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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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00화
200화
6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성큼 다가왔다.
풍천은 지켜보는 역조생이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몸을 완치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새벽에 한 시진 동안 운기조식을 하고, 그 일이 끝나면 몸에 한계가 올 때까지 수련에 열중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다시 운기조식을 해서 티끌만 한 기운이라도 더 모았다.
역조생은 자신의 예상보다 배는 빠르게 몸이 회복되는 풍천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대로라면 삼 년이 아니라 이 년이면 본래의 몸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사월이 반쯤 흐른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날 저녁에도 풍천은 평소 때와 다름없이 운공조식을 하며 공력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에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만 해도 더딘 회복에 무척 조급해했지만, 지금은 조급한 마음을 털어낸 터였다. 그보다는 자신의 무공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노인장은 최소 이 년은 걸릴 거라 했지.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 아무리 길어도 일 년 안에 모든 것을 되찾아야 해.’
이를 지그시 악문 그는 세 번의 대주천이 끝나자 한 번 더 기운을 강제로 일주천시켰다.
아직 혈맥이 약해서 무리를 하면 역효과가 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삼성의 공력을 찾은 상태. 한 번 더 해도 혈맥에 무리가 가지 않을 듯했다.
문제가 생긴 것은 진기가 심장을 지날 때였다. 진기를 움직여 약해진 혈맥을 강제로 통과시키는데 자신의 진기 속으로 뭔가가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별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지더니 결국은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거세게 흘렀다.
‘이런, 너무 세.’
그는 그 기운의 정체를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심장에 뭉쳐 있던 벽라의 인에서 발현된 기운이 제멋대로 움직인 것이다.
문제는 그가 강제로 통제하려 할 때마다 더욱 강력히 반발하며 온몸이 터질 것처럼 극렬한 고통이 밀려든다는 것이었다.
“크억! 이, 이게 무슨 일이지?”
기겁한 풍천은 급히 운공조식을 멈추려 했다. 하지만 벽라의 인에서 뻗어 나온 기운은 그의 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벽라진기의 운용통로를 따라서 노도처럼 흘렀다.
“끄억! 흐억!”
어지간한 고통은 고통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풍천이거늘, 이가 절로 딱딱 부딪쳤다.
‘서, 설마 금제가 발동된 건 아니겠지?’
금제가 발동될 이유는 두 가지다.
아극사가 심심풀이로 금제를 발동시켰거나, 아니면 아극사가 죽었을 때.
이유가 전자라면 잠깐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후자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아극사가 죽으면 자신도 죽는다 하지 않았던가.
‘아, 안돼. 노인장, 욕하지 않을 테니 제발 살아 있어줘!’
하지만 벽라의 인에서 뻗어 나온 기운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끝내 단전에 잠들어 있던 벽라의 인마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어억!”
풍천의 몸이 풀쩍 한 자가량 튀어 올랐다.
그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몸이 불구덩이에 빠져서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혈맥이 폭죽처럼 터져버릴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아득한 정신 저편에서 벽혼계에 들어갈 때 아수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억지로 대항하지 말고, 동화되려고 노력해봐요. 힘들어도 정신을 잃으면 절대 안 돼요.”
벽혼계의 유령과 몸 안의 금제는 분명 다른 존재였다.
하지만 둘 다 벽라족의 혼이 담긴 존재가 아닌가.
풍천은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통제하려던 기운을 풀어주고는 제멋대로 흐르게 놔두었다.
이제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 그는 아수비에게 절실히 빌었다.
‘아수비, 나 살고 싶어! 살아서 부모님도 찾고 싶고, 아수비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벽라의 인에서 뻗어 나온 기운은 광폭한 광룡처럼 제멋대로 풍천의 온몸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승천하듯이 위로 쭉 치솟더니 머릿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콰아아아아!
하얀 폭죽이 터졌다.
그 직후, 악착같이 붙잡아 놨던 의식의 끈이 툭 떨어지자, 풍천은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무슨 일이라도……?”
역조생은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풍천이 눈을 까뒤집고서 벌러덩 뒤로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저, 저놈이!”
대경한 역조생은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죽으면 안 돼! 내가 어떻게 살려놨는데!’
화가 난 그는 침을 튀기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멍청한 놈! 무리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해도 안 듣더니……!”
그리고 급히 맥문을 잡고서 풍천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역조생의 실처럼 가느다란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어, 어떻게 된 거지?’
풍천의 맥은 조금도 이상이 없었다. 죽기는커녕 오히려 기운이 전보다 더 강하고 맑아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을 것 같은 표정으로 풍천을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진짜 알 수 없는 놈이네.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7
아극사는 입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 우리 부족에게 씨를 준 대가라 생각해라.’
벽라의 인과 이어진 줄을 고의로 끊었다. 어쩔 수 없었다.
죽음을 앞둔 상태. 이대로 죽으면 풍천도 죽을 터. 아수비가 낳은 아이의 아비를 죽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할아버지!”
아수비는 절규하며 아극사의 입에 묻은 피를 닦았다.
“슬퍼하지 마라.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몸이 아니더냐?”
“흑흑흑, 할아버지.”
아극사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아극령과 아극타를 바라보았다.
“네 누이를 잘 보살펴줘라.”
“예, 할아버지.”
“아극타, 내가 죽은 이후부터 네가 족장이다. 비아와 령아, 그리고 연아를 부탁한다.”
“제 모든 것을 바쳐 부족을 보호하겠습니다.”
“족장으로서 마지막으로 명을 내리마. 아극타와 아극령은 바깥세상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해서 우리 부족의 피를 잇도록 해라.”
아극타와 아극령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숙부님…….”
“할아버지…….”
