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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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06화
206화
마음은 굴뚝같은데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더구나 안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천하제일의 신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꼼짝 못 하게 했다.
‘지미, 제길, 젠장, 빌어먹을! 내가 왜 여길 온 거지?’
시무룩해진 그는 몸을 돌렸다.
순간 발밑에 있던 자갈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응? 밖에 누구요?”
공손천우가 그 소리를 듣고 밖을 향해 물었다.
풍천은 문을 쏘아보며 소리 없이 욕했다.
‘네 삼촌이다, 나쁜 놈아!’
그러고는 공손천우가 문을 향해 다가오자 근처의 나무 그늘 속으로 몸을 감췄다.
직후 문이 열리고, 공손천우가 밖으로 나와 싸늘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그때 안에서 백초령이 물었다.
“누구예요?”
“아무도 없는데?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이군.”
공소천우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풍천은 백초령의 방문을 눈빛만으로 터트려버릴 것처럼 노려보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쁜 계집애. 나는 정말로 저를 좋아했는데. 나는 지가 실종됐으면 적어도 삼 년은 기다려줬을 텐데…….’
속이 상했다. 마음이 텅 빈 것 같고,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냥 떠날까?’
하지만 떠날 때 떠나더라도 백무천은 한번 만나야 했다.
‘그래, 백무천을 만나고 나서 다 털어버리고 떠나자. 솔직히 초령이만 뭐라고 할 수도 없지 뭐.’
어깨가 축 처진 풍천은 무검각이 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가 사라진 직후 방 안에서 다시 공손천우와 백초령의 목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이제 그만 가보세요.”
“그 녀석을 언제까지 기다릴 거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요.”
“글쎄, 그 녀석은 작년에 죽었다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공손 공자도 그랬잖아요.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요.”
“그건 그런데…….”
“병도 몇 년 걸려야 치료되는 병이 있는데, 하물며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면 치료하는 데 몇 년 걸릴 수도 있어요.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해요.”
“제길, 대체 그런 어벙한 녀석이 뭐가 좋다고 그러지?”
백초령은 아련한 눈으로 공손천우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에게는 당신에게 없는 것이 있거든요.”
“나에게 없는 것? 그게 뭐지?”
“맑은 마음이요. 나를 위해서 무너지는 유령총 안으로 뛰어들 수 있는 용기요.”
“나도 뛰어들 수 있어.”
“느닷없는 일이 벌어질 경우 충동적으로 뛰어들 순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따져본 후라면 그럴 수 없을 거예요.”
공손천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다. 시간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따져본 후에도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그건…… 흥, 그럼 그놈은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냉정하게 생각하고서 뛰어들었다는 거야?”
“맞아요. 그는 그랬어요. 그래서 그때 그를 위해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해요.”
뒤로 갈수록 낮아지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배어 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에서 끝내 한 방울 이슬이 뚝 떨어졌다.
공손천우는 그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난공불락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따위 놈이 뭐가 좋다고…… 좋아,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하지만 언젠가는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거다.’
그때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2
무검각으로 간 풍천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전각을 바라보았다.
‘지금 들어갈까?’
그가 망설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무검각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 백서령이잖아?’
그랬다. 머리가 풀어져 있고, 행색이 왠지 모르게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백서령이었다.
“비켜!”
백서령은 앞을 막는 영호관의 호위무사들을 향해 싸늘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방 안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러서시오.”
그리고 곧 전각의 문이 열리더니 영호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지, 사매?”
백서령은 서리가 풀풀 날리는 눈빛으로 영호관을 쏘아보았다.
“얼굴도 두껍군. 당신이 무슨 낯으로 여길 온 거지?”
“사부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다. 마침 이야기가 끝나서 그만 가볼 생각이야.”
영호관은 담담히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방 안에 있던 백무천이 방문 쪽으로 다가와서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령아, 그만 물러서라.”
“아버지, 저는 저 인간에게 따질 것이 있어서 왔어요!”
“서령아…….”
백무천이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백서령을 불렀다.
하지만 백서령은 여전히 서리가 내린 표정으로 영호관을 향해 다가갔다.
“나는 당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영호관은 걸음을 멈추고 백서령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광기마저 보이는 백서령의 모습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백서령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 깊은 곳에서 격랑이 일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물었다.
“사매의 정혼자를 죽인 것 때문인가?”
“맞아! 그 사람을 죽였으니 당신도 죽어야 돼!”
“그렇게 그를 사랑했던가? 가족도 외면할 수 있을 만큼?”
“그는 나의 전부였어! 너 같은 냉혈인간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
“사매는 다른 사람도 좋아했었지 않아? 꼭 용원명만이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던데?”
“흥! 그분은 내가 철이 들면서부터 사모했던 사람이야! 나는 그분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어!”
“사마공유도…… 좋아했지 않아?”
사마공유의 이름을 꺼내는 영호관의 목소리가 무의식중에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백서령은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티끌만큼도 알지 못하고 광기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호호! 내가 근본도 없는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한 줄 알아? 그는 용 공자의 부탁으로 만났을 뿐이야! 몇 번 다정하게 대했더니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더군.”
“서령아! 말이 심하구나!”
백무천이 굳은 표정으로 백서령을 다그쳤다.
바로 그때, 영호관의 이 장 앞까지 다가간 백서령이 땅을 박차고 영호관에게 달려들었다.
“악적, 죽어!”
순간, 백서령의 소매 속에 감추어져 있던 칼날이 모습을 드러내며 새파란 광채를 번뜩였다.
