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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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67화
167화
“십정을 모아야지.”
“십정은 뭘 뜻하는 겁니까?”
“공손 시주가 말해주지 않던가?”
“하필이면 떠나올 때 그 양반이 다쳐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죠. 말해주기 싫으면 말하지 마십쇼. 비밀을 듣는 것은 저도 부담되니까요.”
공각은 알아도 상관없다는 듯 순순히 입을 열었다.
“십정은 천하에 흩어져 있는 열 사람을 말하네. 나도 그중 하나지.”
“나머지는 누구누군데요?”
“그건 말할 수 없네.”
풍천은 더 묻지 않았다. 억지로 물어서 알아봐야 자칫 엉뚱한 일에 말려들지 몰랐다. 정 알고 싶으면 나중에 공각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만 파악하면 될 것 아닌가.
“어디로 가실 겁니까?”
“일단 화산에 가봐야 할 것 같군.”
“천의맹에 말 좀 통하는 사람 있습니까?”
“한 사람 있네.”
“대사님이 말하면 듣습니까?”
“들을 거네. 어디 부러지고 싶지 않다면.”
힐끔 공각을 쳐다본 풍천은 그에게 한 가지 일에 대해서 부탁했다.
“그럼 그 사람에게 추마당의 강매설을 만나서 그녀가 조사하는 일을 좀 도와주라고 해주십쇼.”
“나중에 곡주 열 병을 사겠다고 약속하게. 그럼 확실하게 처리해주지.”
‘땡중의 탈을 벗었다고 아예 대놓고 말하는군.’
어쨌든 그 정도라면 부담될 것도 없었다. 조금 비싼 술이라 해도 공손무헌에게 돈을 받을 때 더하면 될 테니까.
“사드리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숭산 아래에 도착해 있었다.
풍천은 그쯤에서 공각과 헤어지기로 했다.
“그럼 다음에 뵙죠.”
“그런데 시주 이름은 뭔가?”
‘빨리도 묻네.’
풍천은 자신의 가명을 알려주면서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대풍입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십쇼. 아직은 제가 공손 대협과 함께 일하는 것이 비밀로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지. 아,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나?”
“뭔데요?”
“은자 열 냥만 빌려주게.”
풍천은 정확히 셋을 셀 동안 생각해보고 은자 열 냥을 꺼내줬다. 그 돈도 역시 공손무헌에게 받으면 될 것이었다.
‘이자까지 스무 냥만 받아야지.’
3
천풍장으로 돌아온 풍천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떠나기 전 초웅과 장 노인, 황 노인도 일단 단천무령으로 임명하고 철패를 하나씩 선물했다.
사람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천무령이 되면 한 달에 은자 이십 냥이 지급되었다. 이유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가 단천무령의 임시 거점으로 지정한 천풍장을 지키도록 했다.
공손이향 등은 풍천의 속셈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느낌상 아는 척하며 토를 달아봐야 좋은 꼴 못 볼 것 같았다. 어차피 자기들 돈 나가는 것도 아니고.
풍천은 간단하게 은자 육십 냥의 고정 수입을 마련하고 장 노인에게 말했다.
“장 노인, 몸이 나으면 선가장에 가서 노마 좀 데려오쇼. 그놈, 그곳에다 씨나 뿌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장 노인도 당분간 상당한 금액의 고정 생활비가 생겼다는 것과 비슷한 나이의 친구가 생겼다는 것에 흡족해서 즐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걱정 마십쇼, 공자. 놈이 안 오려고 버티면 제가 모가지를 끌고 오겠습니다요.”
“흠, 그럼 대충 할 말이 끝났나?”
풍천은 마치 중요한 회의라도 한 것처럼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맺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이제 회남으로 가죠.”
악진표와 이곡, 허무정은 벌떡 일어나서 방을 나왔다.
반가운 말이었다. 풍천이 없을 때와 있을 때는 기분이 천지차이였다. 풍천이 온 이상 눈칫밥 먹으며 천풍장에 머무르느니 밖으로 나가서 움직이는 게 나았다.
