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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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12화
212화
막 걸음을 옮기려던 중년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바람 때문에 옷자락이 펄럭인 것처럼 보였지만, 풍천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중년인은 몸을 돌리고 풍천을 바라보았다. 기이할 정도로 싸늘한 한광이 그의 눈빛 깊은 곳을 찰나 간 스쳐갔다.
“저를 따라오시죠.”
“잠깐만, 조금만 기다리쇼. 이것 좀 마시고…… 근데 이건 뭔 차요?”
풍천은 차가 아까워서 그냥 갈 수 없다는 듯 찻잔을 들었다.
“서호의 용정이오.”
“서호 용정? 우와, 이게 말로만 들었던 그 차군요.
너스레를 떤 풍천은 마저 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중년인의 이마에 골이 깊게 파이기 직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놈이 정말 그놈이 말한 놈일까?’
중년인은 짜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 두 남녀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풍천을 다루 안쪽의 작은 골방으로 안내했다.
그는 풍천이 따라 들어오자 문을 닫고 골방의 벽을 밀었다.
벽이 밀리며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풍천은 중년인을 따라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옆 건물 뒤쪽의 일반가옥에 있는 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방은 창문이 하나도 없고 밖으로 나가는 문만 있었다.
‘두꺼운 벽이 두 겹이군. 이 정도면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모르겠는데?’
방음을 위해 특수하게 만들어진 방인 듯했다. 풍천은 그 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리 앉으시오.”
중년인은 풍천에게 의자를 내주고 차를 따라주었다. 붉은빛이 도는 차였는데 향이 제법 진했다.
“이걸 한번 마셔보시오. 향기가 용정보다 떨어지지 않을 거요.”
“호오, 이곳은 다른 곳보다 훨씬 친절한데요?”
“손님에게 친절한 것이야 당연한 일 아니겠소?”
“그러게요. 그렇게 당연한 것을 다른 곳은 모른단 말이야.”
풍천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중년인이 따라준 차를 홀짝였다.
그 모습을 보는 중년인의 눈꺼풀이 보일 듯 말 듯 떨렸다.
‘그래, 많이 마셔라. 천하에 다시없는 귀한 차니까. 조금 독해서 그렇지. 후후후후.’
중년인이 다시 질문한 것은 풍천이 찻잔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합비에서 청부했소?”
“잘 아시는군요.”
“공손선우에 대한 걸 알고 싶다고 하셨다지요?”
풍천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인은 한쪽으로 가더니 상자에서 작은 봉투를 내왔다.
“원하는 것은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풍천은 봉투를 받아들고 안에서 서너 장의 종이를 꺼냈다.
순간,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하얀 가루가 훅 피어올랐다.
풍천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가루를 탈탈 털고 종이를 펴보았다.
대충 넉 장의 종이를 살펴본 풍천의 눈이 중년인을 향했다.
“내가 원한 내용이 아닌데?”
중년인의 입가로 냉소가 번졌다.
“곧 죽을 몸인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피식.
풍천은 서 푼짜리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관이 없긴? 대가로 황금 열 냥이나 지불했는데. 흠, 청부를 이행하지 못했으니 위약금을 받아야겠군. 아니지, 그 전에 당신의 정체부터 알아봐야겠어.”
“훗, 위약금은 지옥에서 받아라.”
중년인은 더욱 진한 냉소를 지으며 검지로 풍천을 가리켰다.
“이제 그만 쓰러져!”
그러나 그의 뜻과 달리, 풍천은 쓰러지기는커녕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중년인만 바라보았다.
중년인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코웃음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흥, 제법이군. 하지만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풍천은 온기 없는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알지 모르겠는데, 내가 독에 대해선 제법 강하거든? 상혈독(傷血毒)에 미혼분(迷魂粉) 정도로는 나를 잠재울 수 없지.”
중년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분명 차도 마시고, 미혼분도 들이켰는데……?”
“이거?”
카악, 퉤!
풍천이 가래침을 뱉자 붉은 덩어리가 중년인을 향해 쏘아졌다.
중년인은 반사적으로 바닥을 박차고 날아드는 붉은 덩어리를 피했다.
하지만 상대는 천풍의 주인, 풍천이었다. 더구나 상대가 강하다는 걸 알고 단숨에 처리하려 작정한 터였다.
“내 앞에서 발 자랑하지 마. 더 다치니까.”
풍천은 중년인을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손을 뻗었다.
중년인은 두 손에 공력을 잔뜩 주입해서 휘둘렀다.
‘흐흐흐, 두 손모가지를 잘라주마.’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날이 풍천의 두 손목을 후려쳐갔다.
순간이었다.
“다친다니까.”
풍천이 냉랭히 말하며 두 손을 비틀었다. 아른거리는 수영이 중년인의 손목을 휘감는가 싶더니,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우두둑.
“크억!”
중년인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벽에 부딪쳤다.
풍천의 손목을 자르려 했던 그의 두 손이 거꾸로 부러져 있었다.
