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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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29화
129화
“으음, 대 형의 말도 일리는 있소만 그러다 대 형이 중독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는 어릴 때부터 극소량의 독을 복용하며 독에 대한 내성을 키워왔소. 그래서 어지간한 독은 기껏해야 설사하는 정도로 끝나지요. 물론 냄새는 조금 독합니다만. 어떤 때는 그 냄새가 어찌나 독한지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면서 구역질이 나는데…… 으으으, 정말 참기 힘들죠.”
풍천은 코끝을 찡그리며 당장 독한 냄새가 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천의맹 사람들은 갑자기 속이 거북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를 앞에 두고 독한 냄새가 나는 설사 이야기라니.
그러나 송구만큼은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풍천을 쏘아보며 다그쳤다.
“그래서 이 요리에 독이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다행히 독은 없는 것 같소.”
송구는 독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듯 요리를 자신의 그릇에 가득 퍼 담았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송구와 달리 요리를 그릇의 반 정도만 담았다.
풍천은 송구에 대해서 새로운 판단을 내리며 요리에 젓가락을 가져다 댔다.
‘역겨운 이야기를 듣고도 식성에 변화가 없는 걸 보니 어릴 때 개고생 좀 한 모양이군. 신경이 날카로워서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덜 먹은 만큼 자신의 양이 많아져서 불만은 없었다.
백하객잔의 숙수인 장오는 풍천 일행이 식사하는 모습을 주방에서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독을 넣을까 하다가 참은 게 다행이군.’
식사를 하고 있는 일곱 명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살아서 나갈 경우 천의맹이 대대적으로 움직일 터, 그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장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음식의 반을 혼자 처리하고 있었다.
요리를 시킬 때도, 요리가 나간 후로도 짜증 나게 하던 놈이었다.
돈은 적게 주려고 하면서 양은 많이 달라던 놈. 감히 자신이 만든 음식에 독이 들어 있나 시식하던 놈!
게다가 도통한 선인이 조는 것처럼 보일 만큼 나른한 눈빛을 보고 있으면 왠지 자신의 속이 다 드러나는 것 같아서 더 기분이 상했다.
‘정말 돼지 같은 놈이군.’
이상할 정도로 적개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놈만큼은 순순히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상황을 보니 하룻밤 유숙(留宿)할 것처럼 보인 것이다.
‘나에게 밉보인 것을 불운이라 생각해라, 놈.’
장오는 조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오리의 목을 두터운 식도로 내리쳤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오리의 목이 싹둑 잘렸다.
2
“천의맹 놈들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백하에 왔다고?”
“예, 단주. 아직 만나려는 자들이 누군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들의 대화로 봐서는 내일이나 모레쯤 만날 것 같습니다.”
등가위는 나기응의 보고를 받고 미간을 좁혔다.
“천의맹이 왜 백하에서 사람을 만나려는 거지?”
옆에 있던 조양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은명 살해사건을 조사하는 놈들 같습니다. 일단 놈들이 누구를 만나려 하는지 알아본 후 제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놈들이 이곳에서 죽은 게 알려지면 천의맹이 대대적인 조사를 나올 것이다. 그럼 일이 고약해질 수가 있어.”
“제거하는 것은 백하를 벗어난 다음에 하겠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흔적을 지운다면 천의맹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등가위는 조양경을 바라보았다.
“곧 대공께서 움직일 것이다. 서툰 행동으로 대공의 뜻에 누가 되면 안 되니 모든 일에 조심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때였다. 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주께 아룁니다. 천궁전의 대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가위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방 밖을 향해 말했다.
“선우가 왔다고? 안으로 모셔라.”
곧 문이 열리고 공손선우가 세 사람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등 숙부?”
“허허허, 이게 누구야? 조카가 천을 나오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아버님께 졸랐지요. 신마성이 움직이면 천하가 격동할 터, 앉아서 전해오는 소식만 듣기에는 제 피가 너무 젊지 않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군.”
“맡으신 일을 잘 처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다.”
공손선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등가위는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을 듣자 분노가 가슴 저편에서 끓어올랐다.
“그 일에 대해선 아직 대공께 말씀드리지 않은 게 하나 있네.”
“예?”
“상관경의를 처리하기는 했는데 그와 함께 있던 놈을 놓쳤네.”
“하하하, 전 또 무슨 큰일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야 어쩔 수 없지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상관경의와 함께 있던 놈은 보통 놈이 아니었다. 자신과 천응단을 혼자서 농락하고 도망친 놈이 아닌가.
그러나 등가위는 풍천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자존심 상하는 일까지 말해야 했다.
‘하긴 내 임무는 상관경의를 죽이는 것이니까…….’
그때 공손선우가 물었다.
“밖에서 들으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입니까?”
등가위는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하고 화제를 돌려서 천의맹 무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공손선우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입술 끝에 조소를 베어 물었다.
“제가 그 일을 한번 맡아보면 어떻겠습니까?”
“조카가?”
“어차피 세상에 나왔으니 천의맹에도 가볼 생각인데, 잘하면 천의맹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등가위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그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제거하는 것보다 이용하는 것이 병법에서 상책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좋아, 그럼 그 일은 조카에게 맡기지.”
공손선우는 온기 없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기응을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소.”
“존명!”
3
해동산과 같은 방을 쓰던 풍천은 몽유병 환자처럼 스르르 상체를 일으켰다.
백하촌 자체가 수상하다는 걸 잘 아는 그는 이원심법을 펼치며 잠을 자는 중이어서 감각은 깨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깨어 있는 감각에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진 것이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 고개를 흔든 풍천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천풍심법으로 정신을 맑게 한 후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의 움직임은 유령과 같아서 해동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쯔쯔쯔, 살수가 저렇게 감각이 무뎌서야 원. 여태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하네.’
