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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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90화
190화
풍천은 머리가 뒤틀린 적도삼을 쳐다보지도 않고 검을 뻗어서 두 사람의 몸을 묶은 밧줄을 끊었다. 그러고는 제압된 혈도를 찾아서 풀어주고, 밖으로 튀어나온 뼈를 안으로 집어넣어 제자리에 맞춰놓았다.
두 사람은 풍천이 상처를 대충 처리할 때까지 부들부들 떨면서도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풍천은 주위에 있는 물건을 이용해서 응급처치를 끝내고 두 사람을 어깨에 걸쳤다.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으쇼.”
풍천은 악진표와 감능하를 둘러메고 뇌옥 지하의 고문실에서 나와 위로 올라갔다.
뇌옥은 사오십 평의 단층 건물로 평소에는 다섯 명이 밖을 지키고, 다섯 명이 안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안에만 열두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일곱은 악진표와 감능하를 구하러 오는 자를 잡기 위해서 매복해 있던 자들이었는데, 풍천이 모조리 제거해버린 것이다.
밖의 경비 무사들은 아직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 채 경비를 서고 있고.
“잠시만 기다리쇼. 놈들의 시선을 돌려놓고 올 테니까.”
풍천은 두 사람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악진표와 감능하는 반드시 죽이고 싶었던 적도삼의 죽음을 봤다는 것과 바깥 공기를 쐬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들은 동암 분타에 어떤 자들이 와 있는지 알고 있었다.
풍천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그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머지 단천무령이 도와준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고.
그만큼 동암 분타에 엄청난 자들이 와 있는 것이다.
악진표는 풍천이 아직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넌지시 물어보았다.
“령주, 이곳에 어떤 자들이 있는지 알고 있소?”
“신마성의 늙은이들과 천혈궁의 개들이 몇 마리 와 있다더군요.”
“알고 있군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를 놔두고 떠나시죠.”
“왜요? 못 빠져나갈 것처럼 보여요?”
감능하도 악진표와 같은 마음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부상이 심해서 짐만 될 뿐입니다. 대신 복수나 시원하게 해주십쇼.”
“잔소리 말고 구경이나 하쇼.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보여줄 테니까. 흐, 흐, 흐, 흐.”
악진표와 감능하는 그 말이 헛소리처럼 들렸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하긴, 우리 령주, 자존심 빼면 시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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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흠칫한 섭위릉은 찻잔을 내려놓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옆에 앉아 있던 염사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바람 속에 살기가 섞여 있소.”
“놈들이 온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구인악이 찻잔을 들며 조소를 지었다.
“훗,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하지만 섭위릉의 이마에 그어진 주름은 골이 더 깊어졌다.
분명 바람 속에 섞인 이질적인 살기를 느꼈다. 그런데 아무런 실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 암울한 느낌. 실핏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이한 기분. 왠지 께름칙했다.
밤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곳마다 진한 혈향이 흘렀다. 때로는 처마 밑에서도, 때로는 지붕 위에서도 핏물이 흘렀다.
말 그대로 살풍(殺風)이었다.
그러나 이십여 명이 죽어가는 동안에도 비명은 한마디도 흘러나오지 않고, 장원은 공동묘지처럼 고요했다.
시신은 늘어나고, 산 자는 점점 줄어들고…….
“적이 들어왔다! 뒤져라!”
누군가가 장원을 뒤덮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소리친 것은 살풍에 서른여섯 송이의 혈화가 피어난 후였다.
풍천은 장원 북쪽에 매복해 있던 자들을 제거하고 냉소를 베어 물었다.
‘흥,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지.’
그는 환신술을 펼쳐서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건물 세 개를 넘어가자 마당 중앙에서 타오르고 있는 화톳불이 보였다.
풍천은 망설이지 않고 화톳불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을 집어들어서 옆 건물 안에 냅다 던져버렸다.
“우왁! 불이야!”
“어떤 놈이 방에 불을 던진 거냐!”
“빨리 빠져나가!”
불은 순식간에 번져서 방을 태우고 위로 솟구쳤다.
‘지금쯤 봤겠지?’
불을 봤다면 허무정이 북쪽을 공격할 것이다.
