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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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87화
187화
순식간에 삼 장을 미끄러지던 그의 몸이 어느 순간 멈칫했다.
검첨이 절벽의 갈라진 틈에 낀 것이다.
십여 장 높이에 매달린 상태가 된 이곡은 다급히 진기를 다스렸다.
옆구리에서 시작된 극렬한 고통이 전신으로 치달리자 진기가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제길, 내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된 거지?’
마누라 살 빼려고 강호에 나왔다가 풍천을 만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마누라, 그러게 살 좀 미리 빼라니까, 왜 안 빼서 나를 이 고생시켜!’
풍천은 물론이고 마누라까지 원망스러웠다.
“내려와라! 내려오면 죽이지 않겠다!”
아래쪽에서 추적자들이 소리쳤다.
갈등이 일었다.
정말 안 죽일까?
이곡은 쓴웃음을 지으며 툴툴댔다.
‘크크크, 그런데 왜 이렇게 마누라가 보고 싶지?’
어차피 이대로 매달려 있으면 옆구리를 통해서 피가 다 빠져 죽을 터. 죽기 전에 마누라를 한 번이라도 더 봤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뚱뚱해도, 원망스러워도 자신의 마누라가 아닌가.
이를 악문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 사람이 반원형으로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이 양손에 비수를 들고 있었다.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것이 그자가 던진 비수인 듯했다.
‘저 새끼군.’
이곡은 그를 노려보며 물어보았다.
“정말…… 죽이지 않을 거요?”
“후후후, 물론이다. 순순히 잡힌다면 살려주지.”
“알았소, 그럼…….”
이곡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하고는 절벽의 틈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사오 장 더 미끄러지다가 절벽을 밀치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밑에 있던 자들은 이제 잡았다는 표정으로 절벽에서 떨어지는 이곡을 올려다보았다. 비수가 박힌 옆구리에서 흐른 피가 점점이 빗방울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저대로 떨어지다 잘못하면 죽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굳이 구하려 하지는 않았다. 살려서 데려간 것만 못할 뿐, 시신을 가져가면 기본적인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런데 빠르게 떨어지던 이곡이 삼 장 높이에서 갑자기 몸을 틀었다.
순간 바람에 낙엽이 날리듯 이곡의 몸이 옆으로 흘렀다.
“엇?”
비수를 든 자는 이곡의 몸이 자신 쪽으로 떨어지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올리며 피하려 했다.
하지만 떨어지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그가 경각심을 가졌을 때는 이미 이곡의 몸이 그의 머리 위까지 당도한 후였다.
찰나! 이곡의 몸이 홱 뒤집어지며 한 줄기 소리 없는 번개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비수를 든 자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틀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속도까지 더해진 이곡의 일격은 말 그대로 전광(電光)이었다.
푹!
꼬챙이검은 목표인 백회혈에 꽂히진 않았지만 비수를 든 자의 목을 그대로 꿰뚫었다.
이곡은 상대의 목에 검을 꽂고 그 힘을 이용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속도를 최대한 줄였다.
목에 꽂힌 검이 가슴뼈까지 갈라버리고 심장마저 반으로 쪼개버렸다.
분수처럼 뿜어진 핏줄기가 이곡의 전신을 붉게 물들였다.
바닥에 내려서서 떼굴떼굴 세 바퀴를 구른 이곡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크크크, 맛이 어떠냐, 이놈.”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서 바라본 두 사람은 노성을 내지르며 이곡을 덮쳤다.
“네놈이 감히!”
“이 찢어 죽일 놈이!”
이곡은 애초부터 그들과 맞설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옆구리에 박힌 비수로 인해서 공력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죽을 수는 없는 일. 그는 한 걸음이라도 더 도망치겠다는 듯 꼬챙이검을 앞으로 뻗은 채 사력을 다해서 뒤로 물러났다.
달려들던 두 흑의인 중 하나가 검을 휘둘렀다.