풍천은 그들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천외천 사람들도 그렇고, 다들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 보니 다행이군. 게으른 사람이 있으면 짜증 나는데.’
흐뭇한 웃음을 지은 그는 공손이향을 바라보았다.
“공손 소저는 너무 전면에 나서지 마쇼. 다치면 안 되니까.”
“걱정 말아요. 저도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니까요.”
공손이향이 강하다는 것은 풍천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강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온갖 귀계가 난무하는 강호에서 살아가려면 무공만 강해서는 안 되었다.
“좌우간 조심하쇼. 강호란 항상 등 뒤를 경계하고 살아가야 하는 곳이니까.”
공손이향은 그런저런 이유를 떠나서 풍천이 자신을 걱정해주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4
정오의 태양이 중천에서 꺾어질 무렵이었다.
적련방의 중심부에 있는 대련전으로 구룡회를 중심으로 한 안휘와 하남, 강소의 중소문파 주인들이 부산하게 모여들었다.
모두 서른 둘. 그들은 암묵적으로 정해진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구룡회 오대세력 중에선 경천산장의 주인인 곽진양만 보이지 않았고 대신 숭무당주 곽인효가 앉았다.
자리가 채워지자 대전의 문이 닫히고, 직후 기다란 원목탁자를 내려친 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쾅!
뒤이어 고성이 터져 나왔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지 닷새가 지났소이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회의만 하고 있을 것이오? 놈들이 완벽하게 전력을 정비할 때까지 기다리실 생각이오?”
서른한 쌍의 눈이 입을 연 자를 향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커다란 체구를 지닌 중년인. 나이가 쉰 전후로 보이는 그는 다름 아닌 천붕성의 주인이자 오제 중 하나, 천붕도제(天崩刀帝) 탁능한이었다.
담청은 눈매를 좁히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에 제동을 거는 탁능한이 마뜩지 않았다.
“아직 준비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지금 당장 저주로 쳐들어가잔 말씀이시오?”
“당장 쳐들어가지는 않더라도 놈들을 압박해서 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소?”
몇 사람이 탁능한의 말을 지지했다. 대부분이 남부와 강소문파의 주인들이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러다 놈들이 정원(定遠)까지 진출하면 상황이 더욱 어렵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강소 쪽을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정원 정도에 놈들을 견제할 거점을 구축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질 즈음 한 사람이 탁자를 두들겨 소란을 잠재웠다.
탁, 탁, 탁.
“모두 진정들 하시오.”
흑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오십 대 중반의 초로인은 좌중이 조용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동백산 검각의 주인인 동백검웅(東柏劍雄) 구양곤이었다.
“담 회주의 신중론도 충분히 이해가 가오만 탁 성주의 말씀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보오. 신마성이 전력의 반을 쏟아부어서 금천문과 삼도맹을 무너뜨리고 장강을 넘었는데 언제까지 이곳에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니 정원으로 가든 명광으로 가든 빨리 결정해서 움직이는 게 좋겠소이다.”
사람들이 다시 한번 웅성거렸다.
담청은 구양곤마저 이동을 주장하자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그때 백무천이 그에게 물었다.
“담 회주, 남궁세가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까?”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웅성거림 속에서도 뚜렷하게 들렸다.
남궁세가의 이름이 나오자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졌다.
담청이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전격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는 것 같소이다. 신마성이 천의맹은 건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지…….”
“그럴 거였다면 신마성이 장강을 넘지도 않았겠지요. 좌우간 남궁세가가 미적거린다면 더 망설일 것 없이 우리가 먼저 움직입시다.”
백무천은 이동의 이유를 남궁세가의 미온적인 태도에 전가시켰다. 담청의 생각이 잘못 된 것은 아니지만 남궁세가의 태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동하는 것처럼.
담청은 그 속내를 알고 고맙다는 듯 백무천을 향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의 뜻이 그렇다면 본 방주 역시 반대하지 않겠소이다. 본방의 지파인 정원의 부가장을 구룡회의 임시 총단으로 삼을 것이니 내일 아침에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주시오!”
