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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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08화
208화
믿을 수 없는 사람과 믿을 수 있는 사람.
그 두 사람이 바뀌면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어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가장 큰 문제는 영호관의 부인이었는데, 그녀는 아이를 낳을 동안 잠시 친정으로 보내면 될 듯했다.
영호관도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백무천의 계획에 기꺼이 동참했다. 대신 자신의 부인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부탁한다면서.
두 사람은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영호관이 된 사마공유는 용후정의 뜻대로 움직이는 척하면서 거사가 벌어진 그날 그를 제거해버렸다.
“하지만 용후정을 제거한 후에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신마성의 북상을 막으려면 아무래도 천외천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공유를 문주로 세우고 나는 뒤로 빠졌지. 그런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신마성과 천룡회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서령이를 좀 더 철저하게 감시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어야 하거늘…….”
백무천은 그 말을 끝으로 말문을 닫고 눈을 감았다.
백초령은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사마공유는 이용했을 뿐이야!”
“근본도 없는 그런 자를 내가 왜 좋아해?”
“악적! 죽어!”
언니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왜 언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언니가 한마디 할 때마다 공유 오빠의 심장에 비수가 박혔을 거야. 오빠는 그렇게 갈기갈기 찢긴 가슴으로 언니를 용서하려고 했는데, 언니는…… 흑흑흑, 언니, 나도 이제는 언니 편을 들 수 없을 것 같아.’
한참 동안 묵직한 침묵이 방 안을 짓눌렀다. 방 안에서는 숨소리와 백초령의 숨죽여 우는 소리만 들렸다.
풍천도 더 이상 백무천을 다그치지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어쨌든 백무천은 사마공유의 목숨을 살렸지 않은가. 사마공유도 자신의 의지로 영호관이 되었던 것이고.
그런데 문득, 사마공유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저를 불렀죠? 형이 살아 있었다면 굳이 부를 필요가 없었을 텐데요?”
백무천이 눈을 뜨고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자네의 감각이 남다르다는 말을 들었지. 추적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고 하더군. 해서 자네를 시켜 비밀리에 천외천의 총단을 찾으려고 했지. 초령이 납치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일이 이상하게 꼬이긴 했지만 말이야.”
“결국 이용해먹기 위해서 불렀단 말이군요.”
“성공했으면 상당한 금액을 대가로 줬을 거네.”
그럼 뭐 상관없고.
‘처음부터 그 임무를 맡겼으면 오죽 좋아?’
풍천은 백무천의 표정을 살피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서령 아가씨를 보호해달란 청부를 문주님이 하셨나요?”
그것 때문에 천외천에 대한 일을 미룬 것 아닐까?
그런데 백무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런 청부를 한 적이 없네.”
“그럼 누가……?”
미간을 좁힌 풍천은 슬며시 침상 위의 사마공유를 흘겨보았다.
사마공유는 눈을 감은 채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유령총으로 떠나기 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상구로 가서 청부를 하라고. 그의 유품 중에 유난히 돈이 없는 것은 모든 돈을 그 친구에게 맡겼기 때문이었다.
유서를 남긴 것 역시 풍천을 일단 신검문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고.
풍천은 사마공유를 째려보았다.
진짜 바보 같은 형이었다.
‘으이그, 바보! 왜 그런 청부를 해? 자신을 차버린 여자가 뭐가 예뻐서.’
깔깔거리며 공손천우와 노닥거리던 백초령도 그렇고, 형도 한심하고.
이래저래 심통이 난 풍천은 아예 백무천에 대한 청부도 말해주었다.
“용후정이 문주님에 대한 청부를 했다는 걸 아세요? 솔직히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죠. 황금 백 냥은 적은 금액이 아니거든요.”
백무천은 물론이고,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백초령도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안 했는가?”
“그때는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반밖에 안 되었거든요. 확률이 조금만 높았어도 한 번쯤 시도해봤을 텐데 말이죠.”
“그, 그럼 지금은?”
“계약이 끝나버렸죠. 저들이 먼저 신의를 저버렸거든요. 덕분에 계약금을 공짜로 챙기긴 했는데, 뭐 청부를 완수하고 받을 돈에 비하면 턱없이 적어서…….”
그래서 아쉽다는 거야, 뭐야?
사람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풍천은 한 술 더 떠서 그들을 놀렸다.
“좌우간 그건 그렇고, 형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당장 죽게 생겼나요? 죽으면 유품이나 챙겨서 떠나야겠는데 말이죠.”
그때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주위가 벌게진 백초령이 대뜸 소리쳤다.
“나는 어떡하고? 설마 혼자 갈 생각은 아니지?”
백무천은 물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사마공유마저 머리를 번쩍 들고는 백초령과 풍천을 수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저것들이 설마……?’
‘혹시 좋아한다는 여자가……?’
풍천과 백무천, 백초령은 사마공유의 안정을 위해서 금조상만 남겨놓고 백초령의 방으로 갔다.
백무천은 풍천과 백초령을 차례차례 바라보고는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언제 그런 사이가 되었지?”
풍천과 백초령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백무천의 시선을 피했다.
백무천은 두 사람이 시선을 피하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별일 없었으면 없던 것으로 하고…….”
풍천과 백초령은 화들짝 놀라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고요!”
“아버지!”
백초령은 그간의 일을 대충 말하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된 거예요, 아버지.”
그동안 풍천은 벽에 걸려 있는 복숭아나무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나무에 복숭아가 몇 개 달려 있는지 열두 번이나 확인해보았다.
‘백마흔두 개 같기도 하고, 백마흔세 개 같기도 하고…… 몇 개가 겹쳐져 있어서 확실히 알 수가 없네.’
