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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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57화
157화
4
백하에 도착한 풍천은 전에 들렀던 객잔으로 들어갔다.
나기응은 객잔으로 들어간 풍천 일행을 보고 곤혹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놈인데…….’
수하의 말에 의하면 단천무령의 령주라고 했다.
며칠 전에만 해도 적이었던 자가 말 한마디로 자신의 목을 칠 수 있는 지위가 되어서 찾아온 것이다.
잠깐 떠나 있을까?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수하 하나가 객잔에서 나오더니 그에게로 다가왔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게 안으로 들어온 수하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향주, 단천무령주께서 찾으십니다.”
빌어먹을!
풍천은 방으로 들어오는 나기응을 보고 씩 웃었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죠?”
어차피 속일 수도 없는 상황. 나기응은 솔직히 시인했다.
“예, 령주. 저…… 그때는 명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저도 압니다, 하하하. 그런데 등 단주께서 내린 명령입니까, 아니면 선우 공자께서 내린 명령입니까?”
풍천은 별일 아닌 것처럼 웃음까지 지어가며 가볍게 질문했다. 하지만 나기응의 대답 여부에 따라서 보복할 대상이 달라지는 만큼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질문이었다.
나기응은 자신의 대답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고분고분 대답했다.
어차피 자신은 명령을 이행한 것뿐이고 단천무령주의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해도 공손선우를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니까.
“대공자님께서 내리셨습니다.”
“그 양반도 참. 아니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다고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거지? 혹시 아는 거 없수?”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령주.”
“정말 모르는 거요,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거요?”
“정말 모릅니다.”
“천주님의 이름을 걸고 사실 그대로 대답해보쇼. 정말 몰라요? 나중에 거짓말이라는 게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죠?”
나기응의 얼굴이 벌게졌다.
설마 그런 식으로 몰아붙일 줄이야.
그는 구원의 눈빛으로 한쪽에 서 있는 단천무령을 바라보았다.
감능하와 고복수 등은 슬며시 눈을 돌렸다.
나기응은 할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게…… 령주께서 워낙 다그치시니까 자존심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내가 언제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거야?”
하지만 감능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큼은 공손선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령주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풍천은 그런 감능하를 힐끔 쳐다보았다. 흠칫한 감능하는 머리를 빙글 돌리며 목운동을 했다.
“목이 이상하게 뻣뻣하네. 어제 잠을 잘못 잤나?”
풍천은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으로 감능하를 째려보고는 다시 나기응에게 물었다.
“대공자는 아직도 여기 있소?”
“아닙니다. 다음 날 천의맹 사람들과 함께 떠나셨습니다.”
“등 단주는?”
“그분은 엊그제 곡에 다녀오시더니 천응단원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결국 둘 다 백하에 없다는 말.
풍천은 복수를 하지 못한 아쉬움을 접고 나기응에게 명령에 가까운 제안을 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 이제부터 단천무령이 되쇼.”
“예?”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 빚을 갚는 셈치고 열심히 하쇼. 사실 당신의 실력을 봐선 단천무령이 되기에 많이 부족하지만 내가 특별히 봐주는 거요.”
“그게 저…….”
“싫어요? 그럼 나하고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텐데?”
나기응은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당시에 놓치긴 했지만 신법을 빼면 그다지 강한 것 같지도 않았다.
“정 그러길 원하신다면…….”
그때 감능하의 전음이 고막을 울렸다.
[죽고 싶지 않다면 하지 마시오. 오지회의 다섯 공자가 령주께 박살 났소. 내가 봐선 대결을 핑계로 대공자와 등 단주에게 못 한 복수를 나 형에게 대신 하려는 생각 같소.]
나기응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오지회의 다섯 사람이 어쩌지 못한 사람이라면 자신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제기랄, 결국 죽지 않으려면 저 사람의 수하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부인과 자식을 남겨놓고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는 일.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단천무령이…… 되겠습니다.”
“너무 죽을상 짖지 마쇼. 당신은 우리와 함께 움직이지 않고 이곳에 남아서 임무를 수행할 거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 가족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니까.
나기응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알겠습니다, 령주.”
