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03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03화
203화
강호의 상황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천외천이 나타나서 신마성과 한바탕 전쟁을 벌였는데, 아직까지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천룡회 쪽이 조금은 유리한 상황이었지. 그런데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 북천맹에서 최정예 무사 삼백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서천무련에서 오백의 무사들이 장강을 타고 안경에 도착해서 신마성에 합류했다네.”
그 바람에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석 달, 피 말리는 긴장 속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조용하네만, 지난 일 년 동안 안휘의 중부 전역이 피로 물들었지. 어찌나 싸움이 살벌한지, 관도 아예 손대는 걸 포기하고 구경만 할 정도였다네. 뭐 이 침묵도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네만…….”
‘북천맹과 서천무련까지 불러들였다? 흠, 역시 혁련궁은 천외천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보군.’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북천맹과 서천무련까지 끌어들인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구룡회를 친 것도 천외천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나? 천외천이 안 나타나면 구룡회를 삼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말이지. 정말 철저하고 지독한 노인네군.’
풍천은 혁련궁의 대담한 계획에 혀를 내두르며 고 노인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신마성주 혁련궁은 아직 남창에 있습니까?”
“그렇게 알고 있네.”
“천외천 쪽에서 천주가 나왔다는 말은 없었습니까?”
“그건 아직 모르네. 사람들은 공손무백이 천외천의 주인인 줄 알고 있지.”
“공손무헌이라는 이름 들어봤어요?”
“공손무헌? 들어보지 못한 이름 같군.”
아직 안 나온 건가? 아니면 이름을 철저히 숨겨서?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풍천은 불안감을 누르고 질문을 돌렸다.
“공손선우는 아세요?”
“천외공자 말인가? 그 이름 모르면 요즘 촌뜨기 취급받지.”
‘그 자식이 그렇게 유명해졌단 말이지?’
이가 갈렸다.
‘개자식, 네놈의 행복도 이제 끝이다, 이놈.’
풍천은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진 후 신검문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백무천 문주가 신검문으로 돌아갔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구룡회 아니, 천룡회에 신검문 문도들이 남아 있습니까?”
“남아 있네. 백무천이 반만 데려갔으니까. 아, 그리고 신검문은 지금 백무천이 문주가 아니네.”
“예?”
“그의 둘째 제자인 영호관이 문주가 되었지.”
‘무슨 말이지? 화청백도 아니고 영호관이 왜 문주가 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풍천은 고 노인에게 물어보았다.
“영호관이 어떻게 문주가 된지 아십니까?”
“자세한 것은 모르네. 다만 작년 가을에 신검문에서 제법 큰일이 벌어졌는데, 그 이후로 백무천이 그를 문주로 지명했네.”
“그거 참…… 자세히 좀 말씀해주시죠.”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네. 그들이 워낙 쉬쉬해서 말이야.”
‘회남에 문도들이 있다니까, 자세한 것은 그곳에 가서 알아봐야겠군.’
풍천은 그쯤에서 질문을 마치고 철창 안으로 주먹을 불쑥 밀어 넣고 손을 폈다.
그의 손 위에서 열 냥짜리 금원보가 등잔불빛을 받아서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순간, 금방 죽을상이던 고 노인의 눈빛이 금원보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났다.
“그, 그건 뭔가?”
“이걸로 정보 좀 사죠.”
황금 열 냥이면 최고급 정보도 살 수 있다.
심지어 사람의 목숨까지.
고 노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언제 죽을상이었냐는 듯 허리를 펴며 풍천을 응시했다.
“어떤 정보를 사려고 그러는가?”
“첫째, 천룡회의 공손선우, 그자에 관한 모든 것.”
솔직히 정보를 얻는 것치고 황금 열 냥은 지나치게 많은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은자 한 냥에 손을 벌벌 떠는 그가 손끝 하나 떨리지 않고 황금 열 냥을 내민 것은, 당시 고 노인이 겪은 일을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금은 귀신도 부리는 법. 고 노인이라면 그만한 값어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고 노인은 공손선우라는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황금 열 냥은 일 년에 한 번 받아볼까 말까 한 거액이었다.
결국 쪼글쪼글한 입술을 살짝 깨문 고 노인은 풍천의 손에 있는 금원보를 집어들었다.
“어디로 알려야 하지?”