쩡! 쩌정!
단 세 번의 부딪침 만에 이곡의 꼬챙이검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쉬익!
또 다른 흑의인의 도가 허공을 갈랐다.
옷자락 앞섬이 길게 갈라지면서 이곡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물러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흥! 더 도망가봐라, 이놈!”
“네놈의 혼까지 잘게 쪼개주마!”
두 흑의인은 이곡을 농락하면서 분노를 풀었다.
순식간에 이곡의 옷자락이 넝마처럼 변하고, 갈라진 옷자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이곡은 힘이 빠져서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물러났다. 때로는 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때로는 두 손까지 이용해서 기다시피 달렸다.
두 흑의인은 이곡을 놀리며 좌우로 따라갔다.
천혈오사 중 하나가 저따위 비리비리한 놈에게 죽다니!
검을 든 자, 천혈오사의 첫째인 종은척은 분노의 살광을 뿜어내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죽일 놈, 네놈이 감히 넷째를 죽이다니……, 팔다리의 근맥을 모조리 잘라주마. 힘이 모조리 빠지면 기분이 아주 좋을 거다, 이놈.”
천혈오사의 둘째 오적술이 이곡을 향해 도를 뻗었다.
넘실거리는 도기가 금방이라도 이곡을 덮칠 것 같았다.
“흐흐흐흐, 땅바닥에 누워서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면 볼만 하겠군.”
그때였다.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오적술의 손목을 휩쓸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손목을 빙 둘러서 피가 뿜어졌다.
“엇?”
오적술은 자신의 손목에서 뿜어지는 피를 보고 눈을 홉떴다.
순간 그의 손목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옆으로 미끄러지고, 뭉툭한 손목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크억! 내 손!”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그는 손목을 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하늘만큼이나 시퍼런 검광이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이곡은 자신의 눈앞으로 굴러온 오적술의 머리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크크,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정말 원망했을 텐데…….”
그러나 종은척의 마음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환영을 본 것이 아닐까?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선 그는 전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누, 누구냐?”
“알 것 없어.”
고저 없는 나직한 말투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울렸다.
풍천의 목소리. 추적자의 흔적을 쫓아온 그가 간발의 차이로 이곡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종은척은 유령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자 다급히 검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쩌저정! 서걱!
감각적인 반응으로 간신히 풍천의 공격을 막은 그는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을 물러난 후 눈을 부릅떴다.
잘려나간 가슴 옷자락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한겨울의 북풍한설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모, 모습을 보여라! 감히 천혈궁의 일을 방해하겠다는 거냐?”
그는 천혈궁을 들먹이며 상대를 압박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거대한 손이 얼굴을 덮어왔다.
“헉!”
대경한 그는 전력을 다해서 뒤로 몸을 튕겼다.
하지만 거대한 손은 그림자처럼 그를 쫓아가며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퍽!
가슴이 콱 막힌 종은척은 입을 쩍 벌린 채 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풍천은 그를 따라가며 냉정하게 검을 그었다.
시퍼런 검기가 허공을 길게 가른 순간, 종은척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억!”
뒤이어 종은척의 팔과 뒤꿈치 쪽에서 피가 뿜어졌다.
“이 형의 사지근맥을 자른다고? 기분이 좋을 거라면서 왜 인상을 쓰지?”
차가운 목소리가 나직이 울리는가 싶더니 풍천의 모습이 종은척의 앞에 나타났다.
종은척은 구르는 것을 멈춘 후로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가 이곡에게 말했던 것처럼 사지근맥이 모조리 잘린 것이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면서 풍천을 올려다보았다.
“이, 이, 악독한 놈. 구, 궁주께서…… 네놈을 나보다 열 배는 더…… 참혹하게 죽일 것이다.”
풍천은 거북이처럼 바닥을 기고 있는 종은척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왜 당신을 살려줬는지 알아? 천혈궁을 박살 내고, 구인창을 지옥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도움을 좀 받을 게 있거든.”
