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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154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9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154화

 

154화

 

 

 

 

 

 

공손량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저는 본천이 더 이상 가면을 쓴 채 살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헌아!”

 

공손무헌은 작정하기라도 한 듯 거침없이 가슴속에 뭉쳐 있던 말을 쏟아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결과도, 판단도 세상에 맡겼으면 합니다. 본천이 신마성을 물리쳐서 세상에 도움이 되었다면 세상 사람들이 저희를 향해 웃음을 줄 것이고, 해를 끼쳤다면 욕설을 퍼부을 겁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판단을 저희가 내리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내리는 거지요.”

 

“너 혹시……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보고만 있었던 것이더냐? 네 형이 세상으로 나가려 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면서도 나서지 않은 게 그 전설 때문이더냐?”

 

“제가 막았다 해도 형님은 세상으로 나갈 생각을 바꾸지 않으셨을 겁니다. 어쩌면 더 일찍 나가셨을지도 모르지요. 물론 그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만.”

 

“너는 조사님들께서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느냐?”

 

공손무헌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맑은 그의 두 눈 속에서 심적 갈등이 격랑의 파고를 넘나들었다.

 

“어릴 적 우연히 조상님 중 한 분이 남기신 고백서를 봤습니다. 저는 그게 단순히 꾸며낸 이야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크고 천상선원의 입구에 있는 그림의 진정한 뜻을 알고 나서 확실한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분들께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걸 말입니다.”

 

“그건 단순히 전설일 뿐이다.”

 

눈을 내린 공손무헌은 부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만약 사실이라면 어떡하겠습니까?”

 

공손량은 강하게 부인했다.

 

“아냐, 사실일 리가 없어. 그건 전설일 뿐이야!”

 

“아버님께선 팔백 년 전에 그려졌다는 천상선원 입구의 벽화(壁畵)를 물구나무서서 자세히 보신 적 있으십니까?”

 

“뭐라?”

 

“한번 보십시오.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공손량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둘째 아들인 공손무헌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뭔가를 봤다면 본 것이고, 있다면 있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 내용이 그곳에 있더냐?”

 

공손무헌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썹 사이에 이슬이 맺혔다.

 

“그날부터…… 하늘을 쳐다보는 게 겁이 났습니다, 아버님.”

 

그는 그날의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림의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선조들에게 반발하는 마음으로 물구나무를 섰을 뿐인데 그림 사이사이에서 묘한 글자들이 보였다.

 

 

 

후예들이여 진실을 보아라.

 

선이 악이고, 악이 선이니

 

천상은 선이 아니고, 유령은 마가 아니니라.

 

 

 

그뿐이 아니었다. 그 글을 읽고 그림을 자세히 살펴봤더니 마인들의 광폭한 얼굴이 겁에 질려 애원하는 표정으로 변하고, 천상신문 영웅들의 표정은 피에 미친 아수라로 바뀌었다.

 

그는 덜덜 떨면서 그대로 꼬꾸라졌다. 그리고 그날에서야 선조가 남긴 고백서가 사실임을 알았다.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산 것은 그때부터였다.

 

 

 

3

 

 

 

“내가 나오자마자 아버님이 아우를 불렀단 말이지?”

 

“예, 대공.”

 

“왜 불렀다고 보느냐?”

 

교비은은 공손무백의 질문을 받고 진실에 과장을 살짝 섞어서 대답했다.

 

“천주께서 대공을 만나신 후 이공을 부를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이공을 이용해서 대공의 뜻을 막겠다는 것이겠지요.”

 

“하긴, 그 이유가 아니면 이 밤에 부르지 않으셨겠지.”

 

나직이 뇌까린 공손무백은 눈을 감고서 검지로 의자손잡이를 느릿하게 두들겼다.

 

그가 심각한 고민을 할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교비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손무백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공손무백이 눈을 뜬 것은 반 시진가량 지난 후였다.

 

눈을 뜬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결국 나로 하여금 선택을 강요하게 하시는군. 조금 빠를지 모르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망설일 것도 없지.”