“그리고 단천무령이 되면 수당도 생기니까 부인께선 아마 잘했다고 좋아할 겁니다. 하, 하, 하.”
풍천은 나기응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백하촌의 책임자인 나기응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몰래 불귀곡으로 들어가야 할 경우 나기응을 이용하면 보다 편할 것이었다.
감능하는 풍천의 웃음을 들으며 속으로 안도했다.
‘후우, 저 괴팍한 령주의 손에서 한 사람 살렸군.’
그런데 그때 그 괴팍한 령주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상한 말을 했다.
“감 형, 잘했수.”
‘뭘……?’
감능하는 등골을 타고 오싹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날 밤.
백초령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오랜만에 울었다. 울지 않으려 하는데도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녀는 풍천의 허리에서 달랑거리는 검을 본 순간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 검이 왜 당신에게 있지? 너, 풍천이지? 그렇지? 사실대로 말해!
하지만 대풍이란 자가 풍천을 죽이고 뺏었다고 할까 봐 겁이 났다.
그녀는 백하까지 오는 동안 그를 더욱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행동, 말투, 눈빛, 그 모든 것을.
더 의심할 것도 없었다. 나름대로 숨기려고 노력하지만 하루에 몇 번씩 풍천을 떠올린 그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는 얼굴만 가리면 틀림없는 풍천이었다.
어떻게 유령총에서 살아 나왔을까? 어떻게 불귀곡까지 쫓아온 걸까? 게다가 주요 간부인 단천무령의 령주라니?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당장 쫓아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풍천이 숨기고 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밝히기 전까지 아는 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최소한 불귀곡에서 멀어질 때까지라도.
‘나중에 다 말해주지 않으면 가만 안 둘 거야.’
5
불귀곡을 출발한 지 나흘 째.
오후가 되자 뜨거운 불길을 뿜어내던 태양이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하늘을 쳐다보던 풍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가 오겠는데요? 한 시진쯤 가다가 피할 데가 있나 알아보죠.”
다른 사람들도 힐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풍천을 비웃었다.
하늘에 구름이 있긴 했지만 듬성듬성 떠 있었고 색도 옅었다. 아무리 봐도 비가 올 구름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 시진 이상 갔는데도 비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일 각쯤 더 가자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비가 온다면 쉬어 가기에 적당해 보였다.
하지만 감능하는 기회라도 잡은 듯 강하게 주장했다.
“령주, 그냥 갑시다. 여기서 밤을 새면 내일까지 천궁산에 도착하지 못할 겁니다.”
“당분간은 마을이 없을 것 같은데 가다가 비라도 만나면 고생할 텐데요?”
“비가 올 것 같진 않지만 오면 또 어떻습니까? 날도 더운데 시원하게 맞지요.”
물론 그는 비가 올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풍천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같은 생각입니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엉뚱한 일로 지체하다가 하루를 덧없이 보내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럼 할 수 없죠.”
풍천도 더 고집부리지 않고 마차를 몰았다.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풍천 일행이 마을을 지나친 지 반 시진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감능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콩알만 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그리고 반의반 각가량이 지나자 장대비가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풍천 일행은 장대비를 맞으며 질척거리는 진흙탕 길을 이동했다.
풍천은 천천히 마차를 몰고 여섯 사람은 질척거리는 빗속을 걸었다. 마차 바퀴에 진흙이 달라붙어서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유난히 더 느렸다.
“사람 말을 왜 안 믿는 거야? 하여간…… 왜들 그런지 모르겠어. 고생을 사서 한다니까?”
풍천은 시도 때도 없이 투덜거리며 장대비 속으로 마차를 몰았다.
감능하는 풍천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속도가 늦어서 그만큼 더 고생이었지만, 일부러 속도를 늦추는 게 뻔히 보였지만 한마디도 토를 달지 못했다.
‘제길, 누가 진짜로 올 줄 알았나?’
그때 풍천이 말했다.
“바퀴에 흙이 달라붙어서 잘 굴러가지 않네. 감 형, 마차 좀 밀어보쇼.”
풍천 일행이 역성(驛城)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밀려들 무렵이었다.