풍천이 해동산을 돌아보며 속으로 혀를 찰 때였다.
부들부들 떨던 해동산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누, 누구……?”
응? 제법인데?
풍천은 뜻밖의 모습을 보고 해동산에 대한 판단을 보류했다.
“쉿. 나요, 해 형.”
해동산은 침상 아래 서 있는 풍천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어딜 가려고 그러는가? 아니, 혹시 무슨 일 없었나?”
풍천은 시미치를 딱 떼고 해동산에게 물어보았다.
“왜 그러는 거요?”
“느낌이 이상했네. 꼭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지. 전에도 이런 느낌이 들면 반드시 무슨 일이 벌어지곤 했었다네. 동생이 죽을 때도 그랬고 저번 장 어르신과 함께 호가장에 갔을 때도 그랬고…….”
‘호오, 그거 특이한 감각이군.’
풍천은 그제야 해동산을 새롭게 보며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런 감각을 가졌다면 그만큼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니까.
“해 형은 여기서 쉬고 있으쇼. 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올 테니까.”
“그러겠나? 느낌이 안 좋으니 조심하게.”
“내 걱정은 마시고 혹시라도 급박한 일이 벌어지면 즉시 전력을 다해서 이곳을 빠져나간 다음 천풍장으로 돌아가쇼. 알았죠?”
“알겠네.”
“그럼 다녀오죠.”
풍천은 형을 위해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동생처럼 빙긋 웃으며 해동산에게 감동을 주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등 뒤에 대고 해동산이 말했다.
“별일 없으면 올 때 술이나 한 병 챙겨오게. 이상하게 술이 마시고 싶군.”
그런 건 알아서 갖다 먹지 말이야.
‘사람들이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 잘해주면 고마워하기보다 부려먹으려고만 한다니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매몰차게 인상 쓰기도 어정쩡한 상황.
“한번 알아보죠.”
대충 대답한 그는 방문을 남들 들으라는 듯 덜컹거리며 열고 밖으로 나갔다.
풍천이 밖으로 나오는 걸 보고 접근하던 자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객잔의 일층으로 내려가는 풍천을 따라서 움직였다.
풍천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일층 탁자에 앉았다. 그때 강매설과 황보안이 방을 나오다가 마주쳤다.
“강 소저, 쉬지 않으시고 무슨 일로……?”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운기만 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저 사람이 나오는 것 같아서 무슨 일인가 싶어 나온 거죠. 그런데 황보 공자야말로 왜 나오셨어요?”
“저도 저자 때문에 나온 거요. 뭐 기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한번 내려가 봅시다.”
송구는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도 나가지 않았다. 꼴 보기 싫은 풍천과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편했다.
송구와 함께 있던 명진은 황보안과 강매설 사이를 방해하기 싫어서 나가지 않았고, 대주는 오랜만에 느낀 금강반야공에 심취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아 엉덩이도 떼지 않았다.
결국 객잔의 일층 탁자에는 세 사람만이 마주 앉았다.
“술 생각 때문에 나온 거요?”
황보안이 풍천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풍천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차나 한 잔 마시고 싶어서 나왔죠. 괜히 저 때문에 두 분만 잠을 깬 것 같군요.”
강매설이 고개를 저었다.
“자고 있지 않았으니 깨운 것도 없어요.”
“시간 났을 때 좀 주무시지. 나중에는 자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무슨 말이죠?”
풍천은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그 웃음이 두 사람을 더욱 깊은 의혹으로 몰아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객잔의 문이 열리고 짙은 감색 무복을 입은 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제법 큰 키에 균형이 잘 잡힌 몸, 나이는 서른 전후로 보였는데 제법 강한 기운을 지닌 자였다.
풍천은 그가 무기를 차지 않았다고 해서 절대 얕보지 않았다.
‘지미, 저놈도 천외천 놈인가?’
상관경의보다는 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진호량이나 조양경보다는 강하게 느껴졌고, 등가위와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감색 무복의 사내, 공손선우는 풍천이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갔다. 그리고 일 장가량 떨어진 곳에 서서 포권을 취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천의맹의 무사들을 보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공손선우라 합니다.”
황보안과 강매설이 마주 포권을 취했다.
“황보안입니다.”
“강매설이에요.”
“이거 밤늦게까지 객잔의 문이 열려서 술 한잔하려고 왔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공손선우는 밝은 표정으로 말하고는 풍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풍천은 그의 이름을 듣고 놀라서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상관경의를 업고 도주할 때 대공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는데, 그때 들은 이름이 상대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가 대공의 아들?’
그런데 공손선우의 눈에는 그 표정이 뭔가 못마땅한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대화하는 것을 방해했나 보군요.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풍천은 손사래를 치며 강매설의 옆자리, 자신의 정면을 가리켰다.
“중요한 이야기하던 것도 아닌데요 뭐. 이리 앉으쇼.”
“공손선우외다.”
“대풍입니다.”
풍천은 씩 웃으며 가명을 말해주었다.
눈앞에 백초령을 납치해간 공손천우의 사촌형이며, 대공인 공손무백의 아들, 공손선우가 앉아 있다.
운명처럼!
‘술 마시러 온 놈이 왜 사람들을 숨겨놓는 거야? 흥, 무슨 마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는지 몰라도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대천의맹 분들을 이런 외진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공손선우가 자리에 앉더니 사람 좋은 표정으로 말하자, 황보안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반겨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공손 형도 여기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