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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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56화
156화
신예가 웃으며 대답했다.
“야채가 고기보다 몸에 좋대요. 령주님 생각해서 많이 가져왔으니 맛있게 드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기가 적당히 있어야 맛이 있지. 내가 염소도 아니고…….”
“안 드실 거면 치울게요.”
“아, 아냐. 그냥 이거라도 먹지 뭐.”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나서 내려가 봐야 숙수들이 음식을 주지도 않을 거고……. 그럼 굶어야 한다는 말인데 굶는 것보다는 야채라도 먹는 게 나았다.
‘저 여우 같은 게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내가 떠난다니까 심술이라도 부리고 싶어진 건가? 하긴 뭐 그동안 정도 들었겠다, 또 내가 워낙 잘해줬어? 떠나보내려니 아쉽기도 하겠지.’
풍천은 신예를 너그러이 봐주기로 하고 야채를 한 입 가득 퍼 넣었다.
그때 고복수와 응초, 사공수가 그의 거처를 찾아왔다.
그들은 고기 한 점 없이 야채만 수북이 쌓인 접시를 보고 각자 풍천의 식성을 짐작했다.
‘야채를 좋아하나 보군.’
‘저건 양념으로 넣는 향챈데 조금 특이한 식성이군.’
‘몸은 더럽게 생각하네.’
조금 질긴 야채도 있는 바람에 꼭꼭 씹어서 식사를 마친 풍천은 차로 입안을 헹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밤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왜 이렇게 분위기가 무겁죠?”
고복수가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공께서 계신 천승전에 침입자가 든 것 같습니다. 그 일 때문에 전 계곡 내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저런! 그게 정말이오? 아니, 이곳에는 모두 형제 같은 사람만 있다고 했는데 왜 암습을 당해요?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 암습한 거요?”
“아직 확실한 것은 밝혀진 게 없습니다만 외부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양반은 죽었수?”
“중상을 입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참. 그 양반, 나와 함께 가재도 구워 먹고 했던 사람인데…… 많이 안 다쳤는지 모르겠네.”
풍천은 정말 안됐다는 듯 금방이라도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으로 두런거리고는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건 그렇고 무슨 임무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지 아시는 분?”
세 사람 다 임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오라 해서 왔습니다만 저희는 아직 임무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말씀해보시지요.”
“그래요?”
풍천은 세 사람에게 백초령을 신검문까지 데려다 주는 임무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세 사람은 공손천우와 혼인할 여자를 호위한다는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 불만인 표정들이었다.
겨우 그런 일로 단천무령이 움직이다니.
하지만 풍천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신검문으로 가면서 강호에 있는 단천무령을 만나고 혹시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뽑을 생각이죠. 그러고 나서 천주님의 명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거요.”
백초령을 호위하는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혹시 신마성과 구룡회의 싸움에 나서는 겁니까?”
고복수가 먼저 넌지시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좌우간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으니 그렇게만 알고 만전을 기해주쇼.”
“저희 셋만 따라갑니까?”
응초가 물어보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중요한 일을 하기에는 인원이 너무 적지 않느냐는 표정.
풍천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일단 두 사람이 더 올 거요. 그리고 나중에 몇 사람이 더해질 거요.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그러니 숫자가 적어도 너무 불안해하지 마쇼.”
‘양보다 질? 우리가 무슨 물건인가?’
그때 신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령주님, 감 향주님과 이향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풍천이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다 왔군요.”
세 사람은 ‘이향 아가씨’라는 말에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서, 설마 천상궁의 공손이향?’
‘미쳤군, 양 대주께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제길, 수염이라도 깎고 올걸.’
풍천은 공손이향에게서 주머니 하나를 건네받았다.
단천무령의 경비와 수당이었는데 그 안에는 자잘한 보석 몇 알과 금자가 들어 있었다. 대충 계산해도 황금 이백 냥 이상은 될 듯했다.
‘일 년 정도는 걱정 없겠군. 아껴 쓰면 반은 남겠는걸?’
만족한 풍천은 주머니를 품속에 넣고 옷깃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신예와 마주 섰다.
“너는 계속 여기 있을 거냐?”
“돌아오실 때까지 있을 거예요.”
‘안 돌아올지 모르는데.’
풍천은 차마 그 말을 하진 못하고 장난치듯이 물었다.
“나 간다고 우는 거 아니지?”
“제가 왜 울어요?”
“인마, 그럴 때는 슬픈 척이라도 하는 거야.”
