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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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52화
152화
으드득!
이를 간 그는 풍천이 의자에 앉는 것을 노려보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네놈이 그런 수작을 부리다니. 당장 취소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서 취소해!]
전음이 어찌나 컸는지 머릿속이 왱왱 울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아서 입맛이 싹 달아났을 것이었다. 그러나 풍천은 어디서 개가 짓냐는 듯 태연히 요리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핏대가 솟은 양곽연은 탁자 밑의 손으로 바짓자락을 움켜쥐고 풍천의 목을 똑 따버릴 것처럼 잡아 비틀었다.
‘오냐, 일단 처먹어라. 다 처먹고 보자, 이놈!’
식사가 끝나고 차가 나오자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공손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초령이란 아이를 신검문에 보내서 천우와의 혼인에 대한 허락을 받을까 한다. 백무천도 우리에 대해서 모르지 않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구나.”
공손무헌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짐짓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천우가 흔들릴지 모르는데 괜찮겠습니까?”
공손량이 대답하기 전에 공손무백이 먼저 나섰다.
“그 정도에 흔들릴 놈이 무슨 폐관수련을 한단 말이냐? 아버님, 저도 그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백무천도 자기 딸이 이곳에 있다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공손량의 말에 대찬성이었다.
그로선 백초령이 불귀곡을 떠나는 게 나았다. 아니 마음 같아서는 둘 사이의 혼인 약조가 깨지는 걸 원했다.
공손무헌은 공손무백이 강력하게 나서서 공손량의 의견을 찬성하자 못 이긴 척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공손량은 차를 반쯤 비우고 풍천을 돌아다보았다.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어차피 강호의 단천무령도 뽑아야 할 터이니 말이다.”
혀로 이 사이에 낀 고기를 깔짝이던 풍천은 두말할 것도 없이 찬성이었다. 말은 탐탁지 않은 것처럼 얼버무렸지만.
“하라면 해야죠 뭐. 근데 언제쯤 가야 됩니까?”
“어차피 떠날 거라면 오래 있을 이유가 없지. 내일이라도 출발해라.”
풍천은 슬쩍 공손무백을 쳐다보았다.
입술도 까딱하지 않았는데 공손무백의 전음이 풍천의 귀청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해라. 그리고 백초령을 신검문에 데려다 준 후 적련방으로 가서 대기하도록 해라. 장로인 호자충을 찾아가면 머물 곳을 마련해줄 것이다.]
천외천의 힘이 천하에 퍼져 있다더니 구룡회 내에도 상당수가 스며 있는 것 같다.
천외천의 힘은 어디까지 퍼져 있는 걸까? 이러다 정말 천외천이 천하를 집어삼키는 것 아닐까?
풍천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일절 표를 내지 않고 마치 공손량의 말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먹고 출발하죠. 그런데 경비는 누구에게 받죠? 단천무령에게 줘야 할 수당도 몇 달 분을 미리 받아가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내일 출발하기 전에 지급하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천주.”
풍천은 즐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에게는 천외천이 금광처럼 여겨졌다.
그때 공손무헌의 전음이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혹시라도 형님의 명령이 떨어졌으면 일단 따르도록 하게. 그리고 이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흐르고 있네. 어쩌면 나 역시 생각보다 빠르게 강호로 나갈지 모르겠군.]
‘눈치 하나는 귀신이군.’
풍천은 새삼 공손무헌의 판단력에 감탄하며 어물어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풍천이 천상궁을 나가자마자 양곽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양곽연이 일어난 이유를 아는 사람은 공손량뿐이었다.
하지만 공손량은 양곽연을 말리지 않았다.
‘흘흘흘, 그 녀석을 다루려면 쉽지 않을 거야.’
3
풍천은 양곽연이 뒤따라온다는 걸 알면서도 느긋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거처를 백여 장 남겨놓은 상태에서 적당한 곳이 나오자 걸음을 멈추었다.
“저에게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풍천은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른 척 물어보았다.
눈을 치켜뜬 양곽연이 당장이라도 공격할 것 같은 표정으로 으르렁댔다.
“몰라서 물어?”
