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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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81화
181화
장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초웅을 째려보며 툭 쏘아붙였다.
“그냥 형이라고 부르면 되지, 이놈아.”
‘거기서 왜 주인이 어떻고 하는 말이 나와? 하여간…….’
그때였다. 식당 쪽에서 한 사람이 쭈뼛거리며 나오더니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해동산이었다.
“장 어르신, 몸은 괜찮습니까요?”
“너, 어떻게 된 거지……?”
“도망치다 다쳐서 치료를 하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요.”
사실은 그의 말과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는 본래 남창으로 가려고 했다. 천외천이라는 신비단체도 두렵고, 천의맹에게 쫓기며 살 수는 없었다. 자신이 살아야 동생의 복수도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장강을 건너 구강으로 들어가자 신마성 무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잡으려 했다.
신마성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해동산의 집에 수상한 사람이 머물렀다는 걸 알고, 해동산을 잡기 위해 초상화를 돌린 것이다.
해동산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후회하며 죽어라 도망쳤다.
풍천에게 받은 돈으로 인피면구만 샀더라도 저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텐데!
어쨌든 겨우겨우 신마성 무사들을 따돌린 그는 남은 돈을 모두 써서 장강을 건넜다.
그리고 이틀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 천풍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은 천풍장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 노인은 어차피 그런 사정을 모를 터. 해동산은 그렇게만 말하고 눈치만 봤다.
해동산을 바라보는 장 노인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녀석, 제때 돌아왔군.’
초웅은 덩치가 너무나 커서 사문의 절기를 이어받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제자가 아닌 손자로 삼은 것이다.
반면 해동산은 살수로서 자질이 아주 훌륭했다. 처음에 잘못 배워서 그 능력을 제대로 못 살렸을 뿐.
더구나 해동산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다는 걸 호가장에서 알게 된 후로, 그는 해동산이 돌아오면 사문의 절기를 전해야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낙심했는데, 때마침 해동산이 돌아온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너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관추양은 풍천이 안휘로 갔다는 말을 듣고, 이대로 천풍장에 머물면서 그가 오기를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안휘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신마성과 구룡회의 전쟁이 전 강호가 주시하는 초미의 관심사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그의 입장에선 그 일에 끼어드는 것보다, 힘을 길러서 은인의 복수를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마침 천풍장은 무공을 수련하기에 적당한 곳. 그는 그곳에서 최근에 깨달은 도법을 더욱 완벽히 다듬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가 천풍장에 도착한 다음 날 오전이었다.
2
관추양은 장원 뒤쪽의 수련장에서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칼을 휘두르고 있는 초웅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 큰 칼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니!
저렇게 큰 칼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니!
관추양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했다.
초웅의 초식 운용은 아직 서툴렀다.
하지만 초웅의 도세에는 서투른 초식 운용을 덮고도 남을 만큼 강맹한 위력이 실려 있었다.
만약 초웅이 자신만큼 초식 운용에 능숙해진다면? 저 도세에 강맹한 공력이 실린다면?
문득 그 생각이 들자 전율이 일었다.
‘이제부터 천하의 도객들이 모두 긴장해야겠군.’
그때 초웅이 그를 발견하고 헤벌쭉 웃었다.
“어? 형도 수련하려고 나온 거야?”
스스럼없는 초웅의 반말이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진다.
관추양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초웅에게 다가갔다.
“도법을 배운 지 얼마나 되었지?”
“한 달 됐어.”
한 달?
관추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이가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한 달 익힌 도세가 일류 고수와 맞먹을 정도라니.
“어디 네가 배운 도법을 전부 펼쳐봐라.”
“알았어.”
초웅은 일절 토를 달지 않고 커다란 칼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풍천에게 배운 절환도법과 장 노인에게 배운 흑살도법을 신이 나서 펼쳤다.
관추양은 초웅이 도법을 모두 펼칠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의 안목을 충족시켜줄 만한 수준의 도법은 아니었지만, 두 가지 모두 예사롭지 않은 도법이었다.
더구나 살수의 칼이었다.
반면 초웅은 항우가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보일 만큼 패의 화신.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느껴졌다.
관추양은 초웅이 삼십이초의 도법을 모두 펼칠 때까지 모종의 이유로 깊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초웅이 도법을 다 펼치고 칼을 거두자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어쩌면 초웅이야말로 패천십삼도(覇天十三刀)의 진정한 주인일지도 모르겠군.’
그가 익힌 패천십삼도는 이름 그대로 극한의 패도(覇道)를 추구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사신도라는 별호를 붙여준 것도, 칼처럼 끊고 맺는 그의 성격이 원인이라기보다 냉혹하리만치 패도적인 도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패도적인 패천십삼도를 얻고 나서 십이 년이나 수련했는데 아직도 도법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완성하지 못했다기보다 패천십삼도를 펼칠 때마다 항상 삼 푼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자질이 떨어져서 그런 것일까? 공력이 부족해서? 그도 아니면 자신의 수련 방법이 잘못되었던 걸까?
그는 원인을 다각도로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데 오늘, 마침내 그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아주 간단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자질도, 공력도 아닌, 패도적인 도세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몸집과 패기였다.
삼백 년 전에 패천십삼도를 창안한 패천마도 육대강은 칠 척의 거한이라고 했다.
패천십삼도 자체가 육대강의 몸에 최적화된 도법이라는 말.