한편 이야기를 다 들은 백무천은 내심 안도했다.
백서령으로 인해서 사마공유가 아픔을 겪은 게 미안하던 터였다. 그런데 풍천과 백초령이 서로 좋아한다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고금제일 해결사의 자존심을 걸고 마저 하나를 확인하던 풍천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예? 제가 봐선 백마흔세 개 같은데요?”
“뭐?”
“어, 그게 아니고요. 다시 세어볼까요?”
백초령은 재빨리 풍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무슨 말하는 거야? 아버지는 지금 풍천의 생각을 묻잖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풍천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 하, 하. 전 또 뭐라고…… 별수 없죠. 초령이가 공손천우와 혼인하면 저도 예쁜 여자를 찾아서…….”
“풍처어언!”
백초령이 빽 소리를 내지르고, 백무천은 헛기침을 하며 풍천을 꼬나보았다.
“험, 나는 이만 나가봐야겠다.”
“아버지…….”
“될 수 있으면 너희 둘을 맺어주려고 했는데…… 후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도 잘 생각해봐라. 고생하기 전에.”
둘을 맺어줘? 자신과 백초령을?
풍천은 눈을 두어 번 껌벅이더니 백무천이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로 백무천을 불렀다.
“문주니이이이임!”
백무천이 ‘하는 것 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자, 백초령이 도끼눈을 뜨고 풍천을 다그쳤다.
“이 멍청아! 내가 왜 공손 공자와 혼인을 해?”
풍천도 할 말이 많았다.
“그럴 마음 아니었어? 아까 보니까 둘이서 잘 놀던데 뭐.”
“으이그, 그거야 천외천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잠깐 비위 맞춰준 거지! 그리고 전에 위태곤이 나를 납치하려고 검향원에 침입했을 때, 그 변태를 물리쳐준 것도 있어서 차마 냉정하게 대하지 못했을 뿐이야. 알았어?”
“침 튄다. 조용히 좀 해.”
“입술에 침 잔뜩 발라서 부빌 때는 언제고, 뭐가 더러워…… 읍.”
풍천은 한참 만에 백초령을 놓고 헛기침을 했다.
“험, 좌우간 공손천우와는 별 사이 아니란 말이지?”
백초령은 도끼눈 대신 홍조가 어린 표정으로 슬쩍 눈을 흘겼다.
“그렇다니까. 아직도 못 믿어?”
“믿지. 내가 초령이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그런데 정말 위태곤이 여기까지 왔었어?”
“그렇다니까?”
“위태곤을 직접 봤어?”
“직접 보진 못했어.”
“그럼 공손천우가 거짓으로 꾸민 것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아. 다른 사람도 그를 봤는데, 말을 들어보니까 진짜 위태곤 같았어. 무공이 굉장히 강해진 것만 다르고.”
“그래? 그럼 믿어야지 뭐. 하긴, 초령이가 얼마나 일편단심인데 나를 잊고 그딴 놈을 좋아하겠어?”
“그럼 갈 때 나 데려갈 거지?”
“응? 어딜 데려가?”
“집에 간다며?”
“따라가려고?”
“어. 아버지만 허락하면.”
“그럼 나야 좋지. 근데 말이야, 바로는 못 갈 거 같아.”
“왜?”
“정리해야 할 게 조금 있거든. 장인어른을 위해서 말이지. 음하, 하, 하.”
“아이, 장인어른은…… 좋아.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뭐.”
제4장. 정말 중요한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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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붕 뜬 풍천은 구름 위를 거닐 듯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무검각에 도착했다.
검향원은 문주의 호위무사 삼십 인이 모두 도착해서 철통같은 경비를 서고 있었다. 무검각의 전면에도 세 명이 더 추가되어서 삼엄한 눈빛을 빛내며 출입자를 통제했다.
풍천이 다가가자 호위무사들이 자기들끼리 신호를 보냈다.
[바로 저자네.]
[저자가 문주님의 동생인 풍천이라더군.]
[믿을 수가 없군. 별 볼 일 없어 보이는데…….]
풍천은 그들을 향해서 순한 양 같은 웃음을 지어주었다.
“들어가도 되죠?”
호위무사들은 더 이상 풍천을 막을 배짱이 없었다.
손짓 한 번에 두 사람이 날아가지 않았던가. 비록 큰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 마음의 충격은 몸이 다친 것보다 더 컸다.
“들어가시오.”
“그럼 수고하쇼.”
풍천은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 방문을 열었다.
금조상과 함께 사마공유를 살펴보던 백무천이 몸을 돌렸다.
그들에게 다가간 풍천은 사마공유를 내려다보고는 금조상에게 물었다.
“좀 어떻습니까?”
“문주님이 심후한 공력으로 확산을 막고, 태상문주님이 적시에 독기를 몰아내서 다행히 독에 대한 것은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문제는 칼날이 신경을 건드린 것 같다는 건데…… 그것은 이삼 일 지나봐야 좀 더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군.”
“만약 다친 신경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금조상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심하진 않겠지만, 오른발을 조금 절지도 모르네.”
풍천은 착잡한 표정으로 사마공유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사마공유가 실눈을 뜨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너에게 놀림받기 싫어서라도 완벽히 나을 테니까.”
풍천은 심통이 나서 툭 쏘아붙였다.
“아냐, 형은 너무 완벽해서 조금 절어도 돼.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뭐.”
“나쁜 놈.”
“동생에게 사기 친 사람은 어떻고? 환자는 잠이나 주무셔.”
한마디 더 쏘아준 풍천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백무천과 마주 앉았다.
형이 다리 저는 모습을 떠올리니 기분이 우울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백무천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