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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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0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97화
197화
영호관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곳은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지요.”
웃고 말하는데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다.
전충관은 흠칫하며 더 이상 영호관의 결정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별 볼 일 없게 생각했던 영호관이 여평선과 대등하게 싸우는 걸 두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긴…….”
전충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여평선을 바라보았다.
“이제 원주께서도 결정하시지요.”
여평선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영호관을 보며 힘없이 말했다.
“자네가 옳았던 것 같군.”
영호관이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제 결정에 따르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않나?”
평범한 대화처럼 들렸다. 하지만 여평선도 결국 영호관의 편에 서서 백무천에 반기를 드는 것처럼 들렸다.
여평선 뒤에 서 있던 호영원과 조일산, 단청수가 분노한 눈으로 여평선을 노려보았다.
“흥! 결국 원주도 그렇고 그런 사람이구려!”
“내 이제껏 원주만큼은 믿었거늘, 우하하하하! 하늘이 무심하구나!”
그때 조일산이 검을 빼들고 여평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차라리 나와 함께 죽자, 여평선!”
뒤이어 호영원과 단청수도 공격에 가담했다.
여평선은 몸을 비틀어서 조일산의 검을 피했다. 그러나 워낙 거리가 가까워서 온전히 피해내진 못하고 어깨와 팔이 길게 갈라졌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여평선과 세 명의 장로들을 향했다.
전충관과 두양, 도종화도 조소를 베어 문 채 적의 자중지란을 구경했다.
“후후후, 그러게 진작 마음을 바꾸시지.”
“쯔쯔쯔, 정말 안됐군.”
“우리가 도와주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구려.”
바로 그 순간, 영호관의 검에서 솟구친 한 줄기 검광이 대기를 가로로 갈랐다.
쩌저적!
“헛!”
“이게 무슨……!”
경악성이 단말마처럼 터져 나왔다.
여평선 쪽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검광이 벼락처럼 지나간 곳에서 전충관의 목이 단숨에 잘리고, 두양의 머리가 반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몸을 틀던 도종화의 허리가 반쯤 갈라진 채 묘한 자세로 꺾어졌다.
세 사람의 몸에서 분수처럼 뿜어진 핏줄기가 순식간에 정원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상황. 여평선을 공격하던 조일산과 호영원, 단청수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공격을 멈췄다.
영호관은 급히 몸을 날려서 여평선의 뒤를 막아섰다.
조일산 등은 영호관의 실력을 봤기에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괜찮으십니까?”
영호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여평선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괜찮…….”
세 명의 장로 중 그래도 눈치가 빠른 조일산이 답답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영호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숨어 있던 간자들을 사냥한 것뿐입니다.”
“그럼 원주님은?”
여평선이 팔과 어깨의 상처를 지혈시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할 것 없네. 내가 자청한 일이니까.”
“맙소사, 그럼……? 왜 우리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나는 장로들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했지. 그런데 이공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이런 일을 꾸몄는데…… 간자가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나오다니.”
셋이 모두 간자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간자가 아니었다 해도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이렇게 쉽게 배신할 자라면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조일산 등 세 사람은 망연한 표정으로 영호관과 여평선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이런…….”
“거참…….”
“원주, 일단 상처부터…….”
그때 영호관이 신무전 쪽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아직 사냥과 연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지요. 세 분도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삼백 명으로 철저히 둘러싼 것도, 믿을 수 있는 최측근 열 명만 대동하고서 들어온 것도 철저히 용후정의 눈과 귀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용후정이 알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해.’
6
사우는 등가위와 천응단원, 유천삼위의 시신이 천혈궁으로 옮겨온 지 열흘이 지나서야 결론을 내렸다.
“죽은 자들은 모두 신비세력의 무사들임이 분명합니다.”
섭위릉이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확실한가?”
“하오문까지 닦달해서 알아봤습니다만,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고수 십여 명이 강호에 한 사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증거지요.”
염사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이들이 그자와 싸우다 죽은 것이지?”
“지금으로선 한 가지 가능성뿐입니다. 저들 사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분이 일어났다는 것.”
좌궁화는 사우의 말에 의자의 손잡이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으음,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에겐 호재군.”
“문제는 그 내분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마무리된 거라면 앞으로 거센 반격이 있을 겁니다.”
“내분을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라는 건가?”
“갈라진 마음을 결집시키기에는 그만한 방법이 없지요.”
섭위릉이 물었다.
“군사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제 저희가 택할 길은 두 가지뿐입니다. 먼저 공격할 것이냐, 아니면 공격해오는 적을 막으면서 상황을 봐 반격할 것이냐. 저는 성주님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성주의 뜻대로.
그 말인즉 먼저 공격하겠다는 뜻이었다. 혁련궁은 방어나 하면서 눈치를 보는 성격이 아니니까.
묵묵히 있던 구인창이 이마를 좁히고 사우를 바라보았다.
“저들의 능력을 먼저 알아봐야 하지 않겠소?”
“겸사겸사해서 알아볼 생각입니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부딪치기 전에는 정확한 것을 알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말이지요.”
“그것도 그렇군요. 그런데, 성주님께 보고는 했소?”