풍천은 단숨에 중년인의 팔목을 꺾어버리고는 벽에 부딪친 그의 마혈을 제압해서 탁자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콰당! 우당탕!
중년인의 몸뚱이는 탁자를 부수고 그 위에 널브러졌다.
손을 탈탈 턴 풍천은 그의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이제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된 것 같군.”
중년인은 자신이 일수에 당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는 팔에서 이는 고통이 뇌를 들쑤시는데도 눈을 들어 풍천을 노려보았다.
“네, 네놈이…….”
“당신은 누구지? 하오문의 분타주가 수검(手劍)을 펼칠 정도의 내공을 지녔을 리는 없고…… 아니 그 전에, 나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하오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겠지. 하오문 사람들에겐 나를 죽이려 할 만한 배짱이 없으니까.”
으드득.
중년인은 이를 갈며 씹어뱉듯이 으르렁거렸다.
“너는 절대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그거야 내 사정이고. 당신은 당신 입장에서 대답해봐. 이곳 사람들은 당신들이 죽였어?”
“오냐, 우리가 죽였다.”
“흠, 그렇단 말이지. 그럼 하오문에 또 빚을 진 건가? 아니지, 일을 하다 보면 이 정도의 위험이야 늘 따라다니는 거지 뭐. 아참, 당신 혹시 천외천 사람 아냐?”
중년인은 부인하지 않았다. 천하에서 천외천을 무시할 자 누가 있으랴.
“그렇다.”
“그래? 그럼 공손선우를 조사해달라는 것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인가?”
“그 전에 네놈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했지. 좋은 말로 할 때 나를 풀어줘라. 그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풍천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 질문만 던졌다.
“공손선우가 시켰어? 아니면 교비은이?”
대충 짚어서 물어봤는데, 교비은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중년인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네놈이 어떻게……?”
“역시 그 인간이군. 빚진 거 갚기 싫어서 죽이려고 한 건가? 아무래도 혼 좀 나봐야 정신을 차리겠군.”
중년인은 고통 속에서도 정신이 혼란했다.
교비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천외천의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없다. 그런데 그 이름을 알뿐더러, 빚 타령을 하면서 교비은을 혼낼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경악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딱 보니까 잠영단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도룡단 소속인가? 아니면…… 묵천단?”
풍천이 교비은에 이어 사단의 명칭마저 자연스럽게 꺼내자, 중년인의 눈빛이 폭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대체 너는 누군데……?”
“나?”
풍천은 씩 웃으며 품속에서 단천무령주의 영패를 꺼내 흔들었다.
“이게 뭔지 알아?”
영패를 바라보던 중년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 그건……? 서, 설마……?”
“거기까지만 알고, 그만 지옥으로 가봐.”
풍천은 중년인의 목을 살포시 밟아서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막았다.
와직.
목뼈가 부서지며 중년인의 머리가 괴이하게 틀어졌다.
말은커녕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좀 조심해서 알아보지, 황금 열 냥의 값어치를 하려고 너무 의욕적으로 움직였나 보군.’
풍천이 알기로, 묵천단은 온전히 공손무백의 편이라 할 수 없었다. 공손량의 명을 받고 그를 따르는 것뿐. 하기에 어지간하면 처참하게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오문 분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이상 살려둘 수 없었다.
‘하오문에 빚을 하나 지워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뭐.’
위약금과 대리복수. 그 정도면 훗날 요긴할 때 한 번쯤 크게 써먹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풍천은 중년인의 시신을 놔둔 채 방을 나왔다.
중앙에는 이십 평 정도의 작은 마당이 있고, 그 너머에 정문이 보였다.
풍천은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날아들더니 그의 앞을 막아섰다.
다루에서 탁자 밑으로 손을 내리고 노닥거리는 남녀였는데, 탁자 밑으로 내리고 있던 두 사람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풍천은 그들이 다루 주인과 한 패거리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풍천 혼자 방에서 나오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냐? 왜 네놈만 나오는 거지?”
“조장님은 어떻게 된 거냐?”
그래도 여자가 먼저 상황을 직감하고 독살스런 눈빛으로 다그쳤다.
풍천은 그들에게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치마 속으로 손 들어가는 거 보니까 경험이 제법 되는 것 같던데, 좀 더 놀지 그랬어? 그럼 죽지 않아도 되잖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남자가 풍천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이 죽일 놈이……!”
그리고 여인과 함께 싸늘한 살기를 풀풀 날리며 달려들었다.
“죽어라, 이놈!”
풍천은 씩 웃으며 우수를 허리로 가져갔다.
그는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본 사람은 이들뿐이지만, 어디엔가 동료가 더 있을지도 몰랐다.
툭, 좌수 엄지로 검을 쳐올린 그는 우수로 검병을 그러쥐었다.
두 남녀가 일 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풍천의 허리에서 검은 번개가 솟구치더니 허공을 열십자로 갈랐다.
쩌적!
말 그대로 번개였다.
두 남녀가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번개가 그들의 몸을 스치고 풍천의 허리에 있는 검집으로 되돌아