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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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61화
161화
백초령은 생이별하는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풍천의 가슴에서 떨어졌다.
가슴이 허전해지는 느낌.
신마성에서 돈주머니를 잃어버렸을 때보다 몇 배나 더한 허전함이 찾아들자 풍천은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누구지 몰라도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그냥……!’
그때 누군가가 백초령의 방으로 황급히 다가왔다. 그리고 곧 백서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령아, 자니?”
백초령은 당황한 표정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내 걱정 말고 빨리 침상에 누워.]
풍천은 급히 전음으로 백초령을 안심시키고 그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백초령은 침상 위로 몸을 날리고는 금방 잠에서 깬 사람처럼 대답했다.
“으응, 언니? 왜 이렇게 밖이 시끄러운 거야?”
2
환신술을 펼쳐서 몰래 방을 나온 풍천은 나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침입자로 인해 방해를 받긴 했지만 어쨌든 백초령의 입술과 부딪친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에서 별이 반짝거릴 만큼 황홀했었다.
‘입안에 복숭아즙이 고여 있는 것 같았어. 흐으…….’
어쩌면 그래서 침입자가 더 괘씸했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조금 더 할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클수록 분노도 컸다.
‘대체 어떤 놈이 침입한 거지?’
바로 그때 그림자 하나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빠르게 흘러가는 게 보였다.
풍천이 그곳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뜨는데 그림자가 흘러가는 쪽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뒤이어 엄지손톱만 한 자갈 하나가 풍천과 삼 장가량 떨어진 지붕 위에 떨어졌다.
딱, 또르르르.
경비무사들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풍천이 있는 곳을 보며 소리쳤다.
“저쪽에서 소리가 났다! 수색해라!”
눈을 치켜뜬 풍천은 검향원의 담을 넘어서 사라지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저 여우 같은 놈이……!’
그는 순검당 무사들이 몰려들기 전에 숨어 있던 나무 그림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수상한 그림자가 사라진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잡히기만 해봐라!’
그림자의 움직임은 자칭 고금제일의 신법을 지녔다는 풍천조차 바로 쫓아가지 못할 만큼 빠르고 은밀했다.
‘어쭈 제법인데?’
풍천은 분노마저 잠시 제쳐두고 그림자를 쫓았다. 그리고 그림자가 신검문의 높은 담장을 막 넘어가기 전에 뒤를 따라잡았다.
“이보쇼.”
‘헉!’
도망치던 자는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급히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가 비록 강호에서 보기 드문 신법의 소유자라 해도 풍천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림자는 몇 번 방향을 틀고도 풍천을 떨치지 못하자 방법을 바꾸기로 작정했다.
쇠꼬챙이처럼 가느다란 검을 빼든 그는 홱 몸을 돌리고는 이 장 거리까지 따라온 풍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쉬이익!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뾰족한 검첨이 풍천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검이 풍천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는 걸 알고 급히 몸을 틀어서 풍천의 공격에 대비했다.
순간, 풍천의 천라신수가 그림자의 머리 위를 덮쳤다.
어둠 속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십여 개의 수영.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림자는 눈을 부릅뜨고 정신없이 검을 내뻗었다.
풍천은 검을 뽑지 않고 천라신수만으로 그림자의 쾌검을 파훼했다. 검이 부딪쳐 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까.
퍼버벅.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풍천은 그림자를 바짝 따라가며 양손을 휘둘렀다. 또다시 어둠 속에서 수영이 피어나며 그림자를 덮쳤다.
그림자는 갈지자로 물러서며 철저히 방어에 치중했다.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검을 뻗는 속도는 여전히 빨랐다.
‘가만? 저 검……?’
풍천은 공격하는 와중에도 상대의 쇠꼬챙이 같은 검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검이었다. 최근이 아니라 몇 년 전에.
‘누구더라?’
그런데 그때 신검문 무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냐?”
“누가 신검문 안에서 싸우는 거냐?”
움직임을 늦춘 풍천은 그림자를 노려보며 전음을 보냈다.
[따라오쇼. 도망갈 생각 말고.]
그러고는 자신이 먼저 담장을 넘어서 신검문을 빠져나갔다.