사람들은 영호관의 무위가 백무천에 근접할 정도로 강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백서령이 뛰어나다 해도 그녀의 실력으로는 영호관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백무천만은 뭔가 불길함을 느끼고 다급히 소리쳤다.
“피해라!”
영호관은 아픔이 가득한 눈빛으로 백서령을 바라보았다.
그는 칼날이 코앞까지 다가온 후에야 손을 움직였다.
그런데 찰나의 순간, 백서령의 손목을 잡아가던 영호관의 손이 멈칫했다.
동시에 백서령의 단검이 영호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푹!
비수가 영호관의 가슴에 박히자 여기저기서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억!”
“헛!”
“저, 저런……!”
하지만 막상 당사자인 영호관은 신음 한마디 흘리지 않고 백서령만 바라보았다.
뒤늦게 호위무사들이 영호관과 백서령을 향해 달려왔다.
“맙소사, 문주!”
영호관은 손을 저어서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물러……서시오.”
백서령은 영호관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단검을 놓고 뒤로 물러나며 악을 쓰듯이 외쳤다.
“죽어도 돼. 당신은 당연히 죽어야 해!”
“네가 감히!”
그때 백무천이 날아들더니 백서령의 뺨을 후려쳤다.
짝!
백서령의 몸뚱이가 옆으로 튕겨나며 나뒹굴었다.
“너는 절대 관아를 욕해선 안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관아를 욕할 자격이 없어!”
백무천은 노화가 피어난 눈으로 백서령을 다그쳤다.
“아버지!”
백초령이 뛰어오더니 백서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초령아. 네 언니는 더 혼이 나야 한다!”
백초령은 백무천과 영호관을 번갈아 보며 간절하게 사정했다.
“아버지, 언니를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언니도 오죽 마음이 아팠으면 그랬겠어요? 영호 오라버니, 제발 언니를 용서해주세요.”
백초령과 함께 달려온 공손천우도 넌지시 백초령의 편을 들어주었다.
“태상문주님, 일단 진정하시지요.”
백무천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보며 축객령을 내렸다.
“이건 본문의 일이네. 자네는 상관하지 말고 여기서 나가게!”
공손천우는 워낙 완강한 백무천의 말투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영호관은 지혈을 하고, 가슴에 박힌 단검을 천천히 잡아 뺐다.
검붉은 핏물이 옷자락을 적시며 넓게 번졌다.
백무천은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그만은 아는 것이다. 단검에 찔린 것보다 더한 고통이 영호관의 가슴을 열두 번은 찢어발겼을 거라는 걸.
“괜찮으냐?”
영호관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급소를 비켜나가서 견딜 만합니다, 사부님.”
백무천은 이를 악물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허어어어,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로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냉정하게 처리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이걸로 사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렸다면 됐습니다. 그만 서령 사매를 용서해주십시오, 사부님.”
백무천의 눈빛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렸다.
“관아…….”
“문주, 먼저 상처부터 치료하십시오.”
호위무사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영호관의 치료를 재촉했다.
그런데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백서령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리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호호호! 죽을 거야! 절대 살지 못할걸?”
문득 그 말에서 이상함을 느낀 백무천은 급히 영호관의 가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서 운기를 해봐라!”
영호관도 검이 박혔던 자리에서 기이한 열기가 일어나자 급히 진기를 일으켜 상처 주위를 봉쇄했다.
순간 아찔한 통증과 함께 몸 한쪽이 굳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으음…….’
영호관은 사람들이 걱정할까 봐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느낌이 들면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동시에 손으로 막고 있던 그의 가슴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독?”
백무천은 상황을 깨닫고 표정이 급변했다.
영호관에게 급히 다가간 그는 옷을 찢어내고 상처를 직접 살펴보았다.
피 색깔이 유난히 시커맸는데, 비릿한 혈향 대신 고약한 냄새가 은은하게 번졌다.
백무천은 일단 영호관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진기를 밀어 넣었다.
한 치가량 갈라진 상처에서 시커먼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족히 두어 사발의 피를 빼낸 백무천은 다시 지혈을 하고 백서령을 노려보았다.
“단검에 무슨 독을 발랐느냐?”
“소용없어요, 아버지. 저 악적은 오늘 반드시 죽을 거예요!”
백무천은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고 백서령을 다그쳤다.
“어떤 독을 썼냐고 묻지 않았느냐!”
“말하지 않을 거예요. 저 악적은 죽어 마땅한 자예요. 아버지가 왜 저 악적을 두둔하는지 몰라도, 저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백무천은 손을 뻗어서 세 줄기 지풍을 날려 백서령의 혈도를 제압했다.
백초령이 다급히 백무천의 앞을 막아섰다.
“아버지, 한 번만 언니를 용서…….”
하지만 이번에는 백무천도 백초령의 간절한 청을 외면했다.
“만약 관아가 잘못된다면…… 네 어미가 하늘에서 날 원망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네 언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백무천의 말에 백초령은 몸이 굳은 채 벌벌 떨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운운한 것만으로도 백무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아버지…… 안 돼요, 아버지. 제발…….”
백무천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영호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호관의 얼굴에 푸른 기가 번지고 있었다. 급히 독기의 확산을 봉쇄했음에도 일부 독기가 몸 곳곳으로 퍼지는 듯했다.
그는 영호관의 호위무사들에게 급히 명령을 내렸다.
“문주를 부축해서 방 안으로 옮겨라.”
“예!”
“그대는 의검원으로 가서 금 원주를 데려오고, 거기 두 사람은 저 아이를 방에 가둔 후 절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경비무사들은 이제부터 검향원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