“사실 진즉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시조께서도 멸족이 될 줄은 생각지 못하고 내린 명령일 것이거늘. 그걸 지키겠다고 고집부리는 바람에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아극사는 허공을 바라보며 탄식하듯 말하고는 아수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그 녀석을 안아보자꾸나.”
아수비는 자신의 옆에 놓인 고기가죽으로 만든 은빛 포대기를 안아들었다. 은빛 포대기 안에는 검은 눈을 반짝이는 하얀 피부의 인형처럼 귀여운 아기가 들어 있었다.
아수비는 아기를 아극사의 품에 안겨주었다.
아극사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아기를 안았다. 아기가 아극사를 보고는 방긋거렸다.
아극사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편안한 웃음이었다.
“허허허…….”
아기의 웃음은 저 세상으로 가는 그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8
벽라의 인이 스스로 움직인 사흘 뒤.
풍천은 히죽거리며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손 위에 비수 모양을 한 파란 광채가 솟구쳐 있었다.
“이게 내 몸속에 있었단 말이지?”
그는 그 광채를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유천삼위에게 쫓길 때 무의식중에 눈부신 벽광을 쏟아냈지 않던가.
풍천은 신기한 장난감을 본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벽라의 인을 살펴보고는 그 기운을 몸 안으로 갈무리했다.
순간 손 위에 있던 벽라의 인이 손바닥 속으로 스며들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곧 심장과 단전에 조용히 자리 잡고는 자신이 부르기만 기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금제가 풀렸다는 걸.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걸. 이제 벽라동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때 문득 아수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든 풍천은 아련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갈 거야. 아수비와 약속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걸까? 왜 금제가 갑자기 풀린 걸까?
허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중요한 것은 금제가 풀리고,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무공을 빠르게 되찾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한두 달 정도만 흐르면 본래의 무공을 되찾을 수 있을 듯했다.
물론 그 전이라도 강호에 나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급함을 버리고 자신의 힘을 되찾는 일에만 매진할 생각이었다.
천룡회와 신마성을 상대하는 상황. 그들은 천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름 강하다 자부했던 이전에도 죽을 위기를 겪지 않았던가. 마음만 급해서 어설픈 상태로 세상에 나가봐야 절대 좋을 게 없었다.
‘남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돼.’
9
풍천이 산을 내려가기로 결심한 것은 벽라의 인이 움직인 지 두 달쯤 지났을 때였다.
역조생은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는 풍천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눈을 까뒤집고 쓰러진 일이 일어난 후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몰랐다.
살아난 것만 해도 대단한데, 일 년도 안 돼서 온전한 몸을 되찾은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풍천이 지닌 무위였다.
그는 풍천의 본 실력을 보고 나서야 풍천이 도둑놈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저놈이 진짜 도둑이면 황궁도 털릴 게야.’
그가 바라보는 동안 풍천은 마지막으로 돈주머니에 든 금자와 은자를 세어봤다.
“하나, 둘, 셋…….”
청광석과 공손무백에게 받은 보석은 그대로 있고, 정확히 금자 일곱 냥과 은자 다섯 냥이 모자랐다.
풍천은 힐끔 역조생을 바라보았다.
역조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약재를 손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에 놓아야 할 것을 왼쪽에 놓는 걸 보니 머릿속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응? 이제 눈이 침침해져서 엉뚱한 데 놓았군.”
뒤늦게 알아채고 그리 핑계를 대지만, 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풍천도 모르지 않았다.
풍천은 큰맘 먹고 따지지 않기로 했다. 따지기는커녕 통 크게 금자 열 냥을 집어서 역조생에게 내밀었다.
“생활비로 쓰쇼.”
“나도 돈 있다.”
“고마워서 주는 건데, 좀 받으쇼.”
역조생은 어쩔 수 없이 받는다는 표정으로 열 냥을 받았다.
그리고 머뭇거리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물었다.
“너, 귀수괴의는 왜 찾은 거냐?”
“예?”
“전에 귀수괴의에 대해서 물어봤잖아?”
그랬었다. 하지만 역조생이 귀수괴의 이야기만 나오면 자꾸 짜증을 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물어보지?
풍천은 사실대로 말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살찌는 병에 걸린 부인 때문에 귀수괴의를 찾고 있거든요.”
“살찌는 병?”
풍천은 이곡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역조생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다 끝나자 간단하게 답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고치지 못할 것도 없지.”
“정말입니까?”
“그런 사람은 묶어서 가두어놓고 치료해야 하는데, 그럼 정신적인 괴로움 때문에 미칠 수도 있다. 위장을 손보는 방법이 있긴 한데, 그것도 죽을 확률이 너무 높고. 그러니 이걸 써보라고 해. 내가 최근에 개발한 거니까.”
역조생은 한쪽에 있는 상자들을 뒤지더니 작은 대나무 통을 내밀었다.
“이걸 음식에다 조금씩 뿌리라고 해라. 처음에는 식사를 잘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식욕이 떨어질 거다. 그렇게 석 달 정도 지나면 자연스럽게 식사량이 조절이 될 거다.”
“그게 뭡니까?”
“지네와 박쥐의 배설물에 다섯 가지 약초를 섞어서 가루 낸 건데, 무미무취(無味無臭)해서 섞어도 모를 거야. 아마 강호에서 이걸 만들 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걸?”
말이 좋아 배설물이지, 결국은 ‘똥’이란 말이 아닌가.
풍천은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 식욕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가만? 요즘 이 인분 이상 먹으면 더 먹기가 싫던데, 혹시 이 영감이 내가 먹는 음식에다 저걸 뿌린 것 아냐?’
풍천은 역조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역조생은 눈빛 한 점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사실 남자가 먹으면 더 좋은 약이지. 정력에 아주 좋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