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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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72화
172화
정원까지 칠십 리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이 상황에서 수장들을 불렀다는 것은 뭔가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서 행렬이 움직임을 멈췄다.
풍천 일행이 있는 곳만 멈춘 것이 아니었다. 눈치를 보니 모두가 멈춘 듯했다.
풍천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앞을 바라보았다.
중소문파 주인들이 달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멈춰 선 것과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정확한 소식이 전해진 것은 이 각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웅성거렸다.
“뭐요? 명광의 응천보가 몰살을 당했단 말입니까?”
“새벽에 쳐들어와서 제대로 대응도 못 해보고 당했다는군요.”
“죽은 사람이 백오십 명이나 되는데 그중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있답디다.”
“빌어먹을 새끼들. 우리가 정원으로 이동한다니까 겁이 난 모양이군.”
“아무리 그렇다고 여자와 아이들까지 죽여? 개 같은 놈들!”
경악과 분노에 찬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풍천은 눈살을 찌푸린 채 머리를 굴렸다.
‘명광 일대는 신마성이 접수했다고 봐야겠군. 그럼 일이 복잡해지겠는데?’
응천보는 중소문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응천보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너졌을 경우 구룡회의 힘이 분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응천보의 소식이 전해진 지 일 각가량 지났을 때였다. 신검문도의 복장을 한 중년인 하나가 근처의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갔다.
“모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닫고 그를 주시했다.
중년인은 사람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 입을 열었다.
“본인은 신검문의 장로 이관청이라 하외다! 본문은 정원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응천보로 향할 계획입니다! 여러 군웅 제위들 중에서 저희를 따라가실 분들은 지원해주시기 바랍니다!”
군웅들이 다시 한번 웅성거렸다.
그도 잠시 응천보의 혈사를 듣고 분노한 사람들이 하나둘 앞으로 나섰다.
“저는 신검문과 함께 가겠습니다.”
“저도 함께 가겠소이다.”
개인적으로 나서는 사람도 있었고 문파의 제자들을 이끌고 나서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적가장은 신검문과 함께 가겠소!”
이관청의 말이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백오십여 명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도 가죠.”
풍천도 단천무령을 데리고 그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어차피 신검문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상황이 조금 묘하긴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었다.
결국 중소문파 무사 오백여 명 중 이백 명 가까운 인원이 신검문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는데 악진표도 풍천 일행에 합류하기 위해서 그 사이에 슬쩍 끼어들었다.
이관청도 그 정도면 되었다 생각한 듯 더 재촉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이 응해주셔서 고맙소이다! 그럼 즉시 출발할 생각이니 함께 가실 분들은 저희 신검문이 있는 곳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4
신검문 문도들과 중소문파의 무사들은 명광을 삼십 리 앞두고 걸음을 멈췄다.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 주위로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사백 명에 이르는 인원이 휴식을 취하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이곳에서 이 각 정도 쉬고 출발할 것이오. 볼일을 보더라도 너무 멀리 가시 마시고 출발을 알리면 즉시 모여주시기 바라겠소이다!”
처음부터 중소문파의 무사들을 이끌고 있는 이관청이 소리쳤다.
풍천은 일행과 함께 커다란 바위로 인해서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해가 떨어지려면 한 시진 정도 남은 상태. 다행히 어두워지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어느 문파의 분들이시오?”
풍천 일행과 함께 바위 그늘에 자리를 잡은 삼십 대 초반의 장한 하나가 물었다.
까치집처럼 풀어헤쳐진 머리카락, 허름한 복장. 언뜻 보면 평범한 낭인 같았다.
하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깊게 가라앉아 있고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것 같은데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는 그가 평범한 낭인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은은히 느껴지는 기운도 일류 수준이었고.
풍천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단천문 사람들입니다”
그 말에 단천무령들이 풍천을 힐끔거렸다. 공손이향은 슬며시 미소를 짓고.
단천문이라. 듣고 보니 가명치고 괜찮은 이름이었다.
“단천문?”