자신이 매복해 있던 자들을 제거했지만 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최대한 버텨도 반 각 정도. 그 안에 악진표와 감능하를 빼돌려야 했다.
별원에 있던 사람들은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자 밖으로 나왔다. 동쪽에 있는 건물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구인악은 인상을 잔뜩 쓰고서 수하들을 다그쳤다.
마침 장한 하나가 별원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상황 보고를 올렸다.
“북쪽에 매복해 있던 무사 이십여 명이 죽었다 합니다, 부궁주!”
“뭐야? 북쪽에 매복해 있던 무사들이 죽었다고? 네놈들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뭘 했단 말이냐?”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아무도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합니다.”
“저 불은? 저것도 놈들이 지른 것이더냐?”
보고를 올리는 장한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그런 것 같사온데, 아직 적의 모습을 보지 못한 터라…….”
“이런 바보 같은 놈들!”
구인악은 버럭 노성을 내지르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때 좌궁화가 눈매를 좁히고 입을 열었다.
“성동격서인가?”
그에 대한 답변이라도 하듯 북쪽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적이다! 놈들을 잡아라!”
구인악이 새파란 살기를 흘리며 말했다.
“일단 나타난 놈들부터 잡고 봐야겠습니다.”
천혈쌍마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서쪽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수상해. 우리가 뇌옥 쪽으로 가보겠네, 부궁주.”
“그래 주십시오. 세 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구인악은 섭위릉과 염사진, 좌궁화를 돌아다보았다.
염사진이 괴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클클클, 우리는 양쪽의 상황을 봐서 움직이겠네. 장원이 크지 않으니 급한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갈 수 있을 게야.”
제7장. 혈전은 하늘을 피로 물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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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옥으로 돌아간 풍천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바깥을 지키던 경비 무사들을 마저 제거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불난 곳으로 달려간 상태였다. 게다가 비명과 고함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허무정과 마동춘이 장원 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갑시다.”
풍천은 악진표와 감능하를 옆구리에 끼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때였다.
“흥! 쥐새끼 같은 놈! 어딜 도망가겠다는 거냐!”
“흐흐흐, 내 이럴 줄 알았지.”
두 사람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내려섰다.
흑의와 백의를 입은 두 노인, 천혈궁의 대장로인 천혈쌍마였다. 일명 흑백쌍마라 불리는 자들.
풍천은 상대의 정체를 알고는 즉시 방향을 틀어서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상대가 비록 팔대신마에게 뒤지지 않는 자들이긴 하지만, 자신이 혼자였다면 피할 이유가 없었다. 피하기는커녕 두 늙은이의 목을 따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악진표와 감능하를 구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천혈쌍마는 노성을 내지르며 풍천을 쫓았다.
“어리석은 놈! 감히 우리 앞에서 도망가겠다는 거냐?”
“크크크, 귀엽게 노는군.”
풍천은 두 사람을 끼고도 천혈쌍마에게 따라잡히지 않았다.
천혈쌍마는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자 분노가 머리꼭대기까지 솟구쳤다.
두 명이나 끼고 있는 놈을 잡지 못하다니!
“애송이가 경공만 배웠나 보군.”
“놈을 잡으면 다리부터 부러뜨려야겠어!”
풍천은 그들이 뭐라 씨부렁거리든 상관하지 않고 곧장 담장으로 달려갔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담장을 넘어오는 게 보였다. 남궁도영이었다.
풍천은 악진표와 감능하를 그에게 내밀었다.
[빠져나가서 서성까지 바로 가쇼!]
전음으로 소리친 그는 남궁도영이 두 사람을 잡자마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천혈쌍마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제 한번 해볼까?”
“오냐, 이놈! 목을 예쁘게 잘라주마!”
“킬킬킬, 정말 겁이 없는 놈이군.”
천혈쌍마는 살소를 흘리며 날아오던 그대로 풍천을 덮쳤다.
순간, 풍천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 이놈이?”
“조심해! 놈이 환술을 쓴다!”
천혈쌍마는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바람에 찰나 간 빈틈이 드러났다.
풍천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스릉!
