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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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01화
201화
제1장. 풍천, 묵전(墨電)을 얻다
1
‘정력?’
풍천은 재빨리 눈빛을 누그러뜨리고 대나무 통을 열어보았다.
“응? 반밖에 안 찼네요? 모자랄지 모르니 조금만 더 주시죠.”
역조생은 연신 비싼 재료라는 걸 강조하며 대나무 통에 약을 꽉꽉 채워주었다.
풍천은 이곡에게 약을 반만 줄 건지, 아니면 조금 더 줄 건지 심각하게 고민하며 조심스레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역조생에게 심심하면 놀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흐뭇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크크크, 초령이도 좋아할 거야.’
강호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부지런히 합비로 향하던 풍천은 동성 동북쪽에 있는 종산 근처를 지나다 걸음을 멈췄다.
금귀옥에서 만났던 제종완이 종산에 가서 친구를 만나달라고 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풍천은 단천무령과 강호의 소식이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진학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청부금을 줄 거라 했다. 게다가 제종완이 백운암의 주인에게 뭘 맡겼는데, 그걸 자신에게 선물로 준다고 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가볼 이유가 충분했다.
‘내가 하루 늦게 간다고 강호가 어떻게 되겠어?’
풍천이 물어 물어서 종산 중턱의 백운암에 도착한 것은 신시 무렵이었다.
백운암은 세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작은 사찰이었다.
사찰 안으로 들어간 풍천은 쟁반을 들고 가던 동자승을 붙잡고 진학에 대해 물었다.
동자승은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그분은 왜 찾으시는 거예요?”
“전할 말이 있어서.”
“그럼 저 계곡 안에 있는 폭포로 가보세요. 별일이 없다면 그곳에 계실 거예요.”
동자승이 말한 계곡으로 이백여 장을 들어가자 높이가 오십 척가량 되는 웅장한 폭포가 나왔다.
풍천은 직경 칠팔 장 넓이의 소(沼) 바로 앞까지 걸어가서 폭포 밑을 바라보았다. 폭포 밑의 바위 위에는 짧은 바지만 입은 중년인이 폭포의 물줄기를 맞으며 앉아 있었다.
“귀하가 진학이라는 분입니까?”
중년인이 눈을 뜨고 대답했다.
“그렇다네. 그런데 자네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건가?”
“저는 풍천이라 합니다. 제종완이란 분의 말씀을 듣고 찾아왔죠.”
진학은 그 말을 듣더니 벌떡 일어나서 폭포의 엄청난 수압을 뚫고 단숨에 소를 건너왔다.
그리고 물에 젖은 채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차가운 눈빛을 번뜩이며 다그치듯 물었다.
“자네가 어떻게 제 형을 알지?”
“만났으니까 알죠. 만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나?”
진학의 두 눈에서 신광이 쏟아졌다.
“지금 일 년 전에 만났다고 했나?”
“그렇다니까요?”
“어디서, 어떻게 만났지?”
풍천은 사실대로 말했다.
“신마성 금귀옥에 돈주머니 찾으러 들어갔다가 만났죠.”
진학은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풍천을 노려보았다.
제대로 듣긴 했는데 이해가 잘 안 되었다.
금귀옥은 소문으로만 알려진 신마성의 특수 뇌옥이다. 그곳에 왜 제종완이 갇혀 있단 말인가?
아니, 그것은 그럴 수도 있었다. 제종완은 신마성 놈들과 사이가 안 좋았으니까.
그런데, 그 금귀옥에 돈주머니를 찾으러 들어가서 만났다고?
‘이놈이 지금 나를 놀리나?’
하지만 그는 냉정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물어보았다.
“제 형은 삼 년 전에 실종되었다. 천하를 일 년 동안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지. 그런데 일 년 전에 신마성의 금귀옥에서 만났단 말이지?”
“바로 그겁니다. 하, 하, 하. 그런데 제 대협이 없는 곳만 찾아다니신 모양이군요.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해결사를 찾으시지. 혹시 상구에 사람 잘 찾아준다는 해결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진학의 냉정하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해, 해결사? 자네가 해결사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일개 해결사가, 돈주머니를 찾기 위해서, 신마성의 금귀옥에 들어갔단 말이지? 그리고 그곳에서 제 형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풍천은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중간에 약간 다른 일이 있긴 했습니다만, 조금도 어김없는 사실이지요. 하, 하.”
진학의 젖은 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들으면 들을수록 풍천의 말이 헛소리로 들렸다.
천하의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말이다.
신마성 금귀옥이 어떤 곳인데! 신마성의 마인들이 다 개과천선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데 왜 저놈은 이곳에 나타나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문제는 그것이었다.
‘잡아서 물어보면 알겠지.’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린 진학은 쌍장에 공력을 끌어올리고 냉랭히 코웃음 쳤다.
“흥, 네놈을 잡아서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알아봐야겠다!”
나직이 으르렁거린 진학은 우수를 쫙 펼쳐서 풍천을 향해 뻗었다.
일순간, 거미줄처럼 촘촘한 장력이 풍천을 뒤덮었다.
“거참, 사람 말 되게 못 믿으시네.”
풍천은 천라신수를 펼쳐서 진학의 장세를 걷어냈다.
츠츠츠츠츠.
진학은 자신의 장력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파훼되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보니 보통 놈이 아니로구나!”
한소리 내지른 그는 공력을 더욱 강하게 끌어올리고 천중무운장(天重霧雲掌)을 펼쳤다.
풍천은 눈앞이 희뿌옇게 변하는 걸 빤히 보면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두 손을 엇갈려 쳐냈다.
두 사람의 장력이 다섯 자의 거리를 두고 뒤엉켰다.
우르르릉, 떠덩!
