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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183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6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183화

 

183화

 

 

 

 

 

 

마혈수 안평은 천혈궁에서도 알아주는 악독한 자다. 사정 봐줄 이유가 티끌만큼도 없었다.

 

“아, 안……!”

 

안평이 눈을 부릅뜬 순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그의 왼쪽 가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쾅!

 

안평의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이 장 밖으로 날아갔다. 바닥에 떨어진 그가 몇 번 부들부들 떨고 곧 조용해졌다.

 

동암 분타의 무사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숨 한 번 쉬고, 눈알 두어 번 굴리는 사이 안평이 죽었다.

 

정말 팔이 잘리고 심장이 터져서 날아간 자가 안평일까? 

 

의문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시신은 눈앞에 있고, 죽은 자는 분명 안평이었다.

 

숙주오마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손쓸 새도 없이 안평이 죽다니! 대체 어떤 자들이란 말인가?

 

첫째인 우이태는 이를 악물고 눈알을 굴렸다.

 

후회막급이었다. 전쟁에 끼어들어서 한몫 잡으려고 찾아왔거늘, 하필 택한 곳이 지옥의 불구덩이 속이라니!

 

그는 살기 위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얼음구덩이에 빠진 기분이 드는가 싶더니, 소름끼치는 장력이 밀려들었다.

 

 

 

공손이향과 우이태가 격전을 벌인 지 십오 초가 지날 무렵.

 

쾅!

 

빙백한천장이 한여름 밤의 어둠을 얼려버리며 우이태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끄억!”

 

우이태는 입을 떡 벌린 채 뒤로 튕겨져서 몸을 벌벌 떨었다.

 

주먹이 들어갈 만큼 크게 벌어진 그의 입에서 선혈 대신 하얀 냉기가 흘러나왔다.

 

얼굴과 머리카락에도 서리가 내린 듯 하얀 냉기가 서려 있었고, 부릅뜬 눈의 실핏줄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우이태는 안간힘을 다해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더니 결국 세 걸음째에서 한겨울 강추위에 얼어 죽은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로써 숙주 일대를 주름잡던 숙주오마가 모두 지옥으로 달려갔다.

 

하나는 허무정을 말대가리라고 말했다가 목이 달아났고, 셋은 고복수와 남궁도영에게 죽임을 당한 채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이태를 팔한지옥으로 밀어 넣은 공손이향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남궁도영과 허무정, 마동춘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면사를 쓴 그녀가 어둠 속에 오롯이 서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도 쉬지 못하게 할 만큼 신비스러웠다.

 

하지만 풍천은 그들이 그녀를 보며 침을 흘리도록 놔두지 않았다.

 

안평과 숙주오마를 비롯해서 동암 분타 무사들 중 고수라 할 수 있는 자들 칠십여 명을 죽였다. 그 정도면 동암 분타를 공격한 목적은 달성된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악진표와 감능하를 구해야 할 때.

 

“뭐해요? 앞으로 가서 악 형과 감 형을 도와주쇼! 빨리 끝내고 갑시다!”

 

 

 

오기가 생긴 악진표와 감능하는 오늘 밤 전설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비록 상대가 이, 삼류의 하수들이라 해도 백 명이 훨씬 넘는 숫자다. 둘이서 백 수십 명을 물리친다면, 한동안 동암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지 않겠는가 말이다.

 

피바다가 된 연무장에 오롯이 서서 무게를 잡는 모습을 상상하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고.

 

하지만 반 각이 지나자 전설이고 지랄이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옷은 이미 피로 젖어서 비 맞은 것처럼 축축했고,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죽어 널브러진 자와 달려드는 자들뿐이었다.

 

몇 명이나 죽인 걸까?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살이 갈라지는 고통!

 

얼마나 다친 걸까? 그런데 왜 이렇게 고통이 짜릿하지?

 

거칠어진 호흡, 검을 쥔 손이 얼얼하다.

 

‘지미,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그냥 도망칠까?’

 

조금만 더 지나면 도망치고 싶어도 힘이 없어서 도망칠 수 없을 것 같다.