검을 빼든 그는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의 검에서 낙성삼혼이 펼쳐지며 세 줄기 검광이 벼락처럼 뻗어 나갔다.
“헉! 피해!”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대경한 천혈쌍마는 다급히 몸을 비틀며 공격권에서 벗어나려 했다. 노회한 고수들답게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풍천의 검세는 그들의 생각보다 더 빠르고 강력했다. 게다가 눈으로 잡히지 않는 그의 움직임이 그 위력을 배가시켰다.
한 줄기 벼락이 백마의 어깨와 팔을 훑고 지나갔다.
“크윽!”
백마의 백의가 붉게 물들었다. 순식간에 넓은 부위가 피로 물드는 걸 보니 상처가 제법 깊은 듯했다.
풍천은 찰나의 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낙성단혼을 펼쳤다.
쩌저적!
백마의 머리 위 어둠이 갈라지며 벼락이 떨어졌다.
백마는 이를 악물고 도를 휘둘렀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벼락같은 검세만 떨어진다.
난생 처음 대하는 광경. 공포가 스멀거리며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그로 인해서 움직임이 무뎌졌다.
“피해!”
흑마는 백마가 위기에 처했다는 걸 알고 벼락이 떨어지는 허공을 향해서 전력을 다한 장력을 펼쳤다.
풍천은 천라신수로 흑마의 장력을 막아가며 검세를 멈추지 않았다.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를 먼저 제거하는 게 상책이었다
쉬이익!
백마의 도세를 뚫고 들어간 벼락은 눈 깜짝할 사이 백마의 왼팔을 가르고 지나갔다.
서걱!
“크억!”
왼팔이 잘린 백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쾅!
뒤이어 천라신수와 흑마의 장세가 정면으로 격돌했다.
풍천은 훌훌 이 장을 날아갔다. 충격 때문에 날아갔다기보다 상대의 공세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물러선 것이었다.
“백마!”
흑마는 팔이 잘린 채 비틀거리는 백마에게 다가갔다.
그때 풍천의 모습이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던 백마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오지 말게! 놈부터 상대해!”
주춤거린 흑마는 풍천이 있을 법한 허공을 향해서 연속 칠 장을 뿌려댔다.
그러나 풍천이 노린 것은 흑마가 아니라 백마였다.
제거할 때는 하나하나 확실하게!
백마는 섬뜩한 기분이 들자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이었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허공에서 달빛을 받아 더욱 시퍼런 검기가 날아들었다.
피할 새도 없었다. 뒤로 발을 반쯤 뺐는데 푸르스름한 검기가 목을 긋고 지나갔다.
“끄으으으.”
“이놈!”
노성을 내지른 흑마는 풍천이 있는 곳을 향해서 장력을 쏟아부었다.
풍천은 폭풍처럼 밀려드는 장력 사이를 유유히 흐르며 흑마에게 접근했다.
흑마는 섬뜩한 느낌이 다가오는 걸 알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흑마와의 거리가 이 장으로 줄어든 순간, 풍천은 검과 하나가 되어서 벼락처럼 쇄도했다.
동시에 그의 검에서 시퍼런 강기가 뻗어 나가더니 어둠을 열두 조각으로 가르며 쏘아졌다.
낙성천류검의 아홉 번째, 낙성멸혼이 처음으로 펼쳐진 것이다.
“검강!”
대경한 흑마는 전력을 다해서 장력을 펼치며 대항했다.
떠더덩! 콰르릉!
장세를 갈기갈기 찢어발긴 검강이 흑마를 덮쳤다.
가슴 옷자락이 너덜너덜해진 흑마는 정신없이 물러섰다.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살이 갈라졌는지 온몸이 찢어지는 듯했다.
풍천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마지막으로 광양검결 중 하나인 승광을 펼쳤다.
한 줄기 시퍼런 빛이 쭉 뻗어 나갔다.
찰나, 그의 검에서 뻗어 나간 검강이 석 자의 거리를 두고 흑마의 심장에 꽂혔다.
“이, 이런 개 같은 일이…….”
그때였다.
고오오오!
하늘의 어둠이 그대로 내려앉기라도 하려는 듯 천만 근 압력이 머리 위를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