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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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66화
166화
허무정이 황 노인이라고 하면서 함께 왔다고 할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황우연.
풍천이 그를 몰라본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머리가 수세미처럼 흐트러져 있어서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를 깨끗하게 묶고 옷을 갈아입어서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거기다 그동안 잘 먹었는지 살짝 살도 올라 있었고.
“허허허허, 잘 있었나?”
허무정과 황우연은 악진표와 이곡, 공손이향과 인사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천풍장에 있는 사람들이 참 별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진표는 입술이 터져 있고 얼굴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특히 한쪽 눈은 시커멓게 멍들어서 영락없이 족제비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곡은 대나무처럼 빼빼 마른 데다 키도 작아서 이런 사람이 정말 자신과 함께 일할 정도의 실력이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허무정은 공손이향을 보고는 숨을 멈췄다.
마치 조각가가 눈을 뭉쳐서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여인이 있다니!
‘정말 특이한 사람들만 모아놨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도 자신이 특이하게 생긴 사람 중의 하나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반면 황우연은 공손이향보다 초웅을 보고 눈을 떼지 못했는데 무엇 때문인지 그의 움켜쥔 주먹에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이놈……! 진짜 물건이다!’
풍천은 그들이 인사를 나누자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인사들 나눴으면 안으로 들어가죠.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말해줄 게 있으니까.”
2
풍천은 안휘로 가기 전 공손무헌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소림사에 다녀오기로 했다.
“소림사에 다녀올 동안 여기 머물고 있으쇼.”
사람들 대부분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풍천을 쳐다보았다.
소림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것은 아닐 터. 해결사가 소림사에는 웬일로 가는 걸까?
풍천은 사람들이 의문의 눈길로 쳐다보자 간단하게 이유를 말해주었다.
“부처님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 가는 거요. 됐수?”
그렇게 천풍장을 떠난 풍천은 곧장 숭산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하루 반 만에 숭산에 도착해서 소림사로 올라갔다.
향냄새가 가득한 사찰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대부분이 불공을 드리러 온 불자들이었고 불자들 사이를 스님들이 오가고 있었다.
소림사는 정파의 태산북두이며 당금 천의맹의 맹주를 배출한 곳. 당연히 무사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소림사 경내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천불전 앞에 선 풍천은 오가는 승려들 중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는 중년승을 붙잡고 공각대사가 사는 곳을 물어보았다.
“공각대사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죠?”
멈칫한 중년승은 풍천을 재빨리 살펴보고는 왠지 모르게 꺼려하는 표정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보십시오, 시주.”
풍천은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서 다른 승려를 붙잡고 물었다. 그 승려도 비슷한 대답을 했다. 역시나 께름칙한 표정으로.
“저쪽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시주.”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같은 경우가 다섯 번 반복되자 슬슬 짜증이 났다.
더구나 이리저리 오가다 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까지 온 상태였다.
‘탑이라도 하나 부숴버려? 아님 불전 기둥이라도 하나 뽑아?’
그럼 사람이 많이 나오겠지?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답해주지 않겠어?
풍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쪽에 작은 불당이 하나 있을 뿐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부술 만한 탑도 없었다.
불당을 바라보던 풍천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 불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는 부처님이 앉아 있었다.
그는 옆구리에 척 손을 얹고 부처상을 꼬나보며 구시렁거렸다.
“이보쇼, 부처님! 공각대사님이 어디 계신지 아쇼? 소림사에 계신 부처님이면 다 알 거 아뇨?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저기 있다거나 저쪽으로 가라거나 하지는 마쇼. 열 받으면 확 머리를 들이받을지 모르니까.”
그때 부처상이 되물었다.
“공각은 왜 찾나?”
“응?”
깜짝 놀란 풍천은 부처상을 쳐다보았다.
부처상은 여전히 잔잔하게 웃고 있을 뿐 입을 벌린 흔적이 없었다.
그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넌지시 물어보았다.
“정말 부처님이 말씀하신 거요?”
그때였다.
“흘흘흘, 꽤나 웃기는 시주구먼.”