“사실 마음이 조금 슬프긴 해요. 그래도 울진 않을래요. 삼 년 전에 엄마 돌아가셨을 때 엄마 무덤에서 약속했어요. 혼자 살다 보면 힘든 일이 많겠지만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요.”
갑자기 ‘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풍천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그, 그래? 그럼 그때부터 혼자였던 거야?”
“언니들이 괴롭힐 땐 조금 힘들었지만 엄마를 생각하면서 견딜 수 있었어요.”
“그랬구나…….”
풍천은 코끝이 찡해졌다.
신예가 울면 약 올리려고 했는데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나올 판이었다.
그런데 신예가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령주님, 지금 우세요?”
“아니? 내가 왜 울어?”
신예는 눈을 깜박이며 풍천의 눈을 살펴보고는 곧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령주님이 가시고 나면 걱정이에요.”
“뭐가?”
“언니들은 제가 령주님께 이것저것 많은 것을 받은 줄 알고 있어요. 근데 그게 아니잖아요.”
“그게 왜?”
“언니들 기분을 못 맞춰주면 힘들 게 분명하거든요.”
“언니들이 괴롭혀?”
신예는 고개를 내둘렀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힘든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요.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때부터 어른들처럼 일했으니까요.”
그 모습이 어찌나 슬퍼 보이는지 풍천은 또다시 눈에 물기가 차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나도 참 힘들게 자랐는데. 사부님이 어찌나 막 굴리시는지…….’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낀 풍천은 신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곧 괜찮아질 거야. 뭐 내가 도와줄 것 없어? 말만 해. 비연당 가서 한번 뒤집어놓을까?”
신예는 처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피이, 아니에요. 령주님의 말씀 고맙긴 한데 그럼 제가 더 힘들어져요.”
그리고 고개를 들더니 풍천의 물기가 차오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정 저를 도와주시고 싶으면…… 금두 몇 개만 주고 가세요.”
결국 풍천은 사용하기 좋게 쪼개놓았던 두 돈짜리 금두 일곱 개와 은 열두 냥을 고스란히 신예에게 뺏기고(?) 무심헌을 나섰다.
‘후우, 정말 무서운 애야.’
2
백초령은 가지고 온 것이 없는 만큼 가져갈 것도 없었다. 그저 공손천우가 툭툭 던져준 옷만 두어 벌 챙기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그녀가 설레는 마음으로 떠날 준비를 마칠 즈음 밖에서 홍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천무령주께서 오셨습니다.”
백초령은 상기된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작은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멨다.
밖으로 나가자 여섯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 다섯에 면사가 달린 모자를 쓴 여자가 하나.
백초령은 멀리서만 봤던 단천무령주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리서 봤을 때도 느낌이 풍천과 비슷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굴과 머리 묶은 것은 다르지만 느낌이 영락없는 풍천이었다.
‘혹시 잃어버린 형제가 아닐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편 풍천은 백초령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행동 하나하나를 하면서도 이전과 달리 무게를 잡았다.
오가는 사람 중 공손무백의 사람이 몇은 있을 터. 둘이 아는 사이란 게 알려지면 안 되는데 조금만 틈을 보이면 눈치 빠른 백초령이 자신을 알아볼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리고 곽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엉뚱한 소리를 할지 몰랐다.
‘초령이는 방정맞아서 그러고도 남아.’
처음에는 전음으로 미리 자신의 정체를 알려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백초령의 반응이 무지 궁금해서 이판사판 한번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차피 조심하기로 한 이상 만에 하나의 경우까지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백초령의 천방지축인 성격을 믿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출발합시다.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해야 하니까.”
딱딱한 목소리로 백초령을 재촉한 풍천은 몸을 돌렸다.
그런데 백초령은 풍천의 뒷모습을 보니 더 궁금해졌다.
“저기, 당신이 단천무령주인가요?”
“그렇소.”
“혹시 해서 묻는데요, 풍천이라는 사람을 아세요?”
가슴이 뜨끔해진 풍천은 더욱 딱딱한 목소리로 그게 어떤 놈이냐는 듯 대답했다.
“누군지 몰라도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오. 시간이 없으니 출발하겠소.”
백초령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풍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막 걸음을 옮기려던 그녀가 뭘 봤는지 눈을 부릅떴다.
‘저, 저것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다리가 달달 떨렸다.
하지만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서 눈빛을 빤짝이며 걸음을 옮겼다.
천수전을 나온 풍천이 천궁전을 지나가려 할 때였다.
교비은이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마치 남들더러 다 보라는 듯. 단천무령주는 이제 우리 사람이라는 듯.
“이제 가는가?”
