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33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33화
133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풍천은 묵묵히 서서 기다렸다.
속으로 열을 셀 즈음 안개가 출렁이며 전방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모두 다섯. 그중 가운데 서 있던 자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는 누군데 단천무령의 철패를 가지고 있는 거요?”
풍천은 씩 웃으며 되물었다.
“그렇게 묻는 그댄 누구요?”
“호천대의 제일 향주 감능하라 하오.”
풍천은 질문을 하고 답을 받는 사이 생각을 고쳐먹었다.
본래는 일반 단천무령의 신분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리고 들어간 다음 천주를 만나 상관경의의 말을 전하려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할 것 같았다. 상관경의와 함께했던 단천무령은 모두 죽은 걸로 알려져 있을 터. 단천무령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공이란 자는 자신을 의심할 게 뻔했다.
그러니 어차피 의심받을 거라면 지위가 낮은 것보다 높은 게 나았다. 하다못해 천주를 만나는 것이라도 그만큼 쉬워질 것 아닌가?
그리고 상관경의 대신 자신이 령주가 되었다고 하면 싫든 좋든 상관경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었다.
‘좋아, 놈들을 한번 흔들어보자. 그럼 누가 적이고, 누가 내 편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
물론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천외천에 들어가기로 작정하면서 이미 각오한 터였다.
‘초령이를 구하기 위해선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뭐. 공손무백이나 등가위도 안에서는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할 거야.’
초령이가 알면 감동해서 울지 않을까?
‘가슴을 눈물로 적시면서 ‘풍천, 고마워!’ 하면 등을 툭툭 두들겨줘야지.’
풍천이 잠시 헛생각에 잠겨서 멍하니 서 있자 감능하라 밝힌 자가 눈을 치켜뜨고 다시 물었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소?”
재빨리 정신을 차린 풍천은 표정을 가다듬고 단천무령주의 영패를 감능하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단천무령의 신임 령주!”
5
공손무백은 굵은 눈썹을 송충이처럼 비틀며 교비은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냐? 단천무령의 신임 령주가 들어왔다니?”
“상관 령주가 두 사람과 동행했다더니 죽기 전에 그중 하나를 골라서 영패를 넘긴 것 같습니다.”
“괘씸한 놈. 죽어서도 말썽이군.”
“걱정 마십시오, 대공. 영패를 가졌다 해서 령주가 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놈은 기존의 단천무령도 아닌 자입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상관경의가 자신의 말을 천주께 전하기 위해서 놈을 이용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등 단주는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런 놈이 있다면 보고를 해야지!”
“상관경의를 처리하는 일이 최우선이어서 다른 자들은 미처 손을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이가 없군. 등 단주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교비은은 공손무백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허락하신다면 속하가 놈을 살펴보고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손무백은 미간을 좁힌 채 잠시 생각하더니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제거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놈에게 집중될 게야. 자칫 실수라도 하면 일이 엉뚱하게 커질 수 있어.”
“당장 제거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공. 단천무령도 아닌 놈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들어왔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상관경의가 상당한 대가를 주며 진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했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불귀곡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상관경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놈이 본천에 어떤 절대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 아닌 한, 회유하기는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놈을 회유하면 거꾸로 저희가 이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흠, 회유라…… 좋아. 만약 회유가 되지 않으면 지켜보기만 하면서 며칠 놔둬라.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질 때쯤 흔적 없이 제거해버려.”
“당연한 일이지요.”
“그리고 등가위에게 연락해서 어찌 된 일인지 자세히 알아봐.”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공손무백은 표정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전에 먼저 내가 직접 놈을 한번 봐야겠다.”
감능하는 안쪽에서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풍천을 안내했다.
안개는 이백여 장가량 이어지다가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난 삼 장 넓이의 길을 지난 후에야 점점 옅어졌다.
그리고 이십여 장의 협곡을 지나자 불귀곡 내부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풍천은 감능하의 뒤를 따라가며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굉장하군. 불귀곡이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진작 와볼걸. 상관 노형께 들었던 것보다 더한 걸? 우와, 저 고목나무 위의 집 좀 봐. 왜 저렇게 높은 곳에 집을 지었지? 바람 불면 떨어지지 않나?”
