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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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50화
150화
신예가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계속 놀리실 거예요?”
“아, 알았다. 하긴 너처럼 어린애가 그런 마음을 품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런데 막상 풍천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하자 신예가 새침한 표정으로 풍천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저도 이제 열다섯인데…… 그런 마음을 품어서 안 될 것도 없죠 뭐. 그렇다고 천우 공자님을 좋아한단 말은 아니구요.”
쪼끄만 게 어디서!
풍천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품는 거야 네 자유겠지. 하지만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사람들이 웃으니까.”
신예는 입술만 삐죽거리고 더 이상 말대꾸하지 않았다.
소녀의 방심이 얼마나 약한지 모르고 함부로 말하는 령주와는 그녀도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칫, 령주님은 좋아하는 여자도 없을 거야. 하긴 여자에게 저따위로 말하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
그녀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빈 찻잔을 들고 방을 나갔다.
풍천은 신예가 나가자마자 벌러덩 침상에 누워서 히죽히죽 웃었다.
‘그럼 그렇지, 초령이가 그렇게 제멋대로인 놈을 좋아할 리가 없지.’
3
탁.
공손무백은 주위를 환기시키듯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교비은은 기대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공,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렇게 보이나?”
조용히 웃은 그는 입안에서 굴러다니던 말을 밖으로 꺼냈다.
“맞아, 기분 좋은 일이 있지. 조금 전에 도룡단에서 사람이 왔다, 비은. 그들도 내 뜻을 따르겠다는군.”
그 말에 교비은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단 중 숫자 면에서 가장 많은 곳이 도룡단이었다. 그동안 중립을 지키고 있던 그들이 함께하기로 했다면 전체 전력의 칠 할이 넘어왔다는 말이었다.
“그럼 이제 천상선원의 노인네들을 설득하는 일만 남았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 늙은이들은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그들은 다수의 움직임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은천과 망혼은 여전히 천주님을 따른다고 봐야겠지요?”
“후후후, 그들은 아버님의 손발과 같은 자들이다. 처음부터 계산에 넣지도 않았지.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다른 자들을 끌어들이는 게 나았으니까.”
나직이 웃는 공손무백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교비은은 숨 막히는 압박감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때 공손무백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조용히 방 안을 울렸다.
“비은, 나는 원래 아버님의 뜻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면서 일을 추진하려 했다. 가족 간에 반목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그렇게 해선 안 될 것 같아.”
“하오면……?”
“아버님도 아버님이지만 무헌이 문제다. 만약 아버님이 전적으로 모든 권리를 무헌에게 넘기기라도 하면 자칫 문제가 커질 수도 있어.”
슬쩍 고개를 쳐든 교비은의 눈이 커졌다.
“천주의 용좌를 이공에게 넘긴단 말입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그것은 천외의 법에 어긋나는 일, 천주께서 억지로 밀어붙인다 해도 천상선원은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뜻을 펼치기 시작하면 기존의 법 중 상당수가 어차피 무용지물이 될 거다. 그럼 천상선원의 늙은이들도 굳이 천외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게 되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오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공손무백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말했다.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할 생각이야. 조용히, 아주 자연스럽게.”
“설마 천주와 이공을……?”
“후후후, 나를 너무 악한 사람으로 만들지 마라. 많은 피를 보지 않고도 정리할 방법이 있으니까.”
교비은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정리하기로 했으면 피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가 먼저 제안하고 싶어도 부친과 형제를 제거하라고 하면 어떤 역효과가 날지 몰라서 침묵했을 뿐.
그런데 대공은 그 두 사람을 제거하지 않고 억제하는 선에서 만족하려는 것 같다.
‘차라리 마음먹었을 때 제거하십시오. 그게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교비은은 목 안에서 맴도는 말을 끝내 밖으로 뱉어내지 못했다.
“대공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3
공손무백과 교비은 사이에 은밀한 이야기가 오가던 그 시각. 천상궁 내실에서도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공손량은 침중한 표정으로 공손무헌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백이가 도룡단까지 끌어들인 것 같다만.”
“본천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세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천외의 법도로서 붙잡기에는 너무 그 흐름이 강합니다.”
“막기에 늦었단 말이냐?”
“아버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공손량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공손무백 혼자만의 문제라면 걱정할 것 없었다. 그만 제재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의 씨앗이 이미 천외천 사람들 가슴에서 싹튼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이 막는다 해서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나도 알고는 있다. 하아, 그래서 문제다. 그냥 놔두고 하늘의 뜻에 맡겨둬야 할지 아니면 마지막까지 막아야 할지…….”
공손량은 말을 길게 끌며 공손무헌을 직시했다.
“너는 이 애비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느냐? 어디 솔직하게 말해봐라.”
공손무헌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부친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나약한 말이었다. 항상 결정만 내리던 입에서 남의 의견을 묻는 말이 나오다니.
‘아버님께서도 많이 약해지셨군요.’
평소라면 부친의 뜻을 존중해드렸을 것이다.
‘아버님은 하늘이십니다. 그러니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안 좋았다.
“정말 듣고 싶으십니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못 듣겠느냐?”
