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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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16화
216화
복면인 셋을 쓰러뜨리고, 태응검 상주원을 살 맞은 기러기처럼 떨어뜨린 후 일검에 심장을 뚫은 사람이 풍천인 것이다. 자신들의 눈으로 봤음에도 믿기지가 않았지만.
풍천은 그들이 입을 다물자 종화선사를 바라보았다.
“방장스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렇게 하세. 두 분 시주는 어떻게 하실 거요?”
서문결이 잠시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다는 듯 말했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놈들이 이곳을 습격한 걸로 봐서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돌아가서 대책을 세워야겠습니다.”
그리고 풍천을 직시했다.
“일단 풍 소협의 말을 믿지. 오늘 도와줘서 고마웠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뵙죠.”
공각을 안다면 십정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십정 중에 속한 사람들일지도.
그렇다면 이들은 대공에게 적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 인연을 이어놔도 나쁠 게 없었다.
‘자세한 것은 종화선사에게 물어보면 되지 뭐.’
방으로 들어간 풍천은 종화선사와 마주 앉았다.
그때 사미승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일단 차부터 한 잔 마신 풍천은 품속에서 부모님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를 꺼냈다.
“이분들에 대한 걸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듣자 하니 방장께서 이십 년 전에 이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펼쳐진 그림을 지그시 바라보던 종화선사의 하얀 눈썹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그는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풍천을 바라보았다.
“시주는 왜 이 두 사람에 대한 것을 알려고 하는 건가?”
“물어볼 게 있거든요. 왜 이십 년 전에…… 저를 떠나보내셨는지 말이죠.”
4
다음 날 아침.
풍천은 낙양 남쪽의 외곽에 있는 작은 장원 앞에 서서 정문을 바라보았다.
장원치고는 정말 작았다. 건물이라고는 낫처럼 꺾어져서 이어진 두 채가 전부였다. 현판도 없었다.
말 그대로 이름 없는 무명 장원을 바라보는 풍천의 두 눈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종화선사의 말을 듣고 낙양의 남쪽 외곽을 뒤진 지 이 각 만에 발견한 장원을 본 순간,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우리 집이야. 아버지, 어머니와 살았던 곳. 저쪽에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고개를 돌리자 낙수(落水) 가에서 자라고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보였다.
하지만 버드나무는 그대로 있어도 장원 안에 살고 있어야 할 사람들은 지금 없었다.
“시주의 부모님들은 누군가를 찾아서 먼 길을 떠난다고 했네. 당시 빈승을 찾아온 것은 부모님의 위패를 봉안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지.”
부모님은 그날 떠난 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위패를 봉안하는 대가로 상당한 금액을 시주했는데, 아마도 집을 판 돈 같다고 했다.
풍천은 종화선사에게 부모님이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에 대해선 종화선사도 몰랐다.
그가 말하길, 부모님은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는데, 자신들의 행선지를 알리면 종화선사가 위험해질까 봐 숨기는 표정이었다고 했다.
그래도 종화선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주었다.
사공정(司空貞)과 송화연(宋華蓮).
부모님의 이름을 알려준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성은 ‘사공’ 이름은 ‘천’, 본명이 사공천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맡긴 위패의 주인인 조부의 이름은 사공진이었다.
풍천은 정문으로 다가가서 문을 두드렸다. 한참이 지나도 답이 없었지만 참고 두어 번 더 두드렸다.
잠시 후,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문이 반쯤 열리더니 육순가량 된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로 오셨수?”
“잠시 집 안을 좀 둘러봐도 될까요?”
“왜 남의 집을 둘러보겠다는 거요?”
“옛날에 제가 여기서 살았거든요. 오랜만에 낙양을 찾아왔으니 옛집을 좀 구경해볼까 하고요.”
노인은 풍천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구려. 이 늙은이가 여기서 산 지 이십 년이 다 되는데 말이오. 혹시 집을 잘못 찾은 것 아니오?”
“아마 맞을 겁니다. 제가 집을 떠난 게 이십 년쯤 되니까요. 부탁합니다. 원한다면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습니다.”
노인은 눈을 껌벅이더니 옆으로 비켜났다.
“구경만 한다면야 허락 못 할 것도 없소만. 깊은 곳은 들어가지 마시구려.”
“감사합니다.”
풍천은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정원이 보이자 어릴 때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저쪽에 물고기가 살던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정원의 구석을 바라보며 눈을 잘게 떨었다. 못이 있던 자리에는 이름 모를 꽃이 심어져 있었다.
“저쪽에 못이 있었을 텐데, 언제부터 저렇게 되었습니까?”
그 말에 휘둥그레진 노인의 눈이 잘게 떨렸다.
“정말 여기 살았나 보구려. 그 연못은 십 년 전에 메웠소이다. 극심한 가뭄으로 물이 완전히 말라버려서…….”
풍천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뒷마당으로 돌아갔다.
뒷마당에는 백여 년도 더 되었을 법한 고목이 한 그루 있었다.
풍천은 고목으로 다가가서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무릎보다 조금 높은 곳에 뭔가로 긁힌 자국이 있었다. 지금은 나무가 자라는 바람에 뒤틀어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글자처럼 보였다.
천(天).
뾰족한 못으로 나무가 파이도록 새긴 자신의 이름이었다.
손으로 그 글자를 만져보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 뒤에서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뭔지 아시오?”
노인의 목소리였다.
풍천은 아련한 눈으로 글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이죠. 제가 새겼던 이름…… 하늘 천(天).”
순간, 노인이 갑자기 숨이 막혀서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덜덜 떨며 소리쳤다.
“맙소사, 맙소사! 오오오, 어떻게 이런 일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풍천은 홱 고개를 돌렸다.