감능하는 뒤에서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풍천의 행동에 실소가 나왔다.
이런 자가 단천무령의 신임 령주라니.
단천무령의 신분을 알리는 열두 개의 철패를 가져오지만 않았어도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상관 령주께선 어쩌자고 이런 자에게 영패를 맡긴 걸까? 얼마나 몸이 안 좋기에? 설마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한편으로는 너무 빨리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후회되었다.
‘이렇게 말이 많은 줄 알았으면 천금무원진에서 쓰러질 때까지 눈 딱 감고 놔두는 건데…….’
감능하의 인내심이 한계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도 풍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보쇼, 여기에 몇 명이나 살고 있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는데 왜 세상 사람들은 여길 모르고 있는 거요?”
슬슬 짜증이 난 감능하는 목소리에 날을 세우고 반문했다.
“이곳이 왜 불귀곡이라고 불리는지 모르지는 않을 것 같소만?”
“하하, 그거야 알죠. 들어간 사람 중 살아서 나온 사람이 없어서 그리 불리는 거 아뇨?”
알면서 왜 물어?
“알면 됐소. 이제 조용히 하시오. 곧 천주께서 계신 천상궁이니까.”
감능하는 입을 꾹 다물고 천상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풍천은 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로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아야 했다.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수록 그만큼 더 안전해질 테니까.
“상관 노형이 나에게 령주 자리를 맡기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쇼?”
감능하는 대답하지 않으려 했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했소?”
“자네라면 단천무령주의 임무를 훌륭히 처리할 수 있을 거야, 그랬소이다. 하, 하, 하!”
유난히 큰 풍천의 웃음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귀가 먹지 않은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오가던 사람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주시했다. 다름 아닌 ‘단천무령주’라는 말 때문이었다.
감능하는 걸음을 빨리 했다. 이러다가는 천외천의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풍천은 그쯤에서 넌지시 초령에 대해 물어보았다.
“혹시 말이오, 얼마 전에 공손천우 공자가 누구를 데려오지 않았소? 상관 노형 말로는 여자를 하나 데려왔을 거라고 하던데.”
“데려왔소.”
풍천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얼굴도 살짝 상기되었다.
“남창에서 여기까지 데려오다니, 그 여자를 좋게 봤나 보군요.”
“그런 것 같소. 혼인할 여자라고 했으니까.”
컥!
‘호, 혼인? 이것들이 어디서……!’
풍천은 온몸이 폭풍을 만난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나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고 숨소리도 가라앉혔다.
으드득.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초령이를 좋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순전히 임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암! 고금제일 해결사로서의 명예에 흠집을 낼 순 없잖아?’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풍천은 오직 그 이유 때문에 두 사람의 혼인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려는 거지?
‘배신자!’
하지만 채 세 걸음을 걷기도 전에 백초령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납치당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맞아! 초령이는 납치당했어. 그럼 그놈에게 납치당해서 억지 혼인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초령이가 어찌 공손천우 같은 놈과 혼인을 한단 말인가?
‘초령이가 납치범을 좋아할 리가 없어! 분명 그놈이 강제로 혼인하겠다고 우기는 걸 거야.’
풍천의 축 처졌던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공손천우가 조금은 불쌍하게 여겨졌다.
‘자식, 눈도 되게 낮군. 어디 여자가 없어서…….’
바로 그때였다. 저만치 앞에 몇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자신을 기다리는 듯했는데 그중에는 상관경의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자도 있었다.
‘누구지? 엄청나게 강한 사람인데?’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앞서 가던 감능하가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였다.
“대공을 뵈옵니다.”
“수고가 많네. 그 친구가 자칭 단천무령의 신임 령주인가?”
“그렇습니다, 대공.”
“저 친구는 단천무령의 령주 자리가 영패 하나 가져왔다고 무작정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단천무령의 신분패를 모두 가져온 데다 천외천의 법대로 천주께 가서 직접 인정받겠다고 해서 저로선 제지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공손무백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천외천의 법까지 따지고 들 정도면 상관경의에게 이런저런 전말을 들었다는 뜻.
그래도 다행이라면 인상이 별 볼 일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특히 입술을 움찔거리며 눈을 깜박이는 모습은 볼수록 실소만 나왔다.