“나중에 제가 회남 분타로 찾아가죠. 바람이 찾아오면 알려주라고 하쇼.”
“알겠네.”
“아, 그리고 혹시 그림 그릴 줄 아쇼?”
“그림? 그림이라면 남 못지않게 그릴 줄 알지.”
“잘됐군요. 제가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곳을 말해줄 테니까, 그림으로 그려보쇼.”
고 노인은 종이 하나를 탁자 위에 펼치고 세필에 먹물을 듬뿍 먹였다.
“어디 말해보게.”
풍천은 정신을 잃었을 때 떠올랐던 풍경을 하나하나 말해주었다.
붉은 담 앞의 하얀 석마, 돌다리가 있는 연못, 그 다리 건너에 있는 높은 탑…….
고 노인은 풍천의 말을 들으며 그림을 그렸다. 풍천은 조금 잘못되었다 싶으면 다시 그리게 했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평범한 장포를 입었던 장한과 미부의 모습을 설명했다.
고 노인은 반 시진에 걸쳐서 두 장의 그림을 완성했다.
풍천은 그중 장한과 미부의 얼굴이 담긴 그림을 조심스럽게 접어서 품속에 넣고, 풍경을 그린 것은 고 노인에게 주었다.
“그 그림 속의 석마와 탑, 연못이 있는 곳을 찾아주시오. 그게 두 번째 청부요.”
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특히 공손선우의 일처럼 위험한 일이 아니라는 게 더욱 마음에 들었다.
“알겠네. 내 몇 장 더 그려서 각 분타에 보내보겠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찰 하나를 상구의 대원사 주지에게 전해주쇼.”
“전해주기만 하면 되나?”
풍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붓과 종이를 한 장 얻었다.
잠시 후, 간단하게 자신의 동향을 적은 풍천은 봉인도 하지 않고 서찰을 건넸다. 봐도 상관없었으니까.
고 노인은 이미 힐끔거리면서 서찰의 내용을 읽었기에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회남에서 하룻밤 자고 천궁산으로 갈 거요. 도둑놈 들어오지 않게 집단속 잘하쇼. 노인네가 굶으면 더 아픈 법이니까, 밥 굶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드쇼.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서찰을 본 고 노인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풍천이 나이 든 노부모에게 보낸 편지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밖에서는 깽판 쳐도 늙은 부모에게는 잘해주나 보군.’
“내 꼭 전해주겠네.”
풍천은 씩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가보겠수. 몸 건강히 지내쇼. 누가 뭐래도 나는 고 영감님이 좋으니까.”
“그, 그런가?”
고 노인의 목소리가 감동으로 잘게 떨렸다.
풍천은 손을 흔들어주고 전당포를 나섰다.
밖으로 나선 그의 눈빛이 자잘하게 물결쳤다.
‘한 발 한 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
3
다음 날 아침. 풍천은 느긋이 식사를 마친 후 백리진학에게 물었다.
“저는 일단 회남으로 갈 생각인데, 백리 대협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동쪽으로 가서 옛 친구들을 만나 볼 생각이네. 만난 지 오래되어서 아직 그 자리에 있을진 모르겠네만.”
풍천의 눈빛이 반짝였다.
칠절의 하나, 천중수 백리진학의 친구라면 범상한 사람들은 아닐 터. 숫자가 얼마나 될진 몰라도 그들이 움직인다면 신마성에 적잖은 부담이 될 것이다.
어쨌든 동쪽으로 간다면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는 일.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돈 좀 빌려줄 수 있나? 나중에 한꺼번에 갚지.”
풍천은 백리진학을 빤히 쳐다보았다.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서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물론 미안하다거나 고마워하는 표정도 아니고.
외상과 돈 빌리는 짓을 밥 먹듯이 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
아마 세상 경험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백리진학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풍천은 그런 백리진학에게 돈을 빌려주기로 했다.
“언제 갚으실 거죠?”
“나중에 다시 만나면.”
정말 얼굴 가죽이 두꺼웠다. 제종완의 죽음을 듣고 울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래도 풍천은 담담히 대했다. 해결사 일하면서 얼굴 두꺼운 사람 어디 한두 번 만나 봤던가?
“그럼 그렇게 하죠 뭐.”
풍천은 담담히 대답하고 은자 오십 냥에 해당하는 금두와 은자를 꺼내주었다.