장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 하. 아마 못 들어봤을 겁니다. 워낙 작은 문파여서 사람이 서른 명도 안 되니까요.”
장한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른 명도 안 되면 정말 적구려. 나는 마동춘이라 하는데, 이름이 어떻게 되오?”
“대풍이라 합니다. 그런데 마 형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고향은 양주인데 십여 년 동안 세상을 돌아다녀서 딱히 어디라 말하기가 어정쩡하구려.”
대답하는 마동춘의 눈빛이 찰나 간 가늘게 흔들렸다.
풍천은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뭔지 몰라도 사연이 있는 사람 같군.’
그가 본 마동춘은 단순한 낭인이 아니었다. 정말 낭인이라면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었다. 일류 수준을 넘어선 고수가 낭인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니까.
“그런데 마 형은 구룡회와 신마성의 싸움에 뛰어든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냥 신마성의 행태에 분노했다고 생각하시오.”
“하, 하. 이거 진짜 협의지심이 있는 분을 만났군요.”
“협의지심은 무슨…….”
마동춘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길게 끌었다.
풍천은 그 후로도 마동춘과 오래전부터 사귄 사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본래부터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말 놓으시라니까요. 저보다 열 살은 더 드신 것 같은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군.”
“안 될 것 뭐 있습니까? 마 형도 참. 하, 하, 하.”
생각 외로 마동춘은 강호의 잡다한 일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십여 년간 강호를 낭인처럼 돌아다녔다는 게 헛말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일류 수준의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걸 보면 이름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거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성격인 듯했다.
‘나와 비슷한 성격이군.’
풍천은 마동춘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넌지시 제안했다.
“마 형, 일행이 없는 것 같은데 저희와 함께 움직이죠.”
마동춘도 풍천이 싫진 않았다. 뭔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어서 말을 붙여봤는데 스스럼없는 풍천의 태도를 보니 악한 자들 같지는 않았다.
“다른 분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풍천은 씩 웃으며 간단하게 정리했다.
“걱정 마쇼. 저분들은 마음씨가 좋아서 제 의견을 반대하지 않거든요.”
꼭 마음씨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나도 좋네.”
감능하와 허무정 등 공손이향을 제외한 단천무령들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또 한 사람 령주에게 걸려들었군.’
‘사실대로 말해줄까?’
‘저렇게 사람 볼 줄을 모르다니, 쯔쯔쯔.’
‘정말 사람 끌어들이는 데는 남다른 재주가 있는 분이야.’
그때 신검문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모두 한곳으로 모여주시오! 도중에 신마성 무리를 만날지 모르니 싸움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서 사람을 나누고 간단한 명령을 하달하도록 하겠소!”
5
중소문파 이백여 명의 무사로 칠 대가 급조되었다. 그중 사 대는 중소문파가 각기 하나씩 맡고 개인적으로 참가한 무사들 팔십여 명이 삼 대로 편성되었다.
풍천 일행은 열일곱 명과 더해져서 스물일곱 명으로 마지막 칠 대를 이루었다.
문제는 대주를 누가 하냐는 것이었는데 단천무령과 마동춘의 숫자가 열 명이나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풍천이 대주를 맡게 되었다.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몇 사람은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까지 쳤다.
“흥! 저 친구를 대주 시키느니 차라리 내가 하겠소!”
“지금 제정신이오? 새파랗게 어린 친구를 대주로 내세우다니. 누구 죽게 만들 일 있소?”
“혹시 저 친구에게 뭐 먹은 거라도 있는 거 아니오?”
하지만 단천무령들은 풍천이 아닌 누구도 대주로 모실 마음이 없었다. 자존심을 굽히는 건 풍천 하나로 족했다.
그들이 모두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노려보자 불만을 터트리던 자들이 한순간에 벙어리가 되었다.
풍천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주 자리를 받아들였다.
“하, 하. 다른 분이 맡아도 되는데…… 뭐 어쩔 수 없죠. 여러분이 원한다면야…….”
아주 싫지는 않았다. 대주가 되면 귀찮긴 해도 신마성을 물리쳤을 때 더 많은 보상을 해줄 테니까.