순간 노인이 털썩 무릎을 꿇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정말로 도련님이 돌아오셨군요!”
“무슨 말입니까? 도련님이라뇨?”
“크흐흑, 소인은 정소철이라고 하는 못난 놈입니다. 주인님이 사지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말리지도 못하고 멀리서 쳐다만 봤던 못난 놈입지요!”
노인은 마른 대지에 소나기가 쏟아지듯 눈물을 흘렸다.
풍천은 정소철이라는 노인의 말을 듣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금 사지로 가셨다 하셨습니까?”
“직접 그렇게 말씀하진 않으셨습니다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떠나실 때 집을 저에게 맡기셨지요. 언젠가 돌아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크흑흑. 그런데, 그런데 정말 도련님이 돌아오셨군요.”
풍천은 노인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노인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았다. 당시 식구라고 해봐야 가솔 두어 명이 전부였거늘.
“제가 어릴 때 못 보셨던 분 같은데, 어떻게 아버지를 주인이라 부르는 겁니까?”
“주인님께선 성 내에 작은 주루를 차리셨습니다. 저는 그 주루의 책임자였는데, 주인님이 떠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이 장원에 오지 않아서 아마 도련님은 모르실 겁니다. 왠지 몰라도 주인님은 주루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아는 걸 원치 않으셨지요. 나중에 주인님의 서찰을 보고 나서야 주루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 서찰,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까?”
“물론입죠. 주인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거라 신주단지 모시듯 보관했습죠. 저를 따라오십시오.”
풍천은 방으로 들어가서 서찰을 읽어보았다.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어딘가 먼 곳으로 간다는 것과 그동안 장원을 부탁한다는 것, 그리고 주루나 장원의 하인들에게는 정소철이 장원을 산 것으로 말하고 절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전부였다.
정 노인은 마지막 부분을 읽고 아버지의 뜻을 짐작한 듯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철저히 비밀을 지킨 것일까? 대체 누구를 그렇게 두려워한 것일까?
풍천은 서찰을 조심스럽게 접고는 정 노인에게 부탁했다.
“이 서찰,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물론입죠.”
“아버지가 어디로 가셨는지 조금이라도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까?”
정 노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체 그에 관련된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끔 술을 한 잔 하시면, 탄식을 하시며 깊은 고민에 빠지시곤 하셨는데…… 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주인님께서 남기신 물건을 가져오겠습니다. 혹시 그 안에 어떤 단서가 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 노인이 가져온 것은 나무로 만든 함이었다.
함을 탁자 위에 놓고 뚜껑을 열자 잡다한 물건들이 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물건인 듯했다.
풍천은 이십 년이 넘도록 그 물건들을 그대로 보관해온 정 노인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끼며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값나갈 만한 물건은 없었다. 말 그대로 잡다한 것들만 들어 있을 뿐.
붓과 벼루를 꺼낸 그는 상자의 벽 쪽에 붙어 있는 두루마리를 들어냈다. 그림이 그려진 것인 듯했다.
문득 아버지가 시간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리던 게 떠오른 풍천은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펴보았다.
역시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글이 두 줄 써져 있었다.
그런데 그림과 글을 본 순간, 풍천은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몸이 굳어버렸다.
“어, 어떻게 아버지가 여길……?”
어지간한 일에는 눈썹 한 올도 끄떡하지 않는 풍천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 나왔다.
두루마리에…… 불귀곡이 그려져 있었다.
제7장. 내 이름은 풍천
1
풍천이 낙양을 떠나 불귀곡으로 달려갈 즈음, 살얼음판 같던 안휘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곽산에 웅크리고 있던 마도연합세력이 혁련후의 지휘 아래 대규모로 움직인 것이다.
곽산을 출발한 그들은 곧장 육안 서쪽에 있는 대월산장으로 향했다.
대월산장은 마도연합세력을 직접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천룡회의 육안지부로, 그곳이 무너지면 천룡회의 남단이 흔들릴 것이었다.
석양이 지기 직전, 근 일천에 이르는 마도연합세력 무사들은 대월산장을 향해 내달렸다.
상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는 상황. 이제 남은 것은 피를 보는 일뿐이었다.
대월산장의 순찰무사들은 저 멀리서 구름처럼 밀려드는 적을 발견하고 악을 쓰듯이 외쳤다.
“적이다!”
“마도 놈들이 몰려온다! 비상! 비사아아앙!”
하지만 대월산장에 있던 칠백 명의 무사들이 적을 맞이하기 위해 뛰쳐나왔을 때는, 이미 마도연합세력의 선두가 대월산장의 담장을 넘고 있었다.
그리고 곧 비명과 고함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는 가운데 시뻘건 피가 골을 따라서 내처럼 흘렀다.
혈풍은 안휘에서만 불고 있는 게 아니었다.
혁련후가 일천 마도무사를 이끌고 대월산장을 피로 물들이던 그 무렵, 팔백의 마도무사들이 파죽지세로 하남 남단을 유린하며 경천산장을 향해 나아갔다.
팔백 마도무사를 이끄는 자는 위태곤. 그는 경천산장을 무너뜨린 후 신검문까지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공손천우! 네놈을 내 발밑에 눕혀놓고 말겠다.’
그리고 전리품으로 백초령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2
대월산장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한 필의 말이 이제는 천룡회의 총단이 된 적련방의 정문을 향해 달려왔다.
위사는 말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대경해서 급히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오!”
마상에 있던 자는 말 위에서 훌쩍 몸을 날리더니 정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왔다.
“천붕성 붕첩당의 연락이다. 촌각이 급한 긴급사항이니 비켜라!”
위사는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옆으로 비켜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