마침내 사흘간 끌어온 총단의 이동이 결정 나자 군웅들은 당장 신마성과 대치하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이 상기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대전의 문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문 양쪽에 서 있던 무사 중 하나가 문을 열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인가?”
하지만 곧 그는 뭔가를 전해 받고 담청이 있는 상석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담청은 무사의 손에 들린 게 서찰임을 알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온 건가?”
“남궁세가의 전령이 가져왔다고 합니다, 방주!”
순간 대전 안의 군웅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수군거렸다.
담청은 서찰을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펼쳐보았다. 빠르게 서찰을 읽어본 그는 고개를 들고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남궁세가에서 무사를 일부 파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의맹에서도 우리 구룡회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무사들을 보낼 생각인 것 같습니다.”
구양곤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거 잘됐구려. 천의맹도 이번 신마성의 공격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했나 보오.”
탁능한도 대소를 터트리며 반겼다.
“하하하, 신마성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줍시다!”
백무천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천의맹에서 당장 대단위 무사단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나 보탬이 될지 아직 확실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패천 중 하나인 천의맹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순수한 의도로 움직였냐는 것이겠지.’
백무천의 눈빛이 깊숙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아는 것이다. 순수한 의도가 변질되었을 때의 무서움을. 향기가 악취로 바뀌었을 때 더 독기를 뿜어낸다는 걸.
‘그들이 만약 타의에 의해서 움직였다면 신마성의 위협보다도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그는…… 그게 두려웠다.
4
풍천 일행이 회남으로 향할 무렵.
공손량은 천상궁으로 찾아온 공손무백을 분노의 눈길로 노려보았다.
공손무백은 무심한 눈으로 공손량의 눈빛을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안휘로 갈까 합니다. 밖의 일은 저에게 맡기시고 아버님께선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십시오.”
“다시 한번 말하마. 신마성을 처리하는 일은 이미 계획했던 것이니 이러쿵저러쿵하지 않겠다. 하나 본천을 세상에 공개적으로 드러내선 안 되느니라.”
“죄송합니다, 아버님. 신마성의 무력이 예상보다 강해서 본천을 감춘 채 암중으로 저들을 상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해서 저는 이 기회에 본천의 위대함을 만천하에 알릴 겸 공개적으로 저들을 토벌할 생각입니다.”
“네가 정녕 이 애비의 말을 무시하고 고집을 피울 셈이더냐?”
“제가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닙니다, 아버님. 본천의 사람들 대부분이 원하는 일입니다.”
“대부분이 원한다고?”
“그렇습니다. 그 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버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천상선원의 장로들뿐입니다. 본천의 인원 중 일 할에 불과할 뿐이지요. 게다가 장로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저의 뜻을 지지하고 있으니 실질적으로는 더 적을 것입니다.”
“그 인원으로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냐?”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끝까지 반대하면 나와 장로들도 무헌이처럼 죽이려 할 생각이냐?”
“무헌이 일은 제가 손을 쓴 것이 아닙니다.”
“그래, 네가 직접 손을 쓴 것은 아니지. 사유를 움직였을 뿐이니까.”
“사유는 천주의 명령만을 듣는 사람들이란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공손량은 참담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아, 내가 너를 이리 키웠으니 누굴 원망할 수 있으랴.”
공손무백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는 소자를 자랑스럽게 여기실 겁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공손량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가봐라. 네 말대로 이 애비의 남은 힘으로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잖느냐? 그러니 앞으로는 더 찾아올 것도 없다.”
공손무백은 몸을 일으키고 무심한 어조로 몇 마디 더했다.
“소자는 패륜을 저지른 아들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아들이 될 것인지는 아버님께 달려 있으니 부디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으셨으며 합니다.”
공손량은 입을 꾹 다문 채 주름진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공손무백이 몸을 돌려서 나갈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공손량이 눈을 뜬 것은 공손무백이 나가고 방문이 닫힌 후였다.
‘결국 무헌이가 말한 대로 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움켜쥔 의자 손잡이가 가루로 부서지며 손아귀에서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