“그렇습니다.”
“차라리 잘됐군. 곡 분위기가 안 좋은데 말이야.”
‘당신들 때문에 그런 거잖아!’
풍천은 교비은의 멱살을 잡아당기고서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고 빙그레 웃으며 실없이 말했다.
“제가 운이 좀 좋은 편이죠. 그런데 대공과 총사께선 언제 곡을 나오실 겁니까?”
“글쎄, 아직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네. 하던 일이 안 끝나서 말이야.”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이거지? 독한 놈!’
“그럼 저 먼저 나가보죠. 회남 쪽에 좋은 술집 있으면 알아놓을 테니 나중에 한잔 사쇼. 하, 하, 하.”
풍천은 너스레를 떨며 푼수처럼 웃고는 손을 흔들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만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알려줄 테니 기대해.’
한 줄기 전음이 풍천의 귓전을 파고든 것은 곡의 입구에 거의 다 갔을 때였다.
[이공의 쌍위 중 좌위 사군명이라 하오. 이공께서 령주께 말씀을 전하라 하셨소.]
풍천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슬쩍 고개만 끄덕였다.
[소림의 공각대사를 만나서 ‘삼산의 잠룡이 기지개를 켰으니 십정(十鼎)을 모아라.’라는 말을 전해주시오. 그 말을 전하면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할 거라 하셨소.]
‘킁, 돈도 안 주면서 일만 시키는군.’
그때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대금은 별도로 계산하실 거라고 하셨소.]
‘아주 버릇처럼 외상을 하는군.’
하지만 풍천은 순순히 외상을 받아주었다.
그는 이자가 비쌌다. 그리고 저승으로 간 사람 외에는 그의 돈을 떼어먹고 도망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못 갚으면 몸으로라도 때우게 하지 뭐.’
문득 그 생각이 들자 공손무헌이 돈을 못 갚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3
금천문과 삼도맹을 무너뜨린 신마성의 주력은 장강을 건너서 저주현(滁州縣) 패웅보(覇雄堡)를 접수하고 그곳에 본진을 구축했다.
구룡회와 남궁세가에 눌려 있던 일대의 마도무사들은 신마성이 장강을 넘자 대환영하며 저주로 몰려들었다.
구룡회의 각 세력들도 그들의 북진을 막기 위해서 회남의 적련방에 병력을 집결시키기로 했다.
각 세력에서 이백 명씩만 동원해도 일천사백 명이나 되는 만큼 제아무리 천하제일마세 신마성이라 해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상의 숫자일 뿐이었다.
신마성이 금천문을 무너뜨린 바람에 절강과 복건 쪽에 있던 비룡방과 만경방이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더구나 다섯 세력도 더 많은 무사들을 보내기가 어려웠다.
신마성은 아직 전력이 다 움직이지도 않은 상태. 게다가 천혈궁처럼 신마성을 따르는 문파들이 호시탐탐 뒤를 노리고 있었다.
무사들을 파견하느라 공백이 생기면 자칫 그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공산이 컸다.
백무천은 자신이 직접 정예무사들을 이끌고 적련방에 가기로 결정했다.
군사는 백유현, 화청백이 신임 비검당주로 임명되어서 백무천을 보좌하기 위해 따라나설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장로와 빈객으로 와 있는 고수 중 여섯, 삼전의 고수 삼십, 수호검단의 단원 이십, 오당에서 뽑은 일백오십 명의 정예무사 등 총 이백열두 명이 함께 가기로 했다.
백무천은 모든 준비가 갖춰지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에게 신검문을 부탁했다.
“여 장로, 용 전주, 이곳을 부탁하겠소.”
“문주, 이곳은 아무 걱정 마시구려.”
신무전주 용후정은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
장로원주 여평선도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별걱정 다한다는 투로 말했다.
“허허허, 누가 감히 본문을 넘보겠소? 이 늙은이는 이곳보다 문주의 안위가 더 걱정되오. 부디 조심하시구려.”
“알겠습니다.”
백무천은 담담히 대답하고 영호관을 바라보았다.
“내가 없는 동안 관아는 여 장로와 용 전주를 도와서 이곳을 지휘해라.”
“예, 사부님.”
영호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화청백이 백무천을 따라가는 대신 그가 남기로 한 것이다.
백무천은 깊숙이 가라앉은 눈으로 영호관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순간 돌아선 그의 두 눈 깊은 곳에서 신광이 번뜩였다.
‘이제 돌은 던져졌다. 결과는 하늘만이 알 뿐. 관아, 부디 몸조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