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34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34화
134화
제4장. 정들면 안 되는데
1
불귀곡 내부를 지키는 호천대의 대주는 양곽연이란 자였다. 그는 천주의 경호책임자로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공손량의 곁에서 백 장 이상을 떨어지지 않아야 했다.
하기에 그의 거처인 호천각도 천상궁 바로 옆에 있었고 천상궁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 그를 거쳐야 했다.
그날 아침도 양곽연은 다른 때와 다름없이 천상궁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먼저 만나 보았다.
호안(虎眼)에 관운장처럼 기다란 수염을 기른 양곽연은 감능하로부터 사정을 듣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라? 신임 단천무령주?”
한소리 내지른 그는 쓴웃음을 짓고 있는 감능하에게서 시선을 돌려 풍천을 바라보았다.
두리번거리며 실내를 구경하던 풍천은 양곽연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양곽연이 풍천을 노려보며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단천무령의 신분패를 가져왔다고?”
“그렇습니다.”
“상관 령주께서 자네에게 령주의 지위를 넘겼다고?”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령주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여기에 왔다?
“아, 짜증 나게 정말…….”
“…….”
감능하는 입을 떡 벌리고, 양곽연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도대체 몇 번이나 묻는 거요? 저 사람이 다 말했잖아요? 그걸 또 묻는 심보는 뭡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정말 그런 겁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는데요? 정말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더니 사람 열 받게 만드시네.”
턱을 쳐들고 쉴 새 없이 말하는 풍천의 입에서 침이 튀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
양곽연과 감능하는 동시에 말문이 닫혔다.
분노? 짜증? 확실한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면서 피가 끓고 속이 울렁거렸다.
결국 수하인 감능하가 먼저 나서서 풍천을 다그쳤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여기 계신 분이 뉘신지 알고 함부로 말을…….”
“당신이 당해보쇼. 화 안 나게 생겼나. 마음 가라앉히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탕!
풍천이 앞에 있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생각해보라니까!”
순간 감능하의 얼굴이 벌게졌다.
동시에 호천각 밖에 서 있던 두 명의 무사가 안쪽을 힐끔거렸다. 웃지도 못하고 화도 낼 수 없는 상황. 기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풍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떠들었다.
“이 대풍은 말이오, 단천무령 신임 령주로 온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럼 그에 대해서만 말해야 하는 거 아뇨? 당신 개띠요? 왜 자꾸 물은 거 또 묻고, 물은 거 또 묻고 하면서 물고 늘어지는 거요? 그거야말로 나를 무시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 화가 안 나게 생겼어요?”
‘개, 개띠가 어째?’
양곽연이 더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거냐?”
풍천은 훌쩍 뒤로 일 장을 물러서더니 소매를 걷어붙였다.
“뭐요? 한번 싸워보겠다는 거요? 좋습니다! 어디 덤벼보쇼! 까짓 거, 무사는 주둥이로 싸우는 게 아니라는데 잘됐네 뭐!”
“이, 이, 이……!”
어이가 없어진 양곽연은 입을 반쯤 벌린 채 풍천을 쳐다보았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당장 달려들 것처럼 설치는 풍천의 얼굴을 한 대 후려패고 싶은 마음이 욱하니 솟구쳤다. 체면 때문에 차마 손을 쓰지 못할 뿐.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패?’
그때였다. 감능하가 스윽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풍천의 양팔을 잡아갔다.
“내가 상대해주지!”
대주인 양곽연이 저런 자를 상대로 손을 쓴다는 것은 체면 문제였다. 차라리 나중에 욕을 먹더라도 자신이 나서서 상황을 종료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풍천은 감능하가 손을 뻗어오는 걸 빤히 바라보고는 두 손이 자신의 손을 잡을 때쯤 움직였다.
“어? 정말 해보자는 거죠? 그럼 내 잘못은 없는 거요?”
그의 말이 끝날 때쯤에는 이미 그의 두 손이 감능하의 팔을 거슬러 올라간 상태였다.
‘헛!’
대경한 감능하는 급히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신법에 관해선 풍천이 그보다 몇 수 위였다. 그리고 한껏 물이 오른 천라신수는 감능하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퍼벅!
감능하의 양쪽 어깨를 풍천의 쌍장이 두들겼다.
“크읍!”
감능하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직전, 어깨를 두들긴 풍천의 두 손이 감능하의 멱살을 확 잡아당겼다.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은 고마운데 사람 우습게 보지 마쇼.”
풍천은 침을 튀기며 한마디 내뱉고 감능하를 양곽연 쪽으로 밀었다.
그 바람에 막 탁자 뒤에서 빠져나오던 양곽연은 앞이 막혀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탁탁.
손을 턴 풍천은 쓱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당신들하고 싸우기 위해서 여기 온 거 아니니까 그만하죠.”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감능하는 자신이 당한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양곽연도 감능하가 단 일수에 당하자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를 경시하고 손을 썼다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풍천은 두 사람의 표정이야 어떻든 자기 할 말만 했다.
“어떻게 할 거요? 천주를 만나게 해줄 거요, 말 거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양곽연은 기광을 번뜩이며 풍천을 노려보았다.
“신분패 말고도 상관 령주께 령주의 지위를 물려받았다는 다른 증거가 있는가?”
“그럼 내가 그런 것도 없이 온 줄 아쇼?”
‘저 자식이 정말!’
나름 인내심이 강하다는 양곽연은 이상할 정도로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기 위해서 뒷짐 진 주먹을 힘껏 쥐었다 폈다.
“좋아, 그럼 그걸 보여주게.”
순간!
쩡!
풍천이 검을 뽑아 들고 양곽연을 가리켰다.