다시 말해서 육대강 정도의 거한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서 펼칠 때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도법이 바로 패천십삼도인 것이다.
과연 당금 강호에서 초웅보다 패천십삼도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저 거대한 칼로 패천십삼도가 펼쳐진다면……?’
초웅을 바라보는 관추양의 눈빛에서 활화산 같은 열기가 피어났다.
삼백 년 동안 잠을 자던 패천의 도법이 세상을 뒤흔드는 게 눈에 선했다.
‘일단 장 어르신을 만나서 상의를 해봐야겠어.’
그런데 뒤로 돌아섰을 때였다.
이 장 정도 떨어진 곳에 황우연이 서 있는 것 아닌가?
그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한 황 노인이 자신의 감각을 속일 정도의 고수임을 알고 손 안에 땀이 고였다.
“황 어르신, 어인 일로……?”
황우연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말했다.
“좋은 몸이지?”
관추양은 황우연의 눈길을 따라 초웅을 바라보았다.
땀을 닦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초웅의 몸은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로 대단했다.
“저런 몸을 지닌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자네의 도를 저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가?”
움찔한 관추양은 황우연을 돌아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자네 눈에 그렇게 쓰여 있는 것 같아서 해본 말이네. 아니라면 굳이 초웅에게 도법을 펼치라고 할 것도 없었겠지.”
관추양은 황우연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가진 도를 제대로 익힐 것 같더군요.”
“맞아. 자네가 도를 펼치는 걸 직접 보진 못했지만, 언젠가 자네의 도에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네. 기교는 좋은데 패력이 부족하더군. 저 아이라면 자네의 도가 지닌 약점을 채워주고도 남을 게야.”
도에 당한 사람만 보고도 자신의 도가 지닌 약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관추양은 황우연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어르신.”
“나는 자네 생각처럼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네. 하지만 내 가슴 속에는 제법 괜찮은 것이 하나 있지.”
그는 혁련궁이 노리던 패황마력을 얻고도 익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패황마력이 아무리 천고의 절기라 해도 자신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혁련궁은 자신이 패황마력을 모르는 줄 알고 있었고, 자신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것도 인연인 게지.’
황우연은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관추양을 응시했다.
“나는 그것을 저 아이에게 전할까 하네. 대신 자네는 자네의 도를 전하게. 그럼 강호를 일 도에 쪼갤 수 있는 괴물이 만들어질 거야. 어떤가?”
관추양은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피가 끓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3
합비를 출발한 풍천 일행은 그날 오후 천혈궁에서 동쪽으로 백오십 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그곳부터는 천혈궁의 구역이었다.
자칫하면 구인창의 머리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자신들이 먼저 장마철에 먼지 나도록 도망 다녀야 할 신세가 될지 모르는 일. 그들은 잔뜩 긴장한 채 동암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 시진 후.
동암에 도착한 그들은 두세 명씩 짝을 지어서 산정객잔이라는 곳으로 들어간 후 방을 잡았다. 천혈궁의 분타가 그 객잔에서 남쪽으로 이백여 장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이다.
산정객잔에 자리를 잡은 풍천은 악진표와 이곡을 보내 천혈궁 동암 분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동암 분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후 두 시진이 지날 때쯤 돌아왔다.
풍천은 객방의 창문을 반쯤 열었다.
이백여 장 떨어진 곳에 장원이 하나 보였다. 큰 건물이 서너 채, 작은 건물이 십여 채 정도 되었는데 전체 넓이는 이만 평쯤 될 듯했다.
“저곳이 천혈궁의 동암 분타란 말이죠?”
“예, 령주. 천혈궁의 사대 분타 중 하나로, 동부를 관할하는 핵심 분타입니다. 분타주는 마혈수 안평인데, 천혈궁에서도 손속이 독하기로 유명한 놈입죠. 인원은…….”
악진표가 먼저 자신이 알아온 정보를 늘어놓았다.
풍천은 악진표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사대 분타 중 하나라면 천혈궁을 흔든다는 목적을 이루기에 제격이었다.
‘저곳이 무너지면 천혈궁도 하남에 신경 쓸 겨를이 없겠군.’
그리고 무엇보다 동부를 관할하는 곳이라면 독상을 입은 형이 후퇴할 때 관여했을지도 모르는 일. 개인적인 복수도 하는 셈이었다.
악진표의 설명이 끝나자 이곡이 입을 열었다.
“놈들의 주 전력은 중앙에 있는 큰 건물과 뒤쪽의 별원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숙주에서 활동하던 숙주오마(宿州五魔)가 분타를 찾아와서 아직 떠나지 않았는데, 그들도 별원에 있습니다.”
마치 안에 들어갔다 온 것 같은 말투.
이곡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풍천은 이곡의 본 직업을 알고 있기에 그 정도 정보 수집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까?”
이곡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짤막하게 대답했다.
“곧 천혈궁이 대대적으로 움직일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그거야 동암 분타가 뒤집어지면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피해가 크면 클수록 더욱더 그러할 것이고. 동쪽의 둑이 터진 상태에서 서쪽이나 북쪽으로 가진 못할 테니까.
풍천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동암 분타를 바라보았다.
‘한 방울 피의 대가는 백 방울로 갚는다! 그것이 우리 천풍문의 법이지.’
이전까지 없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하면 될 일.
마음의 결정을 내린 풍천은 장원을 바라보며 고저 없는 어조로 말했다.
“첫 번째 표적으로 적당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