“했습니다. 아마 곧 총단의 무사들이 올라올 겁니다. 놈들이 나타난 이상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상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무렵, 천혈궁에 있던 신마성 무사들이 패웅보의 혁련후와 손발을 맞춰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북상하며 단숨에 안휘를 차지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던 신마성과 천혈궁의 삼천 무사는 회남과 백 리 떨어진 곳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구룡회의 일천오백 무사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천의맹에서 달려온 무사들도 벽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앞을 벽처럼 막아선 것은 단 이백의 무사들이었다. 천외천의 이백 무사 말이다.
신마성은 그 이백 무사에게 막혀서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
무려 팔백의 정예가 그들에 의해 쓰러진 것이다.
금방이라도 안휘를 접수할 것 같던 신마성의 위세가 단 이백 명에 의해서 무너지자, 강호의 군웅들은 경이에 찬 시선으로 천외천의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천외천이 강호의 신비문파로 그동안 강호의 대소사에 은밀하게 관여했다는 사실이 강호 전체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수백 년 동안 마도의 부흥을 철저히 막아온 천외의 세력. 그들이 신마성의 준동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의 세력으로부터 강호를 구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왔다!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일순간에 전 강호를 뒤흔들었다.
수많은 강호의 군웅들이 회남으로 몰려들었다.
천의맹에서도 천외천과 손잡고 신마성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회남으로 향할 것 같던 천의맹은 일부 무사들만 보낸 채 한 발짝 물러서서 침묵했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지자 삼천의 무사가 회남에 운집했다.
공손무백은 천하가 천외천을 칭송하며 환호하자, 천외천과 구룡회를 중심으로 강호의 군웅들을 모아서 임시로 천룡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결성했다.
천룡회(天龍會) 초대 회주로 추대된 공손무백은 자신만만한 일성을 내지르며 신마성을 공격했다.
“본 회주는, 평온한 강호를 피로 물들인 신마성의 마인들을 무찔러 강호의 정의를 지킬 것이오! 의혈의 피를 지닌 강호의 협의지사들이여! 나를 따르시오!”
천룡회의 강력한 반격에 신마성은 점점 남쪽으로 밀렸다.
그러나 신마성은 공손무백의 생각보다 끈질겼다. 그리고 그의 예상보다 배는 강했다.
게다가 남창의 총단과 삼대지부에 남아 있던 정예 무사 일천이 북상해서 안휘의 신마성 무사들과 합류했다.
그 덕에 신마성은 천혈궁이 있는 곽산으로 물러선 뒤 더 이상 밀리지 않았다.
공손무백은 겨울이 가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천외천의 무사들을 더 불러냈다. 그리고 천의맹으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천의맹은 북천맹의 움직임을 견제한다는 핑계를 대고 소극적인 지원만 했다.
공손무백은 불만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한 요구를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싸움이 커지면 그들도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겨울이 깊어가고, 여기저기서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대대적인 싸움이라기보단 지엽적인 싸움이 대부분이었다.
제10장. 죽음과 바꾼 선물
1
“으아아악! 내 돈!”
풍천은 누군가가 자신의 돈주머니를 가지고 화산 속으로 뛰어드는 걸 보고는 너무나 놀래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온몸이 화산 속에 빠진 것처럼 뜨거운 고통에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뜨, 뜨거! 내 돈, 내 돈!”
“그놈, 참. 쯔쯔쯔…….”
역조생은 별놈 다 본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돈을 찾으며 정신이 든 것도 요상한데, 정말 불길 속에 빠진 것처럼 뜨거울 텐데도 그 와중에 돈만 찾는다.
그는 돈타령하는 풍천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화령침 세 개를 더 꽂았다.
‘곧 돈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의 뜨거움이 밀려들 것이다, 이놈. 흐흐흐.’
아니나 다를까, 셋을 세기도 전에 풍천이 입을 떡 벌리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 뜨, 뜨, 뜨! 왜 이렇게 뜨거워!”
그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역조생이 보이자 버럭 소리쳤다.
“이 미친 영감! 불 좀 꺼!”
미친 영감?
역조생은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른 풍천을 노려보았다.
‘얼굴을 확 바꿔버려?’
코는 들창코로, 입은 메기입으로, 눈은 어벙한 짝눈으로…….
하지만 인생이 불쌍해서 봐주기로 하고 마지막 화령침 하나를 이문혈에 꽂았다.
툭.
그걸로 풍천은 고개를 떨구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역조생은 일 각가량이 지난 후 화령침을 회수했다. 하나하나 뽑을 때마다 풍천의 붉은 몸이 조금씩 제 색을 찾아갔다. 그리고 모두 뽑았을 때는 완연한 살색을 되찾았다. 정신은 들지 않았지만.
역조생은 풍천의 맥을 짚어보고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흘흘흘, 이제 맥은 대충 이어졌군.”
석 달 열흘간 화령침으로 침술을 펼쳐 간당간당하던 맥을 잇는 일은 거의 다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치료의 시작일 뿐이었다. 몸이 완치되려면, 무공을 되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걸릴지, 그것은 오직 풍천의 노력 여하에 달린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