 

교비은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공, 천하를 얻기 위해선 피가 얼음보다 차가워야 합니다. 역대의 제왕들이 왜 제일 먼저 그들의 핏줄을 제거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공손무백의 눈이 교비은을 향했다.

 

“비은, 사유(四幽)를 모두 움직여라. 이 밤이 가기 전에 천승전의 주인을 제거하면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고 해.”

 

사유는 천외천에서 암암리에 자객으로 키워온 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문파의 주인이나 강호서열 백 위 이내의 고수들을 제거할 때만 움직였는데 주로 혼자서 임무를 수행했다.

 

간혹 임무가 막중할 때는 둘이 나선 적도 있긴 했지만 넷이 한꺼번에 나선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삼 년 전까지 천주의 사람이었다는 것인데 오히려 교비은은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천주의 사람이었던 그들이 공손무헌을 죽인다면 사람들도 공손무백을 범인으로 몰지 못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없지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은 천승전만이 아니었다. 처리할 때 천상궁까지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결정은 대공이 내리는 것이지 자신이 내리는 게 아니었다.

 

일단은 이공을 처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대공.”

 

 

 

4

 

 

 

‘음?’

 

차디찬 빗줄기가 등줄기로 후드득 떨어지는 기분.

 

운기행공에 열중하던 풍천은 흠칫하며 운기를 멈췄다.

 

자정을 넘은 시각. 밖에서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쉬지 않고 내리는 가랑비를 뚫고 정체 모를 섬뜩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그 기운을 느낀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자신이 잘못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뭉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풍천은 창문을 열어보았다.

 

짙은 어둠에 묻힌 불귀곡은 가랑비에 축축이 젖어서 음산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거, 기분 되게 찝찝한 밤이네.’

 

손을 쭉 뻗은 풍천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아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다시 운기행공을 하기 위해서 창문을 닫았다.

 

그런데 창문이 반쯤 닫혔을 때 그의 손이 멈췄다. 뭔가가 저만치에서 스쳐 가는 게 언뜻 보였다.

 

풍천이 아니면 누구도 볼 수 없는, 무엇인지 모습조차 확실치 않은 희미한 그림자였다.

 

문제는 자신이 조금 전에 느낀 섬뜩한 기운이 그 그림자를 본 순간 다시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어떤 놈들이 저런 괴이하고 사이하고 으스스한 기운을 흘리는 거지?’

 

그는 그 기운의 정체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곧 자신조차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영감에 이끌려서 창문을 뛰어넘었다.

 

그는 차디찬 빗물이 얼굴을 적신 후에야 자신을 밖으로 이끈 느낌의 정체가 불길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불귀곡에서 불길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은?

 

그러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그자가 노리는 사람은?

 

세 가지 질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에 부합된 세 명의 이름 역시.

 

‘빌어먹을! 끝내 터지는 건가?’

 

풍천은 자신이 봤던 희미한 그림자가 사라진 곳을 향해 빨랫줄처럼 쭉 날아갔다.

 

 

 

가랑비가 내리는 불귀곡에는 옅은 안개마저 자욱해서 불이 있어도 어둠 속을 살펴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사유는 그러한 환경을 적절히 이용해서 천승전으로 스며들었다. 일대에는 이십여 명의 호위무사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의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했다.

 

천승전 안으로 스며든 사유는 곧장 공손무헌의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천승전 안이 칠흑처럼 어두운데도 대낮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먼지 쓸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은밀한 움직임.

 

사유 중 첫째인 유일이 먼저 방문을 열고 스며들었다. 방문이 반쯤 열리도록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유이와 유사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고 방문이 닫혔다.

 

유삼은 그들과 함께 움직이지 않고 천장을 통해서 접근했다. 그때까지도 들리는 소리라고는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뿐이었다.

 

그들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한 사람은 정면으로, 한 사람은 천장으로, 두 사람은 좌우로 흩어져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공손무헌을 향해 쇄도했다.

