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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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98화
198화
2
평범한 장포를 걸친 장한은 아이를 붉은 문 앞에 있는 석마에 태우고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우리 천아, 영락없이 장수로구나.”
그 옆에서 궁장을 한 미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장수보다 학자가 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상공?”
“그것도 괜찮지. 그런데 글씨 쓰는 쪽으로는 소질이 없는 것 같아.”
미부는 곱게 눈을 흘겼다.
“글씨를 잘 써야만 훌륭한 학자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하하하, 그런가? 자, 이제 다른 곳으로 가보자.”
장한은 아이와 미부를 데리고 어디론가 갔다.
연못을 건너자 거대한 탑이 보였다.
장한은 그 탑 앞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미부와 함께 슬픈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불길한 느낌이 든 아이는 손을 뻗어서 장한과 미부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손이 가까이 가면 장한과 미부가 멀어졌다.
‘가지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 저 천아예요! 제발 천아를 버리지 마세요!’
아이는 버둥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의 뽀얀 볼을 타고 굵은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이를 바라보던 장한과 미부의 얼굴이 참담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미안하다, 천아야. 정말 미안하다. 아버지가 못나서 너를 살릴 방법이 이것밖에 없구나.”
“흑흑흑, 우리 천아, 엄마 아빠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지?”
아이는 도리질을 치며 악을 썼다.
“싫어요! 천아는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그 와중에도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장한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고, 미부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서 오열하며 아이만 바라보았다.
“아버지! 엄마아아아!”
아이는 심장이 튀어나오도록 소리쳤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장한과 미부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안 돼에에에에!”
풍천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눈을 떴다.
눈에 고인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눈을 떠서인지 천장이 뿌옇게 보였다.
“그놈, 요란하게 깨어나는군.”
옆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슬쩍 눈을 돌려서 옆을 바라보자 장 노인과 쌍벽을 이룰 만큼 주름지고 검버섯 핀 얼굴이 보였다.
풍천에게는 차라리 그 얼굴이 미끈한 공손선우의 얼굴보다 백 배는 더 편했다.
“여, 여긴 어디죠?”
“내 집이지.”
어째 대답이 삐딱하다.
풍천은 속으로 ‘동암과 서성 중간쯤 되겠지 뭐.’ 하고는 다른 것부터 물어보았다.
“어르신께서 저를 구하셨습니까?”
“그렇다.”
“감사합니다. 아마 복 받으셔서 천당에 가실 겁니다.”
“글쎄…….”
역조생은 주름진 입술을 비틀며 묘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귀수괴의라 불리는 것은 일반적인 의원과는 많은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 자신조차 죽으면 지옥에 갈지, 천당에 갈지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풍천은 그런 역조생의 반응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르신은 뉘십니까?”
“역씨 성을 가진 늙은이지.”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죠?”
“너를 발견한 지 백 일이 지났다.”
고개가 절로 벌떡 들렸다.
“뭐라고요? 벌써 백 일이 지났다고요?”
“그래. 정확히는 백 일 하고도 하루가 더 지났지.”
풍천은 눈을 껌벅이며 역조생을 바라보았다.
“백 하루 동안 제가 여기에 있었단 말이죠?”
역조생은 약을 절구에 찧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니까? 흘흘흘, 죽을 확률이 반쯤 되었는데 운이 좋았지. 아마 내가 약초를 캐러 백아곡에 가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거야.”
입을 반쯤 벌린 채 역조생을 바라보는 풍천의 뇌리에서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단천무령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신마성과 구룡회의 싸움은?
공손선우가 왔다면 천외천도 왔겠지?
신검문에는 별일이 없을까? 백초령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풍천은 몸을 일으키려고 두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서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혈도가 짚였나?’