으드득 이를 간 그는 호랑이 눈을 씰룩이며 풍천을 몰아붙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해서 이향이를 꼬인 것이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향이를 포기해!”
하지만 풍천은 불길이 이는 양곽연의 호안을 고양이 눈 취급하고 태연히 말했다.
“참나, 아니 숙부라는 분이 그렇게 모르겠어요?”
양곽연은 당장 손을 쓸 것처럼 얼굴을 내밀며 소리쳤다.
“내가 뭘 모른단 말이냐!”
“공손 낭자는 말입니다, 지금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숙부라는 분이 조카의 소원을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면 되겠어요?”
“이향이의 몸만 좋다면 내가 왜 방해를 하겠느냐?”
아마 몸이 좋았어도 방해했을 것이다.
공손이향과 대풍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둘을 억지로 떼어놓다가 날벼락을 맞는 한이 있어도 둘이 함께 다니는 꼴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좌우간 죽어도 못 보내니 그렇게 알게!”
“대주께서 아무리 그래도 취소하고 싶지 않은데요?”
풍천이 끝까지 거부하자 양곽연은 싸늘한 한광을 번뜩이며 두 손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천주께 혼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대답을 듣고 말겠다.”
“정말 끝까지 이러실 거요?”
“흥! 자네가 자초한 일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양곽연은 스윽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쌍장을 앞으로 뻗었다.
주욱 뒤로 일 장가량 물러난 풍천은 몸을 반쯤 돌려서 양곽연의 장력을 한쪽으로 흘려보내고 천라신수로 맞대응했다.
우르르릉.
은은한 천둥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울리고 순식간에 십여 번의 손짓이 서로의 장세를 휘저었다.
양곽연은 풍천이 자신의 장세를 의외로 쉽게 해소하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자식, 검이 주무공이 아니었나?’
반면 풍천은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즐겁기만 했다.
상대는 호천대의 대주.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다. 천외천에서도 이십 위 이내에 드는 고수.
그런데 천라신수만으로 상대하는데도 밀리지 않는다.
‘좋았어!’
공손승 등을 상대하면서 어느 정도 느끼긴 했지만 막상 양곽연의 공세를 막아내고 보니 더욱더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상대가 전력을 다한 것 같진 않지만 그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 풍천은 천라신수를 자신 있게 펼치며 양곽연의 공세를 철저히 차단했다.
끊임없이 울리던 천둥소리가 멈춘 것은 오 초가 지났을 때였다.
양곽연은 진혼장만으로는 풍천의 장력을 뚫을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절기인 백단수(白丹手)를 펼치기로 작정했다.
‘오냐, 이놈! 어디 이것도 받아내자 보자!’
일순간 희고 붉은빛이 그의 양손에서 동시에 솟구쳤다.
풍천은 기이한 양곽연의 장력이 만근 압력으로 밀려들자 두 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서른여섯 개의 수영이 피어나며 양곽연의 장세를 뒤덮었다.
찰나, 일 장의 거리를 둔 채 두 사람의 장세가 정면으로 뒤엉켰다.
쿠구구궁, 우르르릉!
또다시 울리는 천둥소리!
바닥의 돌들이 가루가 되어서 사방으로 밀려나며 뿌연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풍천의 공세와 부딪친 충격에 세 걸음을 물러난 양곽연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런 개 같은 일이…….”
상대는 네 걸음을 물러난 상태. 거기다 얼굴마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뿐 부상을 입거나 크게 힘든 표정이 아니었다.
자신하던 절기인 백단수를 쓰고도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하다니.
만약 상대가 검을 쓴다면 이길 수 있을까?
‘공손승이 이놈을 어쩌지 못한 것도 이유가 있었군.’
양곽연은 온몸이 긴장되었다.
이러다 지면 무슨 창피란 말인가?
양곽연의 심리상태를 꿰뚫어 본 풍천은 망설이는 양곽연을 향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해봐야 어차피 승부가 쉽게 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쯤에서 멈추죠. 시끄러워지면 사람들이 몰려올 거고 양 대주님의 위신만 깎일 텐데요.”
그 말에 움찔한 양곽연은 이를 악물었다.