백리진학은 신마성에 복수를 하려는 사람. 자신 역시 비슷한 사정이니, 죽지 않는 이상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오십 냥의 열 배, 아니 백 배의 이득을 얻으면 되지 않겠는가.
“고맙네.”
“이렇게 헤어지다니, 정말 아쉽군요.”
“먼 길을 가야 하니 이만 가보겠네.”
“나중에 뵙죠. 혹시라도 저를 찾으시려면 회남으로 오십쇼. 아니면 하오문의 분타로 가셔서 물어보시든가.”
“그러지.”
그렇게 백리진학과 헤어진 풍천은 혼자서 합비를 빠져나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구름 사이로 유난히 파란 하늘이 보였다.
‘꼭 아수비의 눈 같군.’
제2장. 세상으로 나오다
1
구름이 잔뜩 낀 초여름의 어느 날 저녁.
쿠르르르르릉, 쩌저저저적.
천신이 노했는가, 천지가 울어대며 황산 일대 수백 리 대지가 흔들렸다.
거산준령이 뒤흔들리고, 거대한 바위가 쪼개지고, 천장 절벽에서 집채만 한 바위들이 쏟아졌다.
지상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백 장 지하의 암벽도 쩍쩍 갈라지고 사람이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요동쳤다.
쿠구구궁! 콰광! 쩌저저적!
“비아야! 연아를 잘 챙겨!”
“아저씨! 벽혼계 쪽으로 피하세요! 령아!”
“내 걱정 말고 누나부터 피해! 어서!”
아수비와 아극타, 아극령은 공포에 질려서 벽혼계 쪽으로 달렸다.
벽혼계는 벽라동에서 가장 단단한 지형이었다. 또한 벽라족 조상의 혼이 보살피는 곳이어서 지금까지 몇 번의 지진에도 끄떡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벽라족이 벽라동에 터를 잡은 지 천 년이 넘도록 이토록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기에 벽혼계가 견딜 수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세 사람은 벽혼계로 들어가서 지진이 멈추기만 기다렸다.
아수비는 아기를 꼭 껴안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늘이시여, 저는 데려가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이 아이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오오오, 하늘이시여…….’
반 각이 지나자 진동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거대한 암봉이 주저앉고, 천장 절벽이 갈라지고, 황산의 지형이 뒤틀렸다.
천하절경이었던 곳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가 하면, 또 다른 기경이 만들어졌다.
지하의 벽라동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굴 몇 곳이 붕괴되어서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특히 식량보고이자 식수원이었던 지하 호수의 물이 갈라진 바위 틈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다.
두어 번의 여진이 더 찾아온 뒤 고요가 찾아오자, 아수비와 아극타, 아극령은 벽라동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지하 호수의 물이 거의 다 빠져나간 걸 알고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식수로 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고기가 들어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극타는 모든 상황을 살펴본 후 아수비와 아극령을 불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아수비는 일단 아극타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아저씨 의견을 말씀해보세요.”
아극타는 잠시 고민하고는 아수비와 아극령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벽라동을 떠나야 할 것 같다.”
아수비와 아극령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벽라동을 나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기에 기대감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아극령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생활은 이곳에서 하고, 식량만 밖에서 조달하면 되지 않을까요? 밤에만 나가서 사냥을 하고 버섯이나 과실을 따오면 될 것 같은데.”
아수비는 아극타를 바라보았다.
아극령의 말대로 생활하는 방법도 괜찮을 듯했다. 하지만 아극타가 단정적으로 떠나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벽라동에 문제가 있나요?”
아극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장이 너무 많이 갈라져서 한 번만 더 지진이 발생하면 벽라동이 통째로 무너질 것 같다. 사실 그것뿐이라면 안전한 쪽에서 지내며 령아의 말처럼 살면 되는데…….”
그때였다.
우르르르르릉.
벽라동이 또 흔들렸다.
여진치고는 제법 강하게 느껴졌다.
아극타는 고개를 쳐들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여진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어디선가 바위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다급히 서둘렀다.
“안 되겠다. 필요한 물건을 챙겨서 일단 지상으로 나가는 통로로 가자. 아무래도 조금 전 지진으로 통로가 뒤틀린 것 같다. 이러다가 통로의 천장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영원히 밖으로 못 나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