천둥소리가 폭포의 굉음을 밀어내며 울렸다.
강력한 반탄력에 밀린 풍천과 진학은 두 걸음씩 물러서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진학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본 것처럼 눈매를 가늘게 떨었다.
“어이가 없군. 새파란 놈이 내 천중무운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다니.”
풍천은 장법의 이름을 듣고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혹시 귀하가 천중수 백리진학……?”
“맞다.”
풍천의 눈이 커졌다.
천중수(天重手) 백리진학.
그는 칠절(七絶) 중 한 사람으로 장법에 관한 한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였다.
“칠절 중 한 분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오늘 운이 좋군요.”
“너는 누구냐?”
“풍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계속할 겁니까? 저는 제종완이란 분의 말을 전하러 왔지 싸우러 온 게 아닌데 말이죠.”
백리진학은 경악과 곤혹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제 형이 신마성 금귀옥에 있었단 말이냐?”
“믿든 말든 이제 맘대로 하쇼. 나는 말만 전하고 대가로 은자 이십 냥만 받으면 되니까. 제 대협은 귀하가 항주의 술빚 대신 줄 거라고 했는데, 어떻게 할 거요?”
백리진학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손을 거두었다.
이제는 풍천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항주의 술빚에 대한 것은 그와 제종완만이 아는 일이었다.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술을 몽땅 퍼먹고 취해서 혼자 나간 바람에 제종완이 곤욕을 치렀었으니까.
“오해해서 미안하네.”
“하, 하. 천중수의 천중무운장을 구경했으니 손해 본 것은 없죠 뭐.”
“자네의 정체가 정말 궁금하군. 떳떳하다면 솔직하게 말해주게.”
“풍천이라니까요. 어떤 사람은 천풍의 주인이라고도 부르죠.”
장 노인이 처음 찾아왔을 때 한 말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 말을 하고 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천풍의 주인이라…… 좌우간 내 방으로 가세.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군.”
백리진학은 제종완이 신마성 금귀옥에서 죽었을 거라는 말을 듣고는 소리 없이 굵은 눈물을 흘리며 지기의 죽음을 슬퍼했다.
풍천은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잔잔하게 젖어들었다.
자신이 죽으면 저렇게 슬퍼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일 년 동안 사라졌으니, 죽은 줄 알고 많은 사람이 슬퍼했겠지?’
기뻐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데 대충 계산해봐도, 슬퍼한 사람보다 기뻐한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았다.
풍천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의미에서 슬퍼한 사람에게는 선물을 주고, 기뻐한 사람에게는 징벌을 내리기로 작정했다.
속 좁은 놈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남의 불행을 보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거꾸로 매달려서 반성해야 돼!’
그런데 장 노인은 슬퍼했을까, 기뻐했을까?
초웅은 워낙 순해서 눈물, 콧물 전부 짜내며 울었겠지?
‘초령이는 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네.’
풍천이 울적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백리진학이 코를 팽 풀고는 표정을 정리했다.
“제 형의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네.”
고맙기는……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인데.
“별말씀을…….”
“그런데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돈 없이 지낸 지 일 년이 넘어서 지금 나에게는 동전 한 푼도 없다네. 나중에 갚으면 안 되겠나?”
풍천은 속이 조금 짰지만, 은자 이십 냥 때문에 천중수 백리진학과 드잡이를 할 수는 없는 일. 별걸 다 걱정한다는 투로 말했다.
“하, 하, 하. 없으면 별수 없지요.”
품속에 거금이 있는데, 은자 이십 냥 정도야…….
‘아니지, 그래도 아껴 써야 돼. 아무리 큰 돈주머니도 작은 구멍을 무시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속이 텅 비는 법이거든.’
그는 은자 이십 냥을 포기하려던 마음을 재빨리 거뒀다.
“좌우간 그건 나중에 받기로 하고…… 제 대협이 백운암의 주인을 만나서 일전에 맡겨놓은 물건을 건네받으라고 했는데, 그분은 어느 방에 계십니까?”
백리진학은 그 말에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제 형이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아니면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풍천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백리진학은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내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가세. 내가 안내하지.”
풍천은 백리진학의 소개로 백운암의 주인인 도원선사를 만났다.
풍천의 말을 들은 도원선사는 눈을 감고 천수경의 몇 구절을 암송하더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제종완이 맡겼다는 물건을 가져와 풍천에게 내밀었다.
“영원히 잠들기 바랐던 이걸 제 시주가 풍 시주에게 주라고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야. 모든 게 인연일지니…….”
석 자, 세 치 길이의 상자는 검갑이었다.
풍천은 제종완이 자신에게 선물하기로 한 물건이 검임을 알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침 검이 부러져서 하나 사야 할 판이었다.
제종완이 맡길 정도면 보통 검은 아닐 터.
‘이게 웬 떡이야!’
그는 속마음을 감추고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검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서 검을 꺼내보았다.
손잡이부터 검신까지 석 자 길이였다. 그런데 검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어? 뭐로 만들어서 이리 무겁지?’
같은 길이의 검보다 오 할은 더 무거울 듯했다.
하지만 거부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거부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그 묵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풍천은 손잡이를 잡고 검을 빼보았다.
한 뼘 정도 모습을 드러낸 묵빛 검신에 두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묵전(墨電).
검은 번개.
문득 풍천은 오래전 술 취한 사부에게 들었던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날 사부는 횡설수설하며, 강호의 도둑들 사이에 전설처럼 떠돌다가 이제는 강호에서 잊혀 사라진 칠대신기(七大神器)에 대해 이야기했다.
술에 취한 목소리라 정확히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 이야기가 워낙 흥미진진해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때 사부가 어떤 검에 대해서 말했지.’
“검은 번개가 치면 아수라의 혼조차 부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