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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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63화
163화
다행히도 모르는 자였다.
‘휴우우우.’
풍천은 내심 안도하며 이곡에게 그자를 다시 땅에 묻으라고 했다. 그리고 공손이향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자신의 방으로 갔다.
방 안으로 들어간 풍천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설마?’
그는 유등잔이 있는 곳으로 가서 등잔 밑에 있는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침상을 옆으로 밀어냈다.
묵직하게 보이던 침상이 옆으로 밀려나자 그는 벽에 장식처럼 매달려 있던 줄 다섯 개 중 가운데 있는 세 개를 한꺼번에 잡아당겼다.
벽이 옆으로 돌면서 밑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드러났다. 천풍문의 지하 수련장으로 내려가는 통로였다.
풍천은 등잔에 불을 붙여서 들고 한숨이 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지하로 내려갔다. 제법 큰 숨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마치 곰이 숨을 쉬는 것처럼.
“초웅, 거기 있냐?”
“형!”
초웅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커다란 칼을 든 초웅이 수련실로 통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초웅이 그를 보더니 눈을 부릅뜨고 칼을 쳐드는 게 아닌가.
“누, 누구냐!”
풍천은 그제야 인피면구를 떠올렸다.
“형이라니까. 잠깐만 기다려.”
풍천은 등잔을 한쪽에 내려놓고 품속에서 노란 액체가 든 병을 꺼냈다. 그리고 노란 액체를 목 부분에 바르고는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인피면구를 벗었다.
아직 남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면 안 되는 상황. 나중에 또 사용해야 하는데 며칠 동안 벗지 않아도 부작용이 없는 특상품 인피면구를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인피면구를 벗자 초웅이 칼을 내리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혀어어엉!”
풍천은 씩 웃어주고는 초웅의 옆을 바라보았다.
장 노인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수련실로 들어가는 문에는 기관장치가 되어 있었는데 장 노인도 그것까지는 열지 못한 듯했다.
“오셨수?”
힘없는 목소리. 장 노인은 어깨와 다리를 천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하얀 천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는 걸 봐서 상처가 제법 큰 듯했다.
풍천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부상 정도를 살펴보았다.
내상을 입긴 했는데 다행히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뼈가 부러진 곳도 없는 것 같고.
“어떻게 된 거죠?”
“이틀 전 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 습격했습죠.”
“장 노인이 상대하기 힘들 만큼 고수였어요?”
“크크크,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제법 강했습죠. 하지만 천의맹 놈들에게 당하지만 않았어도 그깟 놈들은 한쪽 눈 감고도 죽였을 겁니다요.”
풍천은 해동산이 보이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해 형은 어디 갔죠?”
“그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죠. 천의맹 놈들이 쫓아갔는데 당하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요.”
그들에게 당하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 풍천이 잘 안다. 돌아오다가 무슨 일이 있었다면 또 몰라도.
풍천은 해동산이 남창으로 도망치려는 마음을 가진 줄도 모르고 그의 안전을 걱정했다. 꼭 그에게 준 이십 냥이 아까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바로 돌아가라고 했더니 어딜 간 거지?’
좌우간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고, 일단은 눈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신경을 써야 할 판이다.
“초웅, 다친 곳 없어?”
“장 할아버지가 막아줘서 나는 괜찮아.”
그때 장 노인이 실실 웃으며 초웅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공자, 어디서 이런 놈을 구했수?”
“쓸 만하죠?”
“쓸 만한 정도가 아닙니다요. 어릴 때 무이산에서 커다란 삼을 캐 먹었다는데 그동안 그 기운이 뭉쳐 있다가 공자가 가르쳐 준 내공심법을 익힌 후로 녹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요.”
“그래요?”
그래서 흑서귀의 내가장력에 맞고도 버텼던 건가?
풍천은 새삼스런 눈으로 초웅을 바라보았다.
“정말 삼을 캐 먹었어?”
초웅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애기처럼 생긴 삼이었는데 내 팔뚝만 했어. 배고파서 다 먹었더니 뱃속에서 불이 나지 뭐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잠들었는데 산채의 할아버지가 찾아낼 때까지 칠 일이나 잤어.”
설마…… 동자삼?
그런데 초웅의 팔뚝만 하다면 대체 얼마나 크다는 거야?
‘복도 많네. 나도 금산에서 몇 개 캐 먹긴 했지만 제일 큰 게 겨우 한 치 굵기였는데.’