부친을 바라보는 공손무헌의 눈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배는 바람을 타고 선창을 떠난 상태. 순항하든 태풍을 만나 난파하든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아버님은 형님의 욕망을 알고도 너무 소홀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다. 너무 자만했어.”
“무공보다 마음을 다듬는 데 조금만 더 신경을 쓰셨다면 형님이 세상으로 눈을 돌린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옳다.”
“그리고 선(善)도 욕망에 물들면 악(惡)이 될 수 있다는 걸 아셨어야 합니다.”
공손량의 주름진 입술이 미풍에 떨리는 풀잎처럼 잘게 떨렸다.
“나도 사실 이 정도까지 변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지요.”
잘게 떨리던 공손량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수습할 방법이 있단 말이냐? 어디 말해봐라.”
공손무헌은 여전히 무심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형님은 현재 자신을 따르는 사람만 데리고 세상으로 나가려 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를 얻으면 둘을 얻고 싶고, 아홉을 얻으면 나머지 하나를 얻어서 열을 채우고 싶은 게 인간의 욕심이지요.”
공손량의 잔주름 가득한 눈꺼풀이 파르르 요동쳤다.
“설마 이 애비에게 검을 겨눌 거란 말이냐?”
“형님의 성격상 많은 피를 보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 적은 피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려 할 겁니다. 물론 그 피는 절대 아버님의 피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천외천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진심으로 따르지 않을 테니까요.”
“네 말은…… 무백이가 너를 해칠 거란 말이냐?”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지요.”
“그건 절대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형제간에 피를 보는 건 용납할 수 없느니라.”
“저도 형님의 손에 당해서 아버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정말 괜찮겠느냐?”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에 대해선 차분히 말씀드리지요.”
“네가 그리 말하니 조금 안심은 된다만…….”
“그보다 백초령과 대풍을 내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무백이 백가 여아를 인질로 잡으면 천우가 힘들어질 게야.”
공손무헌은 공손천우 때문에 그들을 내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풍, 그가 얼마나 변수가 될지 그게 문제군.’
대풍의 움직임이 미풍으로 그칠지 아니면 태풍으로 변할지. 그에 따라 대응방법은 달라질 것이었다.
4
풍천은 무심헌 뒷마당에 우뚝 서서 검을 사선으로 늘어뜨리고 반개한 눈으로 전면의 허공을 응시했다.
요 며칠, 그는 불귀곡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대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광양검을 익히는 것에 몰두했다.
‘뇌정천결을 깨닫지 못한 이상 최소한 광양검의 두 번째 초식이라도 익혀야 돼. 그래야 위험이 닥쳐도 초령이를 구해서 빠져나갈 수 있어.’
광양검은 절대지경의 검공.
천풍무영류와 환신술을 익힌 그가 광양검마저 익힌다면 누구도 겁날 게 없었다. 그런데 뇌정천결보다도 뒤떨어지는 주제에 생각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첫 번째 초식, 승광은 그럭저럭 흉내 낼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문제는 두 번째 초식, 탄유(彈柔)였다.
‘아 그거, 정말 어렵네.’
뇌정천결의 심오함을 상대해본 풍천은 광양검이 얼마나 익히기 힘든 절대의 검결인지도 모르고 투덜댔다.
그가 광양검의 두 번째 초식을 익히고 있다는 걸 공손량이 알면 턱이 빠질 정도로 놀랄 것이거늘.
‘부드럽게 쏘아진다? 쏘아진 기운을 자유자재로 부드럽게 조절한다?’
초식이 지닌 뜻 자체는 그럭저럭 이해할 것 같았다. 그걸 실현하기가 쉽지 않아서 문제지.
‘날아가는 화살에 자신의 기운을 연결해서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거기다 본신진기가 고스란히 실린다면……?’
한참을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내둘러 머릿속에 가득한 복잡한 요결을 털어냈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일단 정신을 집중하고…….’
때로는 요결의 뜻에 집중하는 것보다,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몸이 스스로 반응하도록 놔두는 것이 더 나은 법이었다.
급한 마음을 비운 풍천은 탄유의 검결만 반복해서 암송하며 굳이 뜻을 풀이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날 즈음, 머릿속 의념의 세계에서 하나의 검이 만들어졌다. 광양검의 기본인 심검이 만들어진 것이다.
승광은 굳이 그 심검을 외부로 운용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탄유는 반드시 그 심검을 외부로 끌어내야만 했다.
이제 그 심검을 진검에 담을 차례.
풍천은 검과 정(精), 기(氣), 신(神)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무형의 검을 유형화시켜서 검에 담으려 했다.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마음을 비워서인지 몰라도, 의념의 세계에 있던 심검이 손에 들린 진검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오오오, 된다, 돼!’
풍천은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더욱더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가슴을 옥죄는 강력한 기운이 뒤쪽에서 빠르게 밀려들었다.
‘어? 뭐야? 어떤 인간이······!’
순간, 진검에 담기려던 심검이 멈칫하며 검첨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때 고막을 파고드는 늙수그레한 목소리.
“네놈이 전설을 들먹였더냐?”
그와 동시, 진검에 반쯤 스며든 심검이 안개처럼 흩어지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아, 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