그림자는 코 꿰인 말처럼 풍천을 따라갔다.
가슴을 얻어맞은 충격이 커서 도망가봐야 얼마 못 가 잡힐 것 같았다. 공연한 짓을 하고 창피를 당하느니 따라가서 기회를 엿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풍천은 신검문의 담장에서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숲으로 들어가서 걸음을 멈췄다.
그림자는 풍천과 오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몸을 돌린 풍천은 달빛에 비친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나이는 서른 중반 정도? 대나무처럼 바짝 마른 몸매에 키도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당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지 알아!
풍천은 그자를 작신 두들겨 팬 후 그렇게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패 죽이는 거야 급할 것 없으니까.
“그 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누군지 정체를 밝혀보쇼.”
그림자는 잠시 망설였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솔직히 자신을 밝혔다.
“나는 이곡이라 하오.”
“이곡?”
풍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아, 맞아. 전쾌(電快) 이곡! 맞죠?”
그림자는 풍천이 별호를 대며 아는 척하자 뾰족한 검을 움켜쥔 채 바짝 긴장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강호의 친구들이 전쾌라 불러주는 이곡이오.”
이곡은 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신법에 관한한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무영신마와 만리신개라면 모를까 신법만으로 그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강호에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자신감이 무참하게 밟혀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자신감을 작신 밟아버린 풍천이 누군지 머리가 쪼개지도록 궁금했다.
“당신은 누구요?”
“잠풍이라고만 아쇼. 대풍이라고 불러도 상관없고.”
처음 듣는 이름. 말하는 투를 보니 아무래도 본명은 아닌 것 같다.
“신검문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신검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 단정은 짓지 마쇼.”
무슨 대답이 그따위야?
이곡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풍천이 물었다.
“근데 무슨 일로 신검문의 담장을 넘은 거요?”
이곡 때문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시간이 날아가지 않았는가.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받아낼 작정이었다.
물론 이곡은 그의 불만에 조금도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다.
“귀수괴의가 신검문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소.”
“귀수괴의? 평범한 병은 쳐다보지도 않고 죽기 직전의 환자가 아니면 손대지 않는다는 미친 의원 말이오?”
“그렇소.”
풍천은 고개를 모로 꼬며 이마를 좁혔다.
“그가 신검문에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나는 그를 찾기 위해서 삼 개월을 돌아다녔소. 그러다 며칠 전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 그가 이곳에 갔다는 말을 들었소. 지금도 있는지 그것까진 알 수 없지만…….”
“좌우간 그렇다 치고, 왜 그를 만나려고 하는 거요?”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있소. 온갖 방법을 다 써봤는데도 낫지를 않으니 그에게 한번 부탁해보려는 거요.”
말하는 표정이 어찌나 절절한지 풍천은 분노가 반쯤 줄어든 표정으로 물었다.
“병에 걸린 사람이 누군데……?”
“내 아내요.”
‘아내?’
“귀수괴의는 이제 나의 마지막 희망이오. 나를 그냥 보내주시오. 신검문에 없다면 천하를 돌아다녀서라도 찾아야 하오.”
아내를 살리기 위해 천하를 뒤지려 하다니.
이곡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진 풍천은 남은 분노마저 털어냈다.
‘초령이와 입 맞추는 것은 나중에 또 하면 되지 뭐.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들어왔다잖아?’
자신도 백초령을 구하기 위해 불귀곡까지 들어가지 않았던가.
마음이 약해진 그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무슨 병인 줄은 아쇼?”
“후우우우…….”
이곡은 심장이 딸려 나올 것 같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떤 병이기에 저렇게 깊은 한숨을 쉬는 걸까?
그때 이곡이 말했다.
“살이 찌는 병인데…….”
무슨 병?
“지금은 너무 쪄서 움직일 수가 없소.”
그런 병도 있나?
문득 동포동의 포동포동한 모습이 떠올랐다.
이곡의 아내가 동포동보다 더 살이 쪘을까?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이곡이 참담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한 달 전에 봤을 때 삼백 근이 넘었으니 지금쯤 삼백오십 근은 되었을 거요.”