풍천은 입이 쩍 벌어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초웅의 맥문을 잡아보았다.
흐르는 기운이 전과 확실히 달랐다. 전에는 선천적인 기운뿐이었는데 지금은 제법 강한 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거, 일이 년이면 뭉쳐 있던 기운이 다 녹겠는데?’
풍천은 초웅의 곰처럼 커다랗고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 부러웠다.
‘금산을 다시 뒤져볼까? 큰 것이 어디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지금은 있지도 않은 영약을 찾겠다며 산을 뒤지고 다닐 때가 아니었다.
풍천은 초웅의 손을 놓고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초웅, 장 노인을 안고 나와라. 밖으로 나가자.”
“알았어, 형.”
2
위로 올라간 풍천은 자신의 침상에 장 노인을 눕혀놓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기다리던 공손이향과 이곡은 방에서 나온 풍천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습이나 행동은 영락없이 대풍인데 얼굴이 완전히 달랐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일. 풍천은 일단 그들에게 자신이 바로 그들이 알고 있는 대풍임을 알렸다.
“너무 놀라지 마쇼. 얼굴이 조금 달라졌다고 사람까지 달라진 건 아니니까.”
“허어, 정말 령주요?”
이곡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풍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공손이향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초령 언니가 좋아하는 것 같다 했더니…….’
공손이향은 전과 확연히 다르게 생긴 풍천을 보고 묘한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왜 얼굴을 바꾸고 지낸 거죠?”
“사정이 있어서 인피면구를 쓰고 지냈던 거요. 내 얼굴을 보면 죽이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당신들은 알아도 될 것 같아서 보여주는 거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쇼.”
“그럼 계속 얼굴을 가리고 지낼 거란 말인가요?”
“당분간은. 괜히 얼굴을 드러내서 불필요한 시비가 붙는 것보단 낫거든요.”
“대체 누가 령주에게 시비를 건단 말이죠?”
“신마성의 위태곤 같은 놈은 날 잡아먹지 못해서 난리죠.”
천외천도 자신이 유령총에 들어갔던 풍천임을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물론 언젠가는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겠지만 당장은 시기상조였다.
“좌우간 그렇게 알고 잠깐만 기다리쇼. 다친 사람이 있어서 치료를 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다시 방으로 들어간 풍천은 황보안에게 갈취하다시피 얻은 금창약을 이용해서 장 노인의 상처를 다시 손봐주었다.
“진짜 좋은 약이니까 덧나진 않을 거요.”
장 노인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의맹 놈들이 쓰는 구명산 같은뎁쇼?”
‘개코군.’
풍천은 장 노인의 코가 자신 못지않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보세가의 자식에게 얻은 거요.”
그는 해동산을 구한 상황을 간단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해동산을 천풍장으로 보냈다는 것도.
해동산에 대해 개인적인 어떤 생각을 품고 있던 장 노인은 풍천이 그를 구했다고 하자 내심 안도하며 이야기를 돌렸다.
“청부에 대한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요?”
“걱정할 것 없수. 놈들이 먼저 신의를 저버렸으니까. 이곳을 습격한 놈들도 어쩌면 그놈들일 거요. 놈들이 장 노인의 뒤를 밟아서 이곳을 알아낸 것 같거든요.”
장 노인의 눈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그래요? 으흥, 그렇단 말입죠?”
“덕분에 위약금은 물 필요가 없어졌죠. 선수금을 돌려줄 필요도 없고.”
“그건 잘됐군요.”
“놈들에게 받은 선수금은 앞으로 장 노인이 관리하면서 알아서 쓰쇼.”
살이 조금 심하게 찢어지긴 했지만 그 정도 상처에 황금 열 냥이면 손해본 것도 없다. 장 노인은 한동안 돈 걱정할 것 없다는 생각에 아픈 것도 잊었다.
풍천이 그렇게 큰돈을 자신에게 전격적으로 맡기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한데 굳이 의문을 표하진 않았다. 그럼 다시 뺏어갈지 모르니까.
“그렇게 합죠.”
풍천은 장 노인의 마음을 풀어주고 초웅을 바라보았다.
“덫은 네가 설치한 거냐?”
“어, 그놈들이 또 쳐들어올지 몰라서 내가 만들었어.”
‘곰 같은 놈이 재주가 제법이네.’
그런데 초웅이 웃으며 몇 마디 덧붙였다.