풍천의 마음을 짐작한 역조생이 풍천의 현 상태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심장과 단전이 심한 충격을 받은 상태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지. 그리고 두 팔의 근맥은 잘게 찢어져서 힘을 쓸 수가 없을 거야. 왼쪽 어깨는 비파골이 박살 났고. 그 상태로 하루만 더 매달려 있었으면 피가 다 빠진 채 짐승의 밥이 되었을걸? 그나마 성한 게 두 다리와 머리인데, 다리는 뼈가 십여 군데 금 가고, 허벅지에 제법 큰 구멍이 나서 근육이 파열된 바람에 당분간 걷지 못할 거다. 흘흘흘, 그래도 머리가 부서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머리가 부서졌으면 여기 누워있지도 못했을 테니까.”
한마디로 숨 쉬는 통나무 신세란 말.
천풍무영류를 익힐 때도 이 정도 부상을 입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풍천이었다.
사부가 술에 취해서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수련을 시킬 때도 팔다리 부러진 정도였을 뿐. 가끔은 뼈가 튀어나와서 살이 너덜너덜해진 적은 있었지만,
초조해진 풍천은 사정하듯이 역조생에게 물었다. 그나마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천행이었다.
“저기요, 의원이신가요?”
보면 모르나? 아무나 지옥에 두 발 다 들여놓을 놈 살릴 수 있는 줄 알아?
역조생은 쪼글쪼글한 입술을 거의 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제 몸이 나으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역조생은 절구로 절구통 안의 약초를 쿵 소리 나도록 내려치며 말했다.
“어느 정도냐가 문제지.”
“원래대로 되려면……?”
쿵, 쿵, 쿵…….
역조생은 십여 번 절구를 내려친 후 절구질을 멈추고 풍천을 쳐다보았다.
“욕심이 많군. 죽었다 살아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
“서, 설마 무공을 잃었단 말은 아니겠죠? 아니,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건…….”
풍천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떨리는지 한 뼘 두께의 나무침상도 같이 떨렸다.
“일이 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한다면 그 정도까지 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기연이 없는 한 평생 가도 원래대로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말도 안 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거짓말일 거야. 그래, 저 노인은 의원이 아닐지도 몰라. 단순한 약초꾼일지도.
풍천은 역조생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 의원 맞아요?”
‘이놈이!’
자존심이 상한 역조생은 풍천을 꼬나보았다.
“일반 의원과는 조금 다르지. 하지만 사람의 몸만큼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늙은이다.”
“그런 분이 이 정도 부상도 못 고쳐요?”
‘이놈 봐라? 말 못 하게 성대를 확 잘라버릴 걸 그랬나?’
짜증이 난 역조생은 상황을 좀 더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이놈아, 네놈 부상은 화타나 편작이 살아서 돌아와도 완벽히 못 고쳐.”
“그 양반들이야 옛날 양반들이잖아요. 지금은 의술도 더 발전했을 텐데 왜 못 고친다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어르신은 못 고칠지 몰라도 다른 의원은 고칠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때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맞아, 태산에 진짜 뛰어난 의원이 계시는데, 그럼 저를 그곳까지만 데려다 주세요.”
역조생의 쭈글쭈글한 눈꺼풀 사이로 기광이 반짝였다.
“태산? 혹시 방도양을 말하는 거 아니냐?”
“어? 어떻게 그분을 아세요? 강호에서 그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너야말로 방가를 어떻게 아느냐?”
“제가 그분의 일을 해결해드린 적이 한 번 있거든요. 원래 은자 백 냥은 받아야 하는 일이었는데, 방 의원님의 사정이 안 좋아서 열 냥만 받았죠. 대신 언제든 한 번은 돈을 받지 않고 치료해주시기로 약조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분이야말로 천하제일 신의일 겁니다.”
풍천의 마지막 말에 역조생의 자존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방도양과 그는 필생의 맞수였다. 더구나 방도양은 정통 의술을 익혀서 사법에 가까운 의술을 익힌 그와는 부딪칠 때가 많았다.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환자를 방도양에게 보낸다?
‘절대 그럴 수는 없지!’
바로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역조생은 풍천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에게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너 따위 도둑놈은 그 과정의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거다. 게다가 죽을 확률도 반은 되고. 어떠냐, 그래도 치료받고 싶으냐?”