풍천은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처상 뒤에서 허리가 굽은 노승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거긴 왜 들어가 계셨습니까? 정말 부처님이 대답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쇳덩이가 어떻게 말을 해?”
승려들은 부처상을 돌덩이니, 쇳덩이니 하면 화를 내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저 노승은 거꾸로 부처상을 쇳덩이라고 하지 않는가.
‘늙어서 노망이 드셨나?’
그런데 풍천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노승이 핀잔을 주었다.
“왜, 노망난 늙은이처럼 보이는가?”
‘귀신이네.’
흠칫한 풍천이 입을 꾹 다물고 쳐다만 보자 노승이 풍천의 앞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그래, 정말 노망든 공각은 왜 찾는 건가?”
“어디 있는지 아슈?”
“아니까 묻지.”
“누가 뭔 말 좀 전해달라고 해서요. 근데 그분이 정말로 노망들었습니까?”
“흘흘흘, 제 옆에 부처가 있는 줄도 모르고 수십 년 동안 엉뚱한 꿈이나 꾸고 있으니 노망든 것은 확실하지.”
“그래도 일단 말씀을 전해야 하니 어디 계신지나 알려주십쇼.”
노인은 힐끔 풍천을 올려다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안쪽에 대고 말했다.
“공각아, 젊은 시주가 할 말이 있단다. 나와봐라.”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풍천은 의심스런 눈으로 노승을 째려보았다.
“정말 저 안에 공각이란 스님이 있긴 있는 겁니까? 거짓말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거 모르진 않겠죠?”
그렇게 사람 좋은 인상이던 노승이 하얀 눈썹을 역팔자로 꺾고는 소맷자락을 걷어올리며 부처상 뒤로 돌아갔다.
“이놈이 또 대낮부터 퍼질러 자나 보군. 사부는 청소하고 있는데 제자는 잠이나 자다니. 내가 빨리 죽어서 부처 곁으로 가야 저 꼴을 안보지. 쯔쯔쯔…….”
풍천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혼란을 겪었다.
‘공각’은 소림의 장문인 공운대사와 천의맹주 공지대사처럼 공자 항렬이다. 그런 사람의 사부라면 ‘요’자 항렬이라는 말. 그런데 소림에 몇 안 남았다는 요자 항렬의 노승이 왜 사미승하나 없이 스스로 청소를 하는 걸까?
혹시 만나라는 사람이 공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아닐까? 자신이 법명을 잘못 들은 것 아닐까? 그리고 부처를 모시는 노승이 왜 저렇게 말을 사납게 하는 거야?
이런저런 의문을 품은 채 망설이고 있을 때 노승이 한 사람의 귀를 잡아당기며 끌고 나왔다.
풍천은 노승에게 끌려나온 중년승을 보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이는 사십 대 초반쯤?
쇳덩이처럼 단단하게 보이는 커다란 체구에 거무스름한 얼굴. 눈은 호랑이 눈처럼 크고 코는 메주를 대충 주물러서 붙여놓은 것 같았다. 거기다 입술은 어찌나 두껍고 큰지 누구에게 맞아서 퉁퉁 부은 듯했다.
승복을 벗기고 시커먼 무복을 입히면 흑도무사들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형님으로 모실 것 같은 인상.
그게 풍천이 공각을 본 첫인상이었다.
‘어쩐지, 승려들이 꺼려하는 표정으로 마지못해서 대답하더라니.’
풍천은 공각을 보자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노승이 중년승을 풍천 앞으로 확 밀어냈다. 겉보기보다는 제법 성깔이 있는 노승이었다.
“흘흘흘. 자, 데려왔네. 이제 할 말이 있으면 해보게나.”
중년승은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자신의 낮잠을 깨운 풍천을 노려보았다.
“시주가 날 만나러 왔다고 했수?”
그래도 목소리 하나는 죽여주게 중후했다. 말투가 조금 투박해서 탈이지.
저런 사람에게 솥단지 열 개를 모으라고 하면 밥그릇 수나 셀 것 같다.
“저, 아무래도 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군요. 정확히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풍천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노승이 다시 풍천의 발길을 붙잡았다.