“무슨 짓이냐!”
대경한 감능하도 급히 검을 뽑아 들고, 양곽연은 두 손에 공력을 운집한 채 풍천의 검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풍천은 그들의 반응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낙성천류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잘 보쇼. 나중에 나이가 들다 보니 눈이 어두워져서 보지 못했다는 헛소리하지 말고.”
뭐?
감능하가 움찔한 사이, 풍천이 낙성천류검을 펼쳤다.
그는 낙성비류와 낙성일광, 낙성삼혼까지 삼 초의 검을 펼쳤다.
검광이 전각 안을 뒤덮는 듯싶다가도 허공에서 유성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대기가 짜르르 울리는가 싶더니 십여 개의 검광이 하나로 합쳐졌다.
순식간에 삼 초의 검을 펼친 풍천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감능하는 모를지 몰라도, 양곽연은 풍천이 펼친 검을 바로 알아보고 가늘게 뜬 눈을 잘게 떨었다.
“낙성천류검…….”
“비월신검도 배웠는데 아무래도 그건 상대가 있어야 펼치기도 좋고 알아보기도 좋죠. 아, 당신이 한번 시험해보겠수?”
감능하는 풍천의 말에 흠칫하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양곽연이 이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상하군. 상관 령주와 만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요?”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낙성천류검을 육성 이상 익힌 것 같군. 설마 한 달 만에 그만큼 배웠다는 건 아니겠지?”
“배운 것은 한 달이 아니라 이십 일 정도 되죠.”
‘뭐?’
양곽연이 놀라든 말든 풍천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십 일이나 되었는데 이제 겨우 팔성밖에 익히지 못했죠. 한 달만 더 배우면 십성까지 익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 놈이 천고의 자질을 지닌 천재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하지만 사람은 거짓말을 할지 몰라도 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었다. 상대가 낙성천류검을 제대로 펼쳐 보인 이상 양곽연도 풍천의 말을 거짓말로만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가? 양곽연은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하늘도 불공평하군. 저런 놈에게 그런 자질을 주다니.’
그래도 겉으로는 눈곱만큼도 질시하는 표를 내지 않았다.
“흐음, 괜찮은 자질이군. 좋네, 상관 령주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건 그걸로 인정하지. 하지만 자네를 령주로 인정할 것인지는 천주님께서 판단하실 문제니 아직 안도하지 말게. 자, 그럼 천주님께 가세.”
그는 천주와 풍천의 만남을 허락하기로 한 이상 이곳에서 빨리 내보내고 싶었다.
왠지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바로 보낼걸.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런 놈은 오래 상종해봐야 좋을 게 없어.’
그런데 풍천이 머쓱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음식냄새가 나는 거 보니까 식사할 시간인 것 같은데, 저도 여기서 식사하고 가면 안 될까요? 천주님도 식사하셔야 할 텐데 말이죠.”
‘끄응, 역시 바로 보냈어야 했어.’
양곽연은 풍천의 청을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세.”
오늘 아침 식사는 모래를 씹는 기분이겠군. 제기랄!
2
공손량은 앞에 서서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풍천을 보고 오십 년 전의 어떤 기억이 호수 위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떠올랐다.
‘꼭 그놈을 보는 것 같군.’
오십 년 전에는 그도 마음을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천외천의 힘을 사분(四分)하고 있던 한 가문의 아들이었는데, 불귀곡에서의 삶을 지겨워하던 그 친구는 어느 날 영원히 천외천을 떠나버렸다.
그 이후로 그에게는 두 번 다시 친구가 생기지 않았다. 천외천의 천주로 내정된 후계자에게 친구로 다가올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친구는 내 신분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었지.’
그러다 천외천의 어른들에게 심한 벌을 받기도 했는데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건들거리며 창문을 통해 자신의 방으로 불쑥 들어오기 일쑤였고, 한밤중에 자신을 불귀곡 저 안쪽으로 데려간 후 몰래 빚은 술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고 했다. 임무를 위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서 나가는 걸 원했다.
그는 그 친구가 떠나는 걸 원치 않았다. 혼자서 외로움과 싸워야 하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결국 그의 곁을 떠났고 그는 슬픔에 잠겨서 웃음을 잃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슬픔이 분노로 변했다.
그는 그 분노를 풀기 위해 낙양으로 갔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분노를 털어냈을 때 이미 세월은 일 년이 넘게 흘렀고 그 친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모두 잃은 것처럼 사흘간 눈물을 흘린 뒤에야 자신이 그 친구를 진정으로 좋아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나마 그 친구의 혈육이 남아 있다는 걸 천행으로 생각하고 데려와서 제자로 삼았다.
그런데 그 아들도 친구와 비슷했다. 성장해서 나이가 차자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처음에는 곧 돌아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오 년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분노해서 낙양에 살고 있는 친구의 아들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돌아오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이니라!”
결국 친구의 아들은 부인과 함께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 앞에서 피를 토하듯 말하며 자결했다.
“길러준 사부의 은혜를 저버릴 수도 없고 불구대천지수와 함께 살 수도 없으니 이 세상을 떠나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인 듯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착이 친구의 아들 부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걸 깨닫고 후회막급했다. 가만 놔두었으면 죽진 않았을 것을.
그때부터 그는 마음이 흔들리면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공손천우가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을 방관한 것도 그 친구와 친구 아들 때문일지 몰랐다.
‘그 녀석도 저 녀석처럼 우직함 속에 세상을 조롱하는 표정을 지니고 있었지.’
풍천을 주시하던 공손량은 주름진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입을 열었다.
“그래, 경의는 어떻게 죽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