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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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60화
160화
영호관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부님을…… 배신하란 말씀입니까?”
“일전에 반드시 신검문주가 될 생각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설마 포기한 것은 아니겠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화청백이 있는 이상 자넨 절대 문주가 될 수 없네. 그걸 모르진 않겠지?”
“그럼 천외천의 사람이 되면 문주가 될 수 있단 말씀입니까?”
“물론이지.”
영호관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왜, 왜 저를 택하신 겁니까?”
“자넨 자신의 자질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군. 내가 본 자네의 자질은 화청백보다 훨씬 더 뛰어나네. 화청백이 단순한 유리구슬이라면 자넨 옥구슬이야. 다만 구슬을 잘못 꿰어서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뿐.”
영호관은 용후정을 한참 동안 쳐다본 뒤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나직이 말했다.
“정말 저를 문주로 만들어줄 수 있습니까?”
“후후후, 그럴 능력이 없다면 굳이 이런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지. 자네가 내 제의를 받아들이면 천외천의 절기를 전해주겠네. 그거라면 충분히 화청백을 이길 수 있을 거네. 그리고 일이 년만 지나면 백무천과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게야.”
“정말입니까?”
“약속할 수 있네.”
영호관은 열기가 가득한 눈빛을 번뜩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전주님의 말씀을 믿지요. 그럼 어디 저에게 바라는 바를 말씀해보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시는 겁니까?”
용후정은 자신의 선택에 흡족해하며 본론을 꺼냈다.
“자넨 그저 신검문의 문주가 되기만 하면 되네. 그리고 문주가 되어서 내가 모시는 분을 따르게. 어떤가, 간단한 일이 아닌가?”
“신검문의 문주가 되어서 천외천의 명령을 받으라, 이 말씀입니까?”
“문주도 되지 못하고 평생 화청백 밑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신검문에 검각과 경천산장을 합해서 하남 남부 최대의 문파로 키울 생각이네. 자넨 지금의 신검문이 아닌 세 배 이상 커진 신검문의 문주가 되는 거지.”
거부하기 힘든 거대한 유혹.
영호관은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반 각가량 지난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문을 열었다.
“대신 신검문은 철저히 제가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외천에서 신검문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주십시오.”
“하하하하, 그야 당연한 일이지. 대공께서는 신검문에 조금의 욕심도 없다네.”
“그리고 사부님과 사부님 가족의 목숨을 보장해주십시오. 어쨌든 그분은 제 사부님이십니다. 패륜을 저질러서 문주가 되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용후정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이마에 골이 파였다.
“음? 백무천을 그대로 놔두면 위험할 텐데?”
“그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저도 한번 차지한 자리를 뺏기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그에 대해선 저를 믿어주십시오.”
“흐으음, 좋아. 자네가 정 그런 마음이라면 할 수 없지.”
“고맙습니다, 전주.”
영호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용후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분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자네는 백무천이 없는 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게. 무공이든 황금이든 뭐든 밀어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후후후후, 잘하면 일 년 안에 젊은 문주를 볼 수 있겠군.”
“그렇게만 되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백무천이 눈치채면 안 되니 조심해서 행동하게. 그럼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만나서 상의하도록 하지.”
“명심하지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영호관은 다시 한번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용후정의 방을 나왔다.
용후정은 영호관이 방을 나가자 다시 차를 찻잔에 채웠다. 그리고 단숨에 비운 후 가느다란 조소를 지었다.
‘허수아비 문주로 내세우기에는 괜찮은 놈이야.’
제5장. 늑대와 여우
1
검향원으로 들어간 풍천은 백초령의 방이 있는 곳으로 유령처럼 움직였다.
경비무사들은 풍천이 스치듯 지나가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풍천은 백초령의 방 앞 처마에 달라붙어서 귀를 기울였다. 방 안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본 다음 안개가 스미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저만치 누워 있는 백초령이 보였다.
풍천은 창문으로 스며든 화톳불 불빛에 비친 그녀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백초령은 이불을 반쯤 차내고 옆으로 누워 있었는데 얇은 속옷만 입고 있어서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풍천은 팔베개를 한 채 쌔근거리는 백초령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예, 예쁘다.’