신검문까지 남은 거리는 칠십 리 정도. 풍천은 역성에서 밤을 보내고 신검문에는 다음 날 아침에 가기로 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풍천의 의견을 반대했다가 일이 엉뚱하게 흐르면 모든 잘못을 뒤집어쓸지 몰랐다. 감능하처럼.
그런데 그날 저녁, 마침내 백초령이 풍천의 방을 찾아갔다.
그녀는 신검문에 들어가기 전 풍천이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
풍천은 방으로 들어선 백초령을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백 소저가 무슨 일로 제 방에 오신 거요?”
백초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풍천을 향해 다가갔다.
풍천은 백초령이 다가오는 만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어어, 왜 이러는 거요?”
백초령은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는 풍천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나직이 다그쳤다.
“내가 모를 줄 알고? 그 껍데기는 또 어디서 얻은 거야?”
확신에 찬 표정. 아닐 거라는 생각 자체를 일절 배제한 말투.
풍천은 확실하게 들켰다는 걸 알고는 일단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진기로 주위를 감싸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제법인데? 어떻게 알았어?”
‘멍청하기는! 검을 그대로 들고 다니면서 속길 바란 거야? 거기다 이름도 그래. 대풍이 뭐야, 대풍이! 가명을 대려면 좀 더 그럴듯한 걸 대야지!’
그래도 그건 너무 단순한 것 같아서 다른 이유를 댔다.
“풍천이 아무리 변해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어. 왜, 몰랐어?”
사실 검이 아니었더라도 지금쯤이면 풍천의 정체를 알아봤을 것이었다. 행동과 말투가 워낙 특이해서 하루 종일 같이 지내다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풍천 본인만 그걸 모를 뿐.
“내가 그렇게 특별나게 생겼나?”
“눈만 해도 그래. 풍천처럼 맹하게 생긴 눈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흔한 줄 알아?”
‘하여간 말하는 것은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풍천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툭 쏘듯이 말했다.
“맹한 게 아니라 순진해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 정도 구분은 할 줄 알아야지.”
“순진한 사람 다 죽었나 보네. 그렇게 순진해서 나를 변태에게 맡긴 거야?”
“누군 맡기고 싶어서 맡겼나 뭐?”
“싫었으면 맡기지 않았어야지, 이 바보야!”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니까.”
“흥, 쳇, 킁.”
백초령은 연신 콧소리를 내며 풍천을 짓눌렀다.
풍천은 비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남창에서 벗어났으면 바로 신검문으로 갈 것이지 뭐가 좋아서 공손천우를 따라 거기까지 간 거야?”
“누가 좋아서 간 줄 알아? 나도 천궁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공손천우가 억지로 데려갔단 말이야.”
“혼인하기로 했다며?”
“그것도 공손천우가 도와달라고 해서…….”
“얼씨구? 그럼 공손천우가 도와달라고 하면 뭐든 도와주겠네? 아예 바로 혼인까지 해버리지 그랬어?”
“이 멍충이가……!”
“누가 멍청한지 모르겠네. 어떻게 겁도 없이 남자를 함부로 따라가?”
“나도 따라가기 싫었다니까?”
“그러다 공손천우가 느닷없이 덮치면 어쩌려고? 아니지, 혹시 공손천우가 이미…….”
순간 백초령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서렸다.
흠칫한 풍천은 입을 닫고 눈치를 보았다.
끝내 백초령의 눈에서 물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동시에 그녀의 가슴속에서 부글거리던 원망이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풍천이 왜 그것까지 걱정해? 풍천이 뭐 내 남편이야, 뭐야? 그렇게 내가 싫으면 나 놔두고 가버려! 나 혼자서도 집에 찾아갈 수 있으니까!”
빽 고함을 내지른 그녀는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고는 홱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어어? 저기, 초령아…….”
쾅!
방문이 부서질 것처럼 거세게 닫혔다.
방 안의 소리는 전력을 다해서 어떻게 막아봤지만, 방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방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풍천의 방에서 나오는 백초령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백초령이 령주의 방에서 나오는 거지? 그것도 거의 우는 표정으로.’
‘설마…… 령주가 불러들여서 이상한 짓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