 그러지.”
“당주님이 그런 말 하는 사람 조심하라고 그랬어요. 설마 령주님은 저에게 나쁜 짓 할 거 아니죠?”
윽, 이게 사람을 어떻게 보고?
당주라는 사람이 아이를 다 버려놓았군.
“걱정 마. 내가 아무리 눈이 낮다고 해도 너 같은 꼬맹이에게 왜 이상한 짓을 하냐?”
그런데 풍천이 막상 그렇게 말하자 신예가 입을 삐죽이더니 넌지시 물었다.
“저기요, 제가 그렇게 볼품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