백초령이 저렇게 예뻤나?
심장박동이 고막을 쿵쿵 울렸다. 심장이 가슴이 아니라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던 그는 입안에 가득 찬 침이 입술 끝에서 막 떨어지기 직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냥 나갈까?’
목적이 있어서 들어왔는데도 꼭 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가면 아침에 만나야 한다. 그럴 수는 없었다.
‘후우우, 백초령이 저렇게 예쁘게 보이다니. 내 눈에 뭐가 씌웠나 보군.’
하지만 보면 볼수록 예쁘게 보였다. 입술을 부딪쳐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서 두 다리에 힘을 줘야 할 정도로.
‘하면 초령이가 화낼까?’
그때 백초령이 몸을 뒤집고 반듯이 누웠다.
순간 팔에 짓눌렸던 가슴이 기세 좋게 불룩 솟았다.
‘흡!’
숨을 들이켠 풍천은 눈을 부릅떴다.
거센 충격에 숨이 멎었다.
코끝을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 그토록 요란하게 뛰던 심장박동이 느닷없이 멈춰버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그는 석상처럼 굳은 채 신의 조각품처럼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두 눈도 옥구슬처럼 반짝이며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순찰무사들이 교대하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풍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천풍심법을 운용해서 가까스로 충격을 진정시켰다.
‘제길, 안 봐야 할 걸 봤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 시간 이후로 백초령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말다툼할 때마다 눈앞의 모습이 어른거릴 텐데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래도 후회되지는 않았다.
백초령의 자는 모습은 그 정도 손해(?)를 감수해도 될 만큼 아름다웠다.
풍천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긴, 이기면 뭐해? 여자와의 말싸움은 져주는 게 이기는 거라고 하잖아? 정 안 되겠으면 상대 안 하면 되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자, 이제 깨워볼까?
풍천은 공력을 발출해서 자신과 백초령 사이의 공간을 감쌌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다음 백초령을 깨웠다.
“저, 저기, 초령아.”
백초령은 꿈결에 들려오는 풍천의 목소리를 듣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부르지만 말고 이리 와. 내가 안아줄게.’
풍천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불렀다.
“초령아, 일어나 봐. 나 보더라도 놀라지 말고.”
‘내가 왜 놀라? 이리 오라니까? 어서…… 응?’
잠결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백초령은 이마를 찌푸린 채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꿈속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자 눈을 번쩍 떴다,
순간 저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대경한 백초령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이불로 가슴을 가렸다.
“누, 누구……?”
“쉿, 나야 나. 풍천.”
그 말을 듣고서야 풍천을 알아본 백초령은 눈을 치켜뜨고 다그쳤다.
“풍천……?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걱정 마셔, 너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니까.’
풍천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비록 고의는 아니지만, 목적이 있다지만, 여자가 자는 방에 몰래 들어온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면 기가 살아서 더 강하게 나올지 몰라 바로 본론을 꺼냈다.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왔어. 형의 유품이 든 상자를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 있을까?”
백초령도 사마공유의 이야기가 나오자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어서 더 이상 풍천을 다그치지 못했다.
“공유 오빠의 유품이 든 상자?”
“어.”
백초령이 손을 양쪽으로 벌리면서 물었다.
“혹시 이만한 상자 아니야?”
이불이 툭 떨어지면서 가슴의 뽀얀 살이 드러났다.
‘헉!’
풍천은 튀어나오려는 눈을 가까스로 집어넣었다.
“어마, 뭘 봐!”
백초령은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풍천을 흘겨보았다.
‘자기가 드러내놓고…….’
그런데 왜 이불로 안 가리고 손으로 가리는 걸까? 반밖에 안 가려지는 줄 알 텐데.
풍천은 불만이 있었지만 한 번 더 져주기로 하고 따지지 않았다.
“맞아, 봤어?”
백초령도 그쯤에서 물러섰다.
“언니 방 한쪽 구석에 있던데?”
