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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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58화
158화
공손이향은 눈빛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돌렸다.
‘지난 사흘간 초령 언니의 표정이 이상하다 했더니, 령주를 좋아했었나?’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소리가 늘 그녀를 따라다녔다. 커가면서 몸매의 굴곡이 완연해지고 여인으로서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북풍한설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그녀의 신비한 외모를 보고 사람들은 말 한마디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더구나 열여덟이 되었을 때 그녀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게 밝혀지자 불귀곡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남과 다른 삶을 살아온 그녀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고도 크게 가슴 아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만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운명을 받아들인 그녀는 남모르게 작은 욕심을 하나 품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고 싶다는 아주 작은 욕심을.
그런데 얼마 전 자신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자신을 멀리하지도 않았고 어렵게 대하지도 않았다.
어렵게 대하기는커녕 너무 스스럼이 없이 다가와서 바깥 세상에 있다는 치한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그녀는 그를 볼 때마다 실소가 나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가슴 한쪽 저 깊은 곳에 그의 그림자가 새겨졌다.
불이 꺼진 밤, 잠을 자려면 가끔 어둠 속에 떠오르기도 했고.
그런데 그가 백초령과 예사롭지 않은 관계라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묘하게 출렁였다.
‘그러고 보니 령주를 처음 만났을 때 나무 위에서 초령 언니가 있는 곳을 보고 있었어.’
령주가 초령 언니를 좋아하는 걸까?
령주의 방에 간 걸 보면 초령 언니도 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때 백초령이 방에서 고개를 내민 사람들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못 볼 거라도 봤어요?”
사람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집어넣었다.
사정이야 어쨌든 백초령은 공손천우의 부인이 될 여자가 아닌가. 의문점이 많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공손이향도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방 안으로 들어오던 백초령이 힐끔 그녀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이상해?”
“아니에요.”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백초령은 침상으로 다가가서 날듯이 몸을 던지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하긴 뭐 이야기할 것 있다고 간 사람이 화난 표정으로 나오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공손이향은 물끄러미 백초령을 바라보았다.
백초령도 령주만큼이나 자신을 보통 사람과 똑같이 대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 살 어린 걸 알고 곧바로 언니 동생 하자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싫진 않았다. 아니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좋아서 바로 그러자고 했다.
‘정말 비슷해.’
말투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부러울 정도로.
그래서 그녀는 백초령에게 질투가 났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런 생경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에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제4장. 신검문에 부는 바람
1
정오 무렵.
풍천은 천궁산이 지척인 여남에 도착하자 공손이향을 제외한 네 명의 단천무령을 먼저 적련방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고 형, 적련방으로 가서 호자충이란 사람을 찾아보시오.”
“알겠습니다, 령주.”
고복수는 일절 토를 달지 않고 힘차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입 하나 뻥긋하지 않았다.
그저 풍천과 잠시라도 헤어진다는 게 반갑기만 한 그들은 풍천이 명령을 취소할까 봐 식사도 하지 않고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식사나 하고 가지 그러쇼?”
풍천이 예의상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들은 가면서 먹으면 된다며 길을 떠났다.
‘정말 부지런한 사람들이군.’
그런데 그들을 보내고 신검문으로 가던 풍천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그 사람들 돈은 있나 모르겠네?’
그가 알기로는 아무도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불귀곡에서는 돈이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그는 곧 조금도 미련 없이 걱정을 털어냈다.
‘애들도 아닌데 알아서 하겠지 뭐. 돈이 없으면 검을 팔든가…….’
풍천은 신검문으로 들어가도 인피면구를 벗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백초령에게는 밝히지 말라고 당부를 해둔 터였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죽이려 할지 모른다면서.
특히 신마성의 변태자식이 당장 달려올지 모른다고 했더니 백초령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전날의 화는 많이 풀린 듯했다.
그렇게 여남을 출발한 지 한 시진. 마차가 신검문에 도착하자 정문위사 두 사람이 긴장한 표정으로 앞을 막았다.
“어디서 온 분들이시오?”
풍천은 대답 대신 마차를 두들겼다.
“다 왔으니 내리쇼.”
곧 백초령이 공손이향과 함께 내렸다.
정문위사 두 사람은 백초령을 보고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두, 둘째 아가씨!”
“잘 있었어요, 노삼?”
노삼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두서없이 말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지,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이봐, 진소. 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둘째 아가씨가 오셨다고 알리게!”
젊은 정문위사가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둘째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백초령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안쪽 깊숙한 곳까지 전해지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백초령은 곧장 신검전으로 향했다.
마차를 끌고 가던 풍천은 그쯤에서 뒤로 처졌다.
백초령은 마차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나와 공손 소저는 일단 객당으로 갈 거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왔다는 말 절대 하지 마.]
백초령은 풍천을 째려보며 입술을 삐죽이고는 홱 몸을 돌렸다.
입술 모양을 봐선 ‘가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풍천도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쳇, 저 구하려고 죽을 고생을 했는데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하여간 쌀쌀맞다니까.’