“이보게, 시주. 공각을 찾아왔다며? 저놈이 진짜 공각이라니까?”
“아 예, 법명은 맞는데 제가 찾는 분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죠.”
“그래? 그럼 어떤 공각을 찾는데?”
풍천은 살짝 말을 돌려서 대답했다.
“솥단지 열 개를 모을 수 있는 분을 찾거든요.”
“솥단지 열 개? 허, 별 실없는 시주를 다 봤군. 땡중들만 사는 절에서 솥단지를 왜 찾아? 그것도 열 개나.”
노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중년승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이 굳어지고 두 눈에서 기광이 일렁였다.
“지금 십정(十鼎)이라고 했는가?”
풍천은 그가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자 살짝 기분이 상해서 말투가 조금 까칠해졌다.
“밥하는 솥을 말하는 게 아니니 스님은 신경 끄쇼.”
“나도 밥하는 솥을 묻는 게 아니네. 욕망을 담을 수 있는 솥을 말하는 거지. 그런데 시주가 어떻게 십정을 아는 거지?”
풍천의 고개가 모로 꼬였다.
정말 저 시커먼 중이 공손무헌이 만나라는 사람인가?
그러고 보니 제법 강한 기운이 중년승의 몸속에서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오호라, 기운을 완전히 가두고 있었던 건가?’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강자라는 말.
공각에게 흥미가 동한 풍천은 자세를 바로 하고 공각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내가 알면 안 될 거라도 있수?”
“안 될 것은 없지. 대신 그만한 책임도 져야 할 거네.”
중후한 목소리로 말하는 공각의 호랑이 눈에서 은은한 금빛 광채가 번뜩였다.
‘흠,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 것 같군.’
확신을 가진 풍천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전음으로 말했다.
[긴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니까 간단히 말하죠. 삼산의 잠룡이 기지개를 켰으니 십정을 모으랍디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아, 미, 타, 불.”
공각은 눈을 질끈 감고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불호를 외웠다.
그때까지 아무 말 않고 불당 밖에 서 있던 노승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공각을 바라보았다.
“흘흘흘, 그놈. 이제 부처님 곁을 떠날 것 같은 표정이군.”
공각은 몸을 돌리더니 불당 밖으로 나가 사부인 요선대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어쩌겠느냐, 그게 네놈이 택한 업보거늘.”
“제가 지옥에 가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생각입니다.”
“부처께서도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갈 것이냐? 하셨지. 고약한 놈. 네놈은 욕심도 많게 부처가 되고 싶은가 보구나.”
“미련한 제자가 어찌 그런 욕심을 품겠습니까?”
“지옥에는 가되 부처가 되고 싶은 욕심은 없다? 그럼 오늘부로 너를 파문할 것이다. 소림은 지옥을 좋아하는 놈이 있을 곳이 아니니라.”
풍천은 깜짝 놀라서 요선대사와 공각을 번갈아 보았다.
정파의 제자에게 있어 파문은 곧 죽음과도 같았다. 하거늘, 말 몇 마디 때문에 파문을 하다니. 그는 요선대사가 너무한다는 생각에 넌지시 공각을 변호하려 했다.
“노선사님, 굳이 그럴 것까지는…….”
그런데 괴이하게도 공각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습니다, 사부님.”
“고마워할 것 없다. 정말 지옥에 갈 자신이 없으면 돌아와도 안 받아줄 것이니 그리 알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요선대사는 바닥에 엎드린 공각을 감회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몸을 돌려서 불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그만 가봐라. 벌써부터 네 몸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공각은 머리로 바닥을 내리치며 작별인사를 했다.
“제자가 돌아올 동안 평안하소서!”
풍천은 공각과 함께 소림사의 담을 넘었다.
누가 보면 도둑 취급할지 몰랐지만 공각이 그걸 원해서 어쩔 수 없었다.
“소림에도 천외의 사람이 있네. 그래서 그런 것이니 이해하게나.”
공각은 산을 내려오며 그렇게 말했다.
풍천도 능히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공각의 말을 수긍했다.
“이제 뭘 하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