“그래?”
백서령에게 있다면 당분간 안심해도 될 것 같다.
더구나 연서는 백서령이 주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연서는 서령 아가씨 드리고 나머지만 챙겨야지.’
그런데 풍천이 생각에 잠겨 있자 백초령이 눈치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저기, 혹시 알아? 언니가 용원명 공자와 혼인한다는 거.”
“용원명? 용수명의 동생?”
“응, 내가 왜 유령총에서 정혼했다고 말했지? 그 사람이 바로 용원명 공자야.”
형이 죽은 이상 백서령이 누구와 혼인을 하든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렸다.
‘형, 서령 아가씨가 혼인을 한대. 괜찮아?’
자신의 마음도 그런데 형이 알면 얼마나 슬퍼할까?
풍천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백초령에게 물어보았다.
“언제 한다는 거야?”
“신마성과의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혼인할 정신이 없잖아.”
그럼 언제 할 것인지 아직 정확한 것은 없군.
그렇게 생각한 풍천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잘됐네 뭐. 언제까지 형 생각하면서 혼자 살 수는 없을 텐데. 혹시라도 기회가 되면 초령이가 유품 상자 좀 맡아줘. 연서는 서령 아가씨 것이지만 나머지는 형 것이니까.”
백초령은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입술을 몇 번이나 씰룩였지만 결국 속에 담긴 말은 하지 못하고 풍천의 말에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풍천은 백초령에게 간단한 작별인사를 던지고 몸을 돌렸다.
“그만 갈게. 아침에 봐.”
그런데 이상했다. 발바닥에 아교가 칠해진 듯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이, 미친 척하고 한번 안아볼까?’
백초령도 답답한 표정으로 풍천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으이그, 바보!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겠다는 거야?’
‘하지만 초령이는 공손천우와 혼인할지 모르는데…….’
‘혹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 아닐까? 그게 아니면 남자가 이런 기회를 그냥 버릴 리가 없는데…….’
그때였다. 풍천이 갑자기 돌아섰다.
‘에이, 모르겠다. 한 대 맞더라도…….’
이대로 그냥 나가기는 너무나 아쉬웠다.
“저기…… 초령아.”
“어? 왜?”
백초령은 흠칫하며 침상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풍천은 머뭇머뭇 백초령의 앞으로 다가갔다.
백초령은 어기적거리며 일어나서 풍천의 눈을 쳐다보았다.
휘익.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간 풍천은 두 팔을 벌리고 백초령을 덮쳤다. 늑대가 토끼를 덮치듯이.
백초령은 돌아가는 상황을 아주 정확히 알면서도 모른 척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왜, 왜 이래?”
그러면서도 손은 풍천의 등을 두르고 얼굴은 가슴에 파묻었다. 품 안에 굴러 들어온 토끼를 본 여우처럼 몰래 웃으면서.
“저, 저기…….”
풍천의 목소리가 몽롱하게 떨렸다.
유령총에서 안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
얇은 속옷 사이로 부드러운 살결이 그대로 느껴지는데 온몸에서 복숭아향이 나는 듯했다.
“왜? 마, 말해봐.”
백초령은 벌게진 얼굴을 들고 촉촉해진 눈빛으로 뭔가를 갈구하듯 풍천을 올려다보았다.
풍천은 뒷목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스르르 고개를 숙여서 백초령의 입을 막았다. 백초령은 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졌다.
빌어먹을 일이 벌어진 것은 서로를 껴안은 두 사람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을 때였다.
“웬 놈이냐?”
“수상한 놈이다! 잡아라!”
밖에서 난데없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풍천은 누가 뒷덜미를 잡아채기라도 한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백초령은 고개를 푹 숙이고 풍천의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어떤 놈이!’
으드득 이를 간 풍천은 지독하리만치 강렬한 살심을 느꼈다.
어떤 놈이 이 오밤중에 돌아다니면서 난생 처음 경험해본 순간을 방해한단 말인가!
그런데 밖에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검향원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놈이 아가씨께서 계시는 방으로 갈지 모른다! 경비를 철저히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