자신을 왜 도둑놈이라 부르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고통도 참을 자신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죽을 확률이 반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공을 잃고 평생 평범하게 살 것이냐, 아니면 절반의 확률을 걸고 무공을 되찾을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의 처지로선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서 부모님을 만나 보겠어!’
그리고 초령이도 포기할 수 없고, 복수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했다.
“정말…… 방법이 있어요?”
역조생의 눈빛이 지금까지와 달리 묘하게 반짝였다.
“흘흘흘, 물론이다.”
풍천은 그 눈빛이 조금 불안했지만 이를 악물고 승낙했다.
“좋아요. 만약 제 몸을 고쳐주신다면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
순간, 그동안 까맣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맞아! 내 돈주머니! 노인장, 제 돈주머니 어디 있죠?”
역조생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정말 알 수 없는 놈이군.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에 돈주머니 타령이나 하다니.’
2
멀쩡한 정신으로 자신의 살이 갈라지는 감촉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괴이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 겪다 보니 더 이상 괴이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풍천은 자신의 다리가 갈라지는 걸 빤히 보면서 역조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얼마나 사셨어요?”
“삼십 년이 조금 안 되지.”
“혹시 신검문에 가보신 적 있어요?”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거길 왜 가?”
‘귀수괴의가 아닌가?’
괴상한 치료 방법을 보고 혹시나 해서 물어본 터였다. 그런데 신검문에 가지 않았다니.
하긴, 한 번 손을 써서 사람을 살릴 때마다 막대한 치료비를 받는다는 귀수괴의가 이런 산골에서 혼자 살 리 없었다.
“그럼 혹시 귀수괴의라는 의원을 아세요?”
“들어는 봤지. 그 늙은이는 왜?”
“그 노인네도 어르신처럼 괴상한 방법으로 몸을 고친다고 해서요.”
괴상한 방법?
‘빌어먹을 놈.’
기분이 상한 역조생은 대답 대신 풍천을 다그쳤다.
“힘줄을 이어야 하는데, 조금 늦거나 삐끗하면 큰일이니 입 좀 다물고 있어라!”
풍천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입을 다물고 역조생을 바라보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한 치만 가르면 될 것을 두 치 가를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곧 다리에서 뭔가가 당겨지며 살을 강제로 찢어대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흐윽!’
하지만 그것 역시 몇 번 겪다 보니 신음소리를 밖으로 내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상관 노형 같았으면 부들부들 떨면서 비명을 내질렀을 텐데.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참을성이 강해. 으흑!’
잠시 후.
역조생은 다리의 힘줄을 잇고 상처를 싸맸다.
살의 결을 따라 그어지는 그의 칼질이 어찌나 정교한지 피는 많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약초인지 몰라도 역조생이 찧은 약초를 바르면 덧도 나지 않고 회복도 빨랐다.
상처를 다 싸맨 역조생은 약초를 끓인 물에 손을 씻으며 말했다.
“이것으로 끊어지고, 찢어진 힘줄은 모두 손을 봤다. 이제부터 어느 정도까지 치료되느냐 하는 것은 너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물론 하늘의 보살핌도 따라야겠지만.”
풍천은 홀로 남은 방 안에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기랄, 치료를 한 지 벌써 석 달이 더 지났는데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니…….’
차라리 태산으로 데려다 달라고 고집 피울 걸 그랬나?
하지만 역조생의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인지 몰라도 방도양과의 관계가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았다. 아마 고집을 피웠어도 자신을 태산까지 데려다 주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풍천은 천풍심법을 운용하며 필사적으로 진기를 움직였다.
지난 석 달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실낱같은 진기나마 움직일 수 있게 된 터였다.
얼마나 더 지나야 본래의 내공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진기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일단 진기를 움직일 수 있게 된 이상 회복 속도가 더욱 빨라질 테니까.
3
“후욱, 후욱, 후욱…….”
풍천은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호흡을 골랐다.
겨울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어오는데도 온몸이 땀으로 젖은 상태였다.
한 시진 동안의 수련을 마치고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통나무집의 한쪽에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이러다가 진짜로 이삼 년 걸리는 것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