‘헉! 정말 엄청나군!’
그 정도라면 허리를 구부리기는커녕 일어서는 것조차 고역일 것이었다.
하물며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심경은 어떠하겠는가.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해서 속이 터져 죽지 않은 게 다행이지.
‘가만? 그래서 저렇게 말랐나?’
풍천은 이곡의 몸을 쓱 훑어보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먹는 걸 못 먹게 하면 살이 빠지지 않겠소?”
“그게 쉽지 않으니까 문제지요. 한 번은 가두어놓고 음식을 조금씩 줘보기도 했소. 하지만 소용이 없었소. 한 끼만 굶어도 발작을 해서 난리가 나지 뭐요. 그때마다 숨을 못 쉬고 몸을 떨면서 기절을 하는데…….”
이곡은 말하다 말고 풍천을 쳐다보았다. 왜 그런지 질린 표정이었다.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요. 숨이 멈춰진 삼백 근 넘는 여자를 숨 쉬게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도 하루에 대여섯 번씩 하려면…….”
풍천은 이곡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목에 뭐가 턱 걸린 기분이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이곡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하루에 대여섯 끼를 먹는데 그걸 대주는 것도 쉽지가 않소.”
‘하루에 대여섯 끼나! 거기다 식성도 엄청나겠지?’
풍천은 그 생각이 들자 저절로 주판알이 튕겨졌다.
“그렇게 먹어대면 돈이 많이 들어가겠군요.”
지금 아내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돈이 문젠가?
그런데 이곡에게는 그것도 큰 문제였다.
“사실…… 아내의 식성 때문에 집안이 파산 직전이오.”
그로선 이래저래 아내의 병을 고치지 못하면 곤란에 처하게 될 상황인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풍천은 충분히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천풍장도 초웅으로 인해서 지금쯤 곡식이 다 떨어졌을지 몰랐다.
‘장 노인이 돈 될 만한 걸 무턱대고 내다 팔기 전에 돌아가야겠군.’
지하 밀실에 있는 걸 빼면 사실 값나갈 만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풍천은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천풍장을 통째로 팔고 튈지 모르니까.
어쨌든 그것은 나중 일. 그는 이곡의 말부터 들어보았다.
“그래, 귀수괴의가 그런 병도 고칠 수 있단 말이오?”
“그라면 방법이 있을 거요. 그라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간절한 희망이 담긴 말투.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아내의 살을 빼겠다는 마음이 그대로 엿보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게 보이는지 풍천은 이곡을 도와주고 싶었다.
당장 패 죽일 것처럼 쫓아온 것을 생각하면 어이없는 결정이었지만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약한 걸 어쩌란 말인가?
‘도대체가 악해지고 싶어도 천성이 워낙 착하니 원…….’
그렇게 생각한 풍천은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험, 귀수괴의가 신검문에 있는지 내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소.”
“그게 정말이오?”
이곡이 눈을 크게 뜨고 반색했다.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은 표정.
순간, 풍천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문득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대신 당신도 단천무령이 되어서 나를 도와주쇼.”
“단천무령? 그게 뭐요?”
“단천무령은 강호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설명을 듣던 이곡의 표정이 이지러졌다.
“내 비록 악인은 아니지만 협사라고 볼 수도 없는 사람이외다. 그런 일은…….”
풍천은 별걱정 다한다는 투로 말했다.
“걱정 마쇼. 단천무령은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으니까.”
‘해결사인 나도 하는데 도둑이라고 못 할 것 없잖아?’
그랬다. 전쾌 이곡. 아는 사람만 아는 그의 또 다른 별호는 표영도(剽影盜)로 강호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도둑이었다.
풍천은 그에 대해서 삼 년 전에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에겐 세 가지 철칙이 있다고 했다.
―부자가 아니면 털지 않고, 나쁜 놈이 아니면 털지 않고, 여자의 물건은 털지 않는다.
그 정도면 그래도 양심적인 도둑 아닌가.
이곡이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자, 풍천은 그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귀수괴의에 대해선 아침이 되어야 알아볼 수 있을 테니 여남의 영화 객잔에 가서 기다리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