“무, 무슨 미친 소리……?”
“우선 이 형의 부상부터 돌봐야 하니까 조금 이따가 시작하자고.”
공손이향 등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후였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풍천에게 다가갔다.
한쪽에는 머리와 손목이 잘린 시신이 쓰러져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흑의인 하나가 누워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리고 풍천은 이곡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한 광경이었다.
“많이 다쳤어요?”
풍천에게 가까이 다가간 공손이향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는 안 다쳤는데, 치료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어요.”
앞뒤가 조금 안 맞는 말이었다. 많이 안 다쳤는데 왜 치료 기간이 오래 걸린단 말인가?
“얼마나 다쳤는데…….”
“옆구리에 비수가 박혀서 내장이 조금 상했어요. 많이는 아니고…… 그리고 여기저기 상처 입은 곳이 많긴 한데,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는 두어 군데밖에 없어요.”
공손이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허무정과 마동춘도 눈을 깜박이며 풍천과 이곡을 번갈아 보았다.
결국 공손이향이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게 많이 안 다친 거예요?”
“이 정도 부상이야 해결사에게는 항상 붙어 다니는데요 뭐. 그냥 놔둬도 오늘내일 죽을 정도는 아니고.”
그때였다. 이곡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나직이, 길게 내질렀다.
“아흑, 아아……!”
풍천은 이곡을 내려다보았다. 비수를 빼낸 이곡의 옆구리 상처 속으로 손가락 하나가 들어가 있었다.
그는 재빨리 손가락을 빼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 미안해서 어떡하죠?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깜박하고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네.”
공손이향 등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말을 걸수록 이곡만 괴로워질 것 같았다.
풍천은 이 각에 걸쳐서 이곡의 상처를 꼼꼼히 감쌌다.
그러잖아도 몸이 빼빼 마른 데다 어찌나 많은 곳을 싸맸는지, 마치 통나무를 천으로 꽁꽁 둘러서 감싼 것 같았다.
“이제 다 됐군. 그럼 이제 저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어볼까?”
풍천은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료를 하면서 이곡에게 사정을 들은 터. 이제 동암 분타의 상황을 알아야 했다.
종은척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이곡을 치료할 때와 달리 푸르스름한 빛마저 번뜩일 정도로 차가웠다.
종은척은 사지근맥이 잘린 데다 혈도마저 짚여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정신마저 잃은 것은 아니었기에 풍천의 말을 듣자 몸이 다시 떨렸다.
풍천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조용조용히 물어보았다.
“동암에 어떤 사람들이 왔는지 말해보쇼.”
종은척은 입을 꾹 다문 채 풍천만 노려보았다.
풍천은 이곡의 몸에서 빼낸 비수로, 숯불 위에 올려놓은 고기가 다 익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종은척의 몸을 쿡쿡 쑤셨다. 그것도 고통이 심한 곳만 골라서.
종은척은 이를 악문 채 눈만 부릅떴다. 그리고 풍천을 노려보며 안간힘을 다해 뭔가를 요구했다.
“대답하라니까 왜 노려보기만 해?”
풍천은 짜증이 난다는 투로 말하며 관절에 찔러 넣은 비수를 비틀었다.
종은척은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눈빛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 공손이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령주, 혹시 아혈이 짚여 있는 것 아니에요?”
“음? 아, 깜박했군.”
풍천은 그제야 종은척의 아혈을 풀어주고 씩 웃었다.
웃는 그의 눈에서 귀기처럼 푸르스름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이 미친…….”
종은척은 강하게 따지려다가 풍천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놈처럼 보였다. 이런 놈에게는 따져봐야 보복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풍천은 조금 전보다 약간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대답해보쇼. 어떤 자들이 몰려온 거요?”
종은척은 그 목소리에 가슴이 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