 

설마 도망쳤다고 죽이진 않겠지?

 

이심전심(以心傳心). 등을 마주 대고 돌아선 채 적을 상대하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돌아다보았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련가. 악진표는 감능하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임을 눈치채고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소. 갑시다.]

 

[알았소.]

 

악진표는 전면을 막고 있는 자들을 향해 검을 뿌렸다.

 

“차앗!”

 

쉬쉬쉭!

 

강력한 검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퍼져 나갔다.

 

포위망을 좁히던 무사들은 방어에 치중하던 악진표가 공세를 펼치자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악진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땅을 박찼다.

 

“지금이오, 감 형!”

 

감능하도 뒤질세라 전력을 다해서 검을 뻗었다. 그리고 적들이 뒤로 물러서는 걸 보며 신형을 날리기 위해 두 다리에 공력을 집중했다.

 

바로 그때였다.

 

저만치 풍천을 비롯한 단천무령들이 건물을 돌아 나오는 게 아닌가!

 

감능하는 재빨리 마음을 바꾸고 좀 더 힘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차아앗! 죽일 테면 죽여봐라! 나를 죽이기 전에는 한 놈도 못 간다!”

 

막 담장을 넘어가려던 악진표는 감능하의 고함소리에 머리끝이 쭈뼛 서자 홱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도 풍천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화등잔만 하게 보였다.

 

번개처럼 상황을 짐작한 그의 얼굴이 송충이를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이런, 배신자!’

 

악진표는 담장을 향해서 발을 쭉 뻗었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풍천의 등장에 놀라서 신형이 하락했는지 몰라도 발끝이 가까스로 담장에 닿았다.

 

‘제발!’

 

그는 사력을 다해서 엄지발가락으로 담장을 찍고, 바깥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버텼다.

 

온몸의 체중이 실린 데다 날아가던 힘까지 더해져서 발가락관절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담장 위에서 정지시켰다.

 

그리고 다시 두 발에 힘을 주고, 검신일체가 되어서 연무장으로 날아가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내가 도망치는 줄 알았느냐? 어림없다, 이놈들!”

 

 

 

풍천 일행은 일직선으로 포위망을 갈랐다.

 

멋모르고 달려들던 무사 이십여 명이 낫에 잘린 수수처럼 우수수 쓰러지고, 연무장에 그만큼의 시신이 더 늘어났다.

 

“안평과 숙주오마는 모두 죽었다! 네놈들도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분타주와 숙주오마가 죽었다고?

 

공포에 질린 동암 분타의 무사들은 달려들 생각도 못 하고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풍천은 말 몇 마디로 백 명에 가까운 무사들의 사기를 꺾어버리고 감능하와 악진표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피에 절어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수고했수. 이제 그만 떠나죠.”

 

그도 악진표가 담장까지 갔다가 돌아온 이유를 모르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못 본 척했다.

 

 

 

5

 

 

 

스스스스스.

 

구룡회 칠백 무사는 새벽이슬이 매달린 풀잎을 스치며 달렸다.

 

손에 들린 무기에선 달빛을 받아 싸늘한 광채가 빛났고, 눈에선 달빛보다 더 차가운 살기가 번뜩였다.

 

그들은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잔뜩 긴장한 채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내달렸다.

 

칠백 무사가 달려가는 곳은 저주에서 오십 리 떨어진 황곡의 비원장. 패웅보에 웅크리고 있는 신마성의 전진기지였다.

 

장원까지 곧장 달릴 것 같던 그들은 비원장에서 삼백 장가량 떨어진 언덕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선두에서 세 사람이 만났다.

 

탁능한, 담청, 그리고 구양곤.

 

비원장 공격에 삼대세력의 수장이 직접 나선 것이다.

 

탁능한은 멀리 보이는 비원장을 보며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직 적은 우리의 움직임을 모르는 것 같소이다. 탁모가 정면을 칠 것이니, 각주께서 좌측을, 방주께서 우측을 맡아주십시오.”

 

탁능한의 말에 구양곤은 비원장을 노려보았다.

 

어두울 때 부가장을 출발해서 은밀하게 이백 리를 달려왔다.