그러고는 공손이향에게 말했다.
“우리는 객당으로 가죠.”
공손이향의 눈에는 그런 두 사람의 마음이 훤히 보였다.
‘정말 알 수가 없는 사람들이야.’
그녀는 두 사람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떤 때는 견원지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남녀 관계의 묘한 관계를 잘 모르는 그녀로선 어떤 게 진실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객당으로 간 풍천은 신검문의 분위기가 평소와 많이 다르다는 걸 알고 근처의 순검당 무사 하나를 붙잡아서 물어보았다.
“이보쇼, 신검문에 무슨 일이라도 있소? 사람들도 많이 안 보이고 분위기도 무겁게 느껴지는데.”
순검당 무사는 풍천을 대충 훑어보고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신마성이 장강을 건넌 일 때문에 문주님께서 정예무사들과 함께 회남으로 가셨소.”
“신마성이 장강을 건넜다? 언제 말이오?”
“며칠 됐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 풍천은 이마를 좁히고 코를 씰룩였다.
‘그럼 천외천이 바로 움직이겠는데?’
공손무백이 예상보다 빨리 움직이려고 한다더니 신마성 때문인 것 같다.
‘그럼 천의맹도 움직일지 모르겠군.’
이래저래 급박한 상황.
풍천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박이냐, 쪽박이냐. 한순간의 판단이 가름할 것이었다.
‘일단 공손무백의 명령을 듣는 척하면서 신마성과 천혈궁 놈들을 먼저 패 죽이고 적당한 때에 정보를 넘겨서 공손무백을 망하게 해야지.’
최선의 복수는 양쪽을 동시에 망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날도 더운데 바쁘게 생겼군.’
그래도 한철 고생으로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다면 그 정도 고생이야 못 할 것도 없었다.
풍천은 노후를 위해서 일순간의 젊음을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무사에게 다시 물었다.
“회남으로 가셨다면 적련방으로 간 거요?”
“그렇소.”
“금천문과 삼도맹을 제외한 구룡회의 세력이 모두 모이는 거요?”
“그건 아닌 것 같소. 만경방과 비룡방은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합류하지 못한다는 소문이오.”
그럼 다섯 세력만 모인다는 말.
그들의 힘만으로 신마성을 막아낼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공손무백이 생색내며 끼어들기 딱 좋은 상황이군.’
자신에게 적련방으로 가라고 했다. 구룡회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다는 말.
아마 그는 가장 적절한 기회를 노려서 극적으로 등장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야 반발이 없을 것이고 그 상황에서 신마성을 무찌르면 세상이 그를 우러를 테니까.
‘그 인간은 피가 아무리 많이 흘러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 거야.’
풍천은 공손무백이 새삼 무서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그런 면도 없지 않았지. 이제부터는 상대할 때 조심해야겠어.’
그때 순검당 무사가 질문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왔소? 뭐하는 사람인데 초령 아가씨를 모시고 온 거요?”
풍천은 다시 웃음을 되찾고 순검당 무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문을 가지지 않도록 강호에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유를 댔다.
“남양에서 왔는데 여기까지 모셔다 주는 대가로 은자 스무 냥을 받기로 했죠.”
2
백초령은 신검전으로 가려 했지만 백무천이 없다는 말을 듣고 검향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백초령이 돌아왔다는 말에 검향원을 나서던 백서령은 그녀를 보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초령아!”
“언니!”
백초령도 환하게 웃으며 마주 달려갔다.
잠시 후 백서령은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백초령을 바로 검향원으로 데려갔다.
두 달 만에 검향원을 본 백초령은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러다 황금 잉어가 놀고 있는 연못이 보이자 괜한 심술이 발동했다.
‘풍천이 왔다는 걸 말해버릴까?’
하지만 그녀는 백서령의 거처로 들어갈 때까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백서령에게 오면서 들었던 말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아버지가 정예무사들을 이끌고 회남으로 갔다고 들었어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백서령은 신마성이 장강을 건넌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아버지도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놓이실 거야.”
“큰일은 없어야 할 텐데…….”
“너무 걱정 마라. 신마성도 함부로 북상하지는 못할 테니까.”
“숙부님과 사형들도 모두 아버지를 따라가셨나요?”
“숙부님과 대사형만 가고 영호 사형은 일전에 임무를 수행하다 입은 부상이 아직 다 낫지 않아서 따라가지 못하셨어.”
백초령은 영호관이 부상을 입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저 백무천의 명을 받고 비밀 임무를 수행중이라고 들었을 뿐.
하기에 영호관이 부상을 입었다는 말을 듣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사형이 부상을 입었단 말이에요?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다 낫지 않았다면 부상이 심했나 봐요?”
“나도 몰랐어. 당시의 부상으로 얼굴과 몸이 많이 상하셔서 비밀리에 치료를 받으셨다고 해.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지신 상태니 너무 걱정하지 마.”
“아,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나, 용 가가와 혼인식을 올리기로 했어.”
백서령을 바라보는 백초령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결국 그렇게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