 

목적은 살(殺)!

 

죽여야 할 자와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다.

 

제일 먼저 유일의 칼날이 소리 없이 어둠을 가르며 침상 위로 떨어졌다.

 

 

 

공손무헌이 적의 침입을 느낀 것은 방문이 열리고 첫 번째 그림자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을 때였다.

 

침입자는 철저히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밖에서 들리던 빗소리가 커지는 것까지는 막지 못한 것이다.

 

그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공손무헌 같은 절대고수의 감각을 일깨우기에는 충분했다.

 

감각이 깨어난 그는 몇 줄기 기운이 빠르게 다가오자 급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살기를 철저히 배제한 공격이 어둠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침상을 밀쳐서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벽을 향해 미끄러졌다.

 

무음의 칼날이 이불 위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빙글 방향을 틀어서 사선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벽을 타고 흘러내린 유삼이 공손무헌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벽 쪽으로 밀려났던 공손무헌은 한 손으로 벽을 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장력을 펼쳐서 검을 밀쳐내고 사선으로 튕겨졌다.

 

사선으로 그어진 칼날에 옷자락이 길게 갈라지고 섬뜩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순간 좌우로 다가가던 유이와 유사가 그를 덮치고, 정면을 공격했던 유일과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유삼도 한 점 망설임 없이 공세를 펼쳤다.

 

네 방위가 완벽히 막힌 채 시퍼런 검기 도기가 공손무헌을 뒤덮었다.

 

얽히고설킨 네 줄기 기운은 그물처럼 공손무헌을 조였다.

 

소리도 없고 어둠으로 인해 적의 공세를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 가능한 것은 감각으로 기운의 흐름을 느끼는 것뿐.

 

그러나 그마저도 최대한 감춰져서 확실치가 않았고 상대의 무기에는 강기나 다름없는 위력이 실려 있었다.

 

이를 악문 공손무헌은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며 사방을 향해 팔 장을 내쳤다.

 

일 대 사의 경력이 맞부딪치며 폭죽처럼 터졌다.

 

콰르릉! 떠더덩!

 

단단한 나무침상이 폭삭 주저앉고 천장이 뻥 뚫렸다.

 

강력한 충돌 여파에 사유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공손무헌도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등과 어깨, 다리 쪽에서 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팔성 장력을 막아낸 암습자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유?”

 

사유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전력을 다해서 공격했다.

 

상대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했다.

 

둘이면 되리라 여겼거늘 넷이 덤벼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듯했다.

 

공손무헌도 상대가 사유임을 알고 전 공력을 다 끌어올렸다. 그는 사유를 잘 알았다. 사유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친의 보이지 않는 손발이었으니까.

 

그랬던 자들이 왜 자신을 공격하는지는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다.

 

참담했다. 자신의 예측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형님, 결국 저를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리셨군요.’

 

형에 대해선 분노보다 측은함만 더해졌다.

 

무엇을 위해서 형제를 향해 검을 겨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공손무백을 탓할 때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사유를 상대하는 것은 자신이 절대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사유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목숨도 던질 수 있는 자객들이 아닌가.

 

그는 십성 공력으로 혼천무령기를 끌어올렸다.

 

그동안 남 앞에서는 자신이 혼천무령기를 익혔다는 걸 일체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남의 눈을 의식할 때가 아니었다. 사유를 물리치지 못하면 모든 게 끝장인 것이다.

 

한편 밖에 있던 호위무사들은 안에서 굉음이 들리자 난데없는 상황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라서 허둥지둥 천승전으로 달려왔다.

 

“이공! 무슨 일입니까?”

 

“암습자다! 이공을 구해!”

 

그러나 당장 천승전이 무너질 것처럼 요동치고 그 안의 어둠 속에서 경천동지의 격전이 벌어지는 판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짝 긴장한 채 눈만 부릅떴다.

 

바로 그때 천승전 뒤쪽의 지붕을 통해서 한 줄기 바람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다름 아닌 사유를 쫓아온 풍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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