‘막상 들어오고 보니 두려운가 보군. 후후후, 태만함이 온몸에서 느껴지는 놈이야. 우려할 만한 놈은 아니군. 일단 비은에게 맡겨보고 안 되면 나중에 손을 써도 되겠어.’
마음이 느긋해진 그는 풍천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뭔가?”
풍천은 상대가 천외천을 좌지우지한다는 ‘대공’이라는 걸 안 순간 일단 심호흡부터 했다.
령주로 들어온 것은 대성공이었다. 단순 단천무령으로 들어왔으면 대공의 얼굴을 보는 것만도 며칠은 걸렸을 텐데, 들어오자마자 대공을 보고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너무 대박을 쳐서 말 한마디에 목이 오락가락할 판이었다.
등가위의 보고를 받았을 터, 대공은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설마 인사하는 와중에 죽이려 하진 않겠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공손무백이 질문을 했다.
풍천은 아주 공손한 어조로 답하면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제 이름은 대풍입죠.”
“경의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인가?”
풍천은 표정관리를 철저히 하며 대충 대답했다.
“남창에서 만났습죠. 상관 노형이 신마성 놈들과 신나게 싸우다 다쳤는데 그때 제가 구해드렸죠.”
신나게 싸워? 웃기는 놈이군.
“흠, 그러고 보니 자네가 경의를 구해줘서 영패를 넘겼나 보군.”
“그런 것도 있고, 십여 일 남창에 숨어 있다가 겨우 빠져나와서 북상하는데 어떤 놈들이 암습을 하지 뭡니까? 그 바람에 상관 노형이 천외에 돌아갈 수 없게 되니까 저에게 영패를 주고 령주가 되라고 하더군요.”
“암습자들이 누군지 아는가?”
공손무백은 질문을 던지고 풍천을 지그시 응시했다.
풍천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그게…… 상관 노형은 아시는 것 같던데, 뭣 때문인지 저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이 조용해졌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묘한 말이었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조용해졌으면 좋겠다고 한 말의 뜻 역시 의미가 불분명했다. 정말 세상이 조용해졌으면 해서 한 말인지 아니면 천외천에 격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말인지.
하지만 공손무백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등가위에게 알아보라고 했으니 곧 보다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만약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은 거라면 절충할 여지를 남겨놓겠다는 뜻.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상관경의가 했다는 말이 천외천의 격변을 염려해서 한 말이라면 상관경의의 성품으로 봐서 충분히 그런 말을 할 만도 했다.
아니어도 상관없고.
어차피 주도권은 자신에게 넘어와 있으니까.
“흐음, 신임 단천무령주라…… 어디 기대해보지. 만약 어려움이 닥치거든 나를 찾아오게나.”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풍천은 히죽 웃으며 포권을 취하고 감능하를 바라보았다.
“빨리 가서 천주님을 만나 뵙시다. 그래야 아침을 늦지 않게 먹죠.”
감능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자는 알까? 자신이 방금 지옥에 한 발 디뎠다 나왔다는 걸?
그런 판국에 아침 식사 조금 늦게 먹을까 봐 걱정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주의 실망하는 표정이 여기서도 보이는 것 같군.’
그러나 삼류 건달처럼 팔자걸음으로 걸음을 옮기는 풍천의 가슴에선 폭풍이 몇 번이나 몰아쳤다가 잠들었다.
‘지미, 빨리 초령이를 구해서 도망쳐야지. 여기 오래 있으면 간이 쪼그라들겠네.’
벽라동의 일이나 이공에 대한 임무는 당연히 백초령을 구한 다음의 일, 골치 아프게 미리 생각할 것도 없었다.
한편 묵묵히 한쪽에 서서 풍천의 모습을 주시하던 교비은은 풍천이 감능하를 따라서 천상궁으로 향하자 이마를 찌푸렸다.
‘별 볼 일 없는 놈인 것은 분명한데 왜 이리 기분이 찜찜하지?’
그에게선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빛도 나태함으로 찌들어 있고 걸어가는 모습은 삼류 건달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절정고수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너무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천성이 그런가?
‘두고 보면 알겠지. 어차피 곧 만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