“정문에 경고문을 붙여놓으면 사람들이 담을 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도 혹시 몰라서 정문 위에다가도 하나 설치했어. 헤헤헤.”
그 덫에 하마터면 자신이 당할 뻔했다.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어도 큰 부상은 입지 않았겠지만 기분은 진짜 더러웠을 것이다.
그때 문득 경고문을 보고 들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경고문은 누가 쓴 거지?”
“내가.”
“네가…… 썼다고?”
“어.”
믿을 수 없었다. 용사비등까진 아니어도 나름 멋진 글씨였다. 그걸 저 곰 발바닥 같은 손으로 썼다고?
그런데 장 노인이 증인으로 나섰다.
“덩치는 곰보다 큰 놈이 손재주는 제법이지 뭡니까.”
아무래도 정말인가 보다. 그럼 또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다.
‘흠, 앞으로 서신을 쓰거나 문서를 작성할 때 초웅에게 쓰라고 해야겠군.’
풍천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초웅을 칭찬했다.
“그러고 보니 초웅 아우도 재주가 많군. 그래, 내가 가르쳐 준 도법은 착실히 익히고 있어?”
“어, 형. 이제 거의 다 익혔어. 한번 보여줘?”
초웅은 그 말을 하며 커다란 칼을 들어올렸다.
저 무식하게 큰 칼을 방 안에서 휘두른다고?
기겁한 풍천은 급히 초웅을 말렸다.
“아냐, 됐어. 네가 익혔다면 익힌 거지 뭐. 잘 모르는 것 있으면 장 노인에게 물어봐.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장 노인도 대단한 사람이거든.”
“안 그래도 장 할아버지가 몇 가지 가르쳐 줬어.”
“그래?”
풍천은 되물으며 슬쩍 장 노인을 바라보았다.
장 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니고 심심해서 가르쳐 줬습죠.”
눈빛을 보니 단순한 재주를 가르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제자로 삼으려고 그러나?’
장 노인이라면 초웅의 사부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럼 자신이 초웅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 풍천으로선 대환영이었다.
“초웅이 마음에 든다면 정식으로 가르쳐보시죠.”
“그래도 되겠습니까요?”
“안 될 것도 없죠. 초웅아, 사부님께 절을 올려라.”
멀뚱하게 서 있던 초웅은 풍천의 말이 떨어지자 철푸덕 엎어져서 장 노인에게 절을 올렸다.
“할아버지, 절을 받으세요!”
“초웅, 이제부터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사부님이야.”
“어, 형. 사부님, 제자의 절을 받으십시오!”
그런데 의외로 장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내 무공은 네 자질을 다 살릴 수 없다. 그러니 네 자질을 모두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사부로 모시도록 해라.”
“헤, 사실 나도 할아버지가 더 좋아요.”
풍천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한쪽에 걸터앉아 있던 이곡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공손이향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는데 방 안에서 들리는 말을 들었는지 묘한 표정이었다.
풍천은 그녀를 향해 씩 웃어주고는 이곡을 바라보았다.
“한 이틀 이곳에서 쉬고 떠나죠. 아무래도 사냥을 좀 해야 할 것 같거든요.”
청부를 한 놈들도 지금쯤 수하들이 죽었다는 걸 알고 있을 터. 오늘내일 사이에 더욱 강하게 공격해올 것이 분명했다.
‘이곳을 우습게 보고 있다면 굳이 내일까지 가지도 않을 거야.’
“또 공격이 있을 거라고 보시는가 봐요?”
공손이향이 다가오며 물었다. 풍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에 올지 몰라요.”
“어떤 자들인지 아세요?”
대답하는 풍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조금은. 오늘 이후로 누구든 천풍장을 건드리는 자들은 가만두지 않을 거요. 그게 누구라 해도.”
그때 초웅이 밖으로 나왔다. 이곡과 공손이향의 눈이 초웅을 향했다.
순진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초웅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형, 이 사람들은 누구야?”
“어, 형과 함께 온 사람들이야. 저쪽은 이곡이라는 분이고 이쪽은 공손이향이라고…….”
초웅의 눈이 풍천과 거의 붙다시피 서 있는 공손이향에게서 멎었다.
공손이향은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덩치의 초웅이 빤히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가 위로 올라가면서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우와, 정말 예쁘다.”
초웅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리치고는 풍천에게 물었다.
“형, 이분이 형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