“앞으로 신마성 놈들과 부딪치게 되면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내 말에 따르쇼. 멋대로 움직이다 죽어봐야 당신들만 손해니까.”
풍천은 목에 힘을 주고 칠 대의 무사들에게 간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단천무령과 마동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여차하면 다른 대로 옮겨야지. 그도 아니면 떠나든가.’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덧없이 죽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좌우간 그렇게 칠 대가 만들어지자 백무천이 직접 일곱 명의 대주를 불러 모았다.
백무천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신검문 무사들 사이를 가로질러야 했다.
풍천이 지나가자 몇 사람이 흠칫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우, 풍천인 줄 알았네.’
석초산이 그러했고 나한조를 비롯한 비검당의 몇 사람도 풍천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나 사조원들 중 기종탁과 은초당, 서문경, 여공위, 백승문은 그리움마저 묻어나는 눈빛으로 풍천이 멀어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조장님은 정말 돌아가셨을까?”
서문경이 중얼거리자 기종탁이 쓴웃음을 지었다.
“살아 계시면 돌아오셨겠지. 조금 덤벙거리고 엉뚱해서 그렇지 사람은 괜찮았는데…….”
그들을 향해서 백승문이 말했다.
“혹시 몰라서 아직 내기에 걸린 돈도 나눠주지 않았는데, 한 달만 더 기다려봅시다. 누가 압니까? 부상을 크게 당해서 치료 기간이 오래 걸리는지.”
풍천은 그 말을 듣고 입술 끝을 비틀었다.
‘으흥, 아직 백승문이 갖고 있나 보군.’
백무천은 백유현, 네 명의 호법, 각 조직의 수장들과 함께 있었다.
칠 대의 대주들이 도착하자 백무천이 입을 열었다.
“응천보에 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아니면 철수했는지 아직 모르는 상태요. 하지만 사람을 파견했으니 곧 응천보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을 거요. 만약 적이 아직도 응천보에 남아 있다면 우리가 중심으로 치고 들어갈 것이니 여러분들은 좌우를 맡아주시오.”
“알겠습니다, 백 문주.”
“그리하지요.”
다른 대주들은 순순히 대답하는데 풍천은 삐딱하게 고개를 모로 꼬고 질문을 던졌다.
“적이 떠났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럼 일단 응천보에 머물면서 정원의 임시 총단과 보조를 맞출 것이네.”
“응천보를 공격한 자들에 대해서 파악된 게 있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조환이 했다. 풍천을 꼬나보면서.
“인원이 이백여 명에 불과하고 단숨에 응천보를 괴멸시킨 것으로 봐서 신마성의 주력인 것은 분명한 것 같네.”
“그러니까 그들에 대한 정보가 있냐는 거죠.”
“우리도 응천보가 괴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달려온 상황이네. 사람을 파견했으니 응천보로 가다 보면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겠지.”
“결국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군요. 이거 적을 너무 쉽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의욕만 앞서서 적을 과소평가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인데 말이죠.”
미묘한 말투. 조환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졌다.
“상대는 신마성이라네.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고 있지. 그저 시간이 없어서 아직 확실한 것을 파악하지 못한 것뿐.”
풍천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 말이 그 말이지 뭐.”
조환은 그 말을 듣고 은근슬쩍 이마에서 열이 났다.
‘저놈이!’
그때 백무천이 입을 열었다.
“급박하게 달려오느라 아직 정확한 정보를 얻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정보를 다 얻고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없네. 아쉬운 점은 일단 움직이면서 차차 채우도록 하지.”
풍천은 조환을 상대할 때와 달리 백무천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는 백초령의 부친이 아닌가 말이다.
“알겠습니다, 문주. 제가 생각해도 그게 최선의 방법 같군요. 하, 하.”
거기다 아부성 짙은 발언까지.
조환은 극과 극인 풍천의 태도가 얄미웠지만 이야기가 길어져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았다.
“자, 그럼 돌아가셔서 출발 준비를 서둘러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