 

이백 리 길에 미리 정보원들을 깔아서 철저히 적의 움직임을 살펴본 상황. 아직 자신들의 움직임이 패웅보에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십 년 만인가?’

 

구양곤은 격전을 앞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규모 싸움에 직접 나선 게 정확히 십 년 육 개월 만이었다. 오랜만에 무사의 피가 끓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어 번의 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탁능한과 담청에게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았다.

 

“너무 오래 끌면 안 될 것이오. 계획대로 반 시진 동안 놈들을 치고 빠져나오도록 하시오.”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말.

 

탁능한은 별걱정 한다는 표정으로 냉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 시간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럼 시작하지요.”

 

탁능한의 말이 떨어지자 담청이 먼저 몸을 돌렸다.

 

“반 단주.”

 

그가 부르자 오 장 뒤에 있던 반소규가 앞으로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방주.”

 

“우리가 우측을 친다. 적암단이 선두를 맡아라. 시간은 반 시진. 그 안에 놈들의 목을 최대한 취해라.”

 

“존명.”

 

“출발해.”

 

담청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천붕성과 검각의 무사들도 일제히 움직였다.

 

 

 

달빛 아래 개미처럼 몰려오는 자들이 보인다. 창백한 광채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의 은빛 비늘처럼 반짝인다.

 

비원장 안의 이층 전각 어둠 속에서 창문을 통해 그 광경을 바라보던 혁련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냉소를 지었다.

 

‘훗, 이곳이 지옥의 입구인 줄도 모르고 잘도 오는군.’

 

패웅보에 정보 하나가 전해진 것은 전날 석양이 지기 직전이었다. 누가 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보가 거짓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이건 진짜다!

 

설령 거짓이어도 크게 손해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 그는 그 즉시 패웅보의 무사들 중 최고의 정예 삼백을 추렸다.

 

많은 숫자는 적의 눈을 속이기도 힘들고 경계심만 더해줄 뿐, 그 정도면 적당했다.

 

정예를 추린 그는 구룡회의 정보망에 들키지 않도록 인원을 소수로 나누어서 비원장으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어스름이 밀려오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드디어 구룡회의 무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직이 명령을 내렸다.

 

“놈들이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공격을 늦추시오. 공격이 시작되면 퇴로를 확실하게 차단하고. 그럼 각자의 위치로 가시오.”

 

뒤에 서 있던 신마성 간부들과 마도고수들은 살기를 번뜩이며 전각을 빠져나갔다.

 

남은 사람은 운조평과 등청뿐.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간 혁련후는 뒷짐 진 손을 풀어서 옆구리의 검을 쥐었다.

 

‘천붕도제 탁능한. 오제 중 하나라 했던가? 그를 상대해보면 백무천의 무위를 알 수 있겠군.’

 

 

 

 

 

제4장. 물고 물리고……

 

 

 

 

 

1

 

 

 

풍천이 동암 분타를 풍비박산 내고 떠난 다음 날 오전.

 

천혈궁의 내전에서 분노에 찬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뭐야? 동암 분타가 박살 났다고? 안평이 죽어?”

 

구인창은 커다란 용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솟구쳤다.

 

엎드려 있던 장한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궁주! 동암 분타를 찾아왔던 숙주오마도 모두 놈들에게 죽었사옵니다.”

 

“남궁세가라도 쳐들어왔단 말이냐?”

 

“그건 아닌 것 같사옵니다. 모두 열 명쯤 됐는데…….”

 

“뭐라? 열…… 명?”

 

구인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장한을 노려보았다.

 

그때 구인창의 좌측에 앉아 있던 뚱뚱한 노인이 장한에게 물었다.

 

“놈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냐?”

 

그는 천혈궁 최강의 무력단체인 천혈단의 단주, 거령마부(巨靈魔斧) 하위경이었다.

 

“모두 처음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단주.”

 

구인창은 장한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단 열 명으로 동암 분타를 풍비박산 낸 자들이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든 그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 중년인은 도관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사우였다.

 

사우는 구인창이 바라보는 의미를 깨닫고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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