천주의 안위를 지키는 호천대주가 새파란 애송이 령주 하나 이기지 못한다면 천외천의 사람들이 뭐라 할 건가 말이다.
풍천은 흔들거리는 양곽연의 마음을 더욱 세게 흔들었다.
“강호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죠. 혹시 알아요? 공손 소저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의가 있을지. 그러니 그냥 보내주쇼.”
말리지 못한다 해서 순순히 허락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 양곽연은 코웃음으로 마지막 자존심을 세웠다.
“흥, 본천이라 해서 신의가 없는 줄 아는가? 천하의 누구보다 실력이 뛰어난 연자송도 이향이의 병만큼은 두 손을 들었네.”
“그 양반이 못 고친 병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도 고치지 못하란 법 있습니까? 그리고 돌아다니다가 천고의 영약이라도 얻을 수 있을지 누가 알아요?”
“영약은 이미 먹여봤네. 이향이가 먹은 영약만 해도 다섯 가지는 될걸?”
‘헛! 영약을 다섯 가지나! 그렇게 많으면 나도 하나 주지. 사람 차별하는군.’
입맛을 다신 풍천은 불만을 속으로 삭였다. 지금 영약 타령을 하면 양곽연의 분노만 키울 뿐이었다.
대신 그는 최대한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양곽연의 마음을 흔들었다.
“진짜 공손 소저를 위한다면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마쇼. 단 하나의 희망이 저 땅끝에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곳에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줄 알아? 나도 해볼 건 다 해봤네.”
“물론 저도 대주님이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 하, 하. 하지만 대주님이 미처 모르고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모르고 있는 것?”
“태산에 가면 불치병에 걸린 환자만 봐주는 기막힌 신의가 한 분 계시거든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는 분인데 저에게 신세진 게 있어서 제가 부탁하면 공손 소저의 몸을 봐줄 겁니다. 만약 그분도 어쩔 수 없다면 다음부터는 임무가 떨어져도 데려가지 않도록 하죠.”
어차피 ‘다음’이라는 것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니까.
귀가 솔깃해진 양곽연은 그쯤에서 한 발 물러섰다.
“정말인가?”
“물론이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저를 자라 새끼라고 욕하셔도 좋습니다.”
풍천은 천하제일의 신용을 지닌 사람처럼 당당히 말하고 양곽연을 직시했다.
양곽연은 그런 풍천이 사기꾼처럼 보였지만 마지못한 표정으로 풍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보내주지. 하지만 만약 이향이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각오해야 할 거네.”
풍천은 씩 웃으며 팔을 벌렸다.
“걱정 마십쇼. 그럼 저는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구름이 많이 낀 걸 보니 비가 올 것 같군요.”
4
교비은이 풍천을 찾아온 것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었을 때였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찾아왔는데 마치 풍천이 대공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겠다는 의도인 듯했다.
풍천은 느닷없이 찾아온 교비은이 칠채가 번뜩이는 구슬을 내밀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우와! 이거 황금 백 냥도 더 나가겠는데요?”
교비은은 그 모습을 보고 실소를 지으며 사실대로 말했다.
“삼백 냥은 족히 나갈 거네.”
“삼, 백, 냥!”
푹!
풍천이 앉았던 의자가 바닥을 반 치가량 파고들었다.
교비은은 그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엉덩이에 힘 좀 줬다고 의자가 딱딱한 나무 바닥을 파고들다니.
‘제법이군.’
하긴,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까 천응단의 포위망을 뚫고 도주했겠지.
오히려 그는 풍천의 실력이 제법 강하다는 것에 만족했다.
‘돈 값은 하겠어.’
그때 풍천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기요, 따로 시킬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하, 하. 뭐 다름이 아니라 이런 거금을 갑자기 주니 간이 떨려서 말이죠.”
‘멍청하게 생긴 놈이 눈치 하나는 빠르군.’
풍천의 반응에 만족감을 느낀 교비은은 짐짓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대공께서는 그대에게 아주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네. 그래서 백 냥 줄 것을 삼백 냥이나 준 거지.”
풍천도 목소리를 낮추고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갑자기 세 배나 주신 걸 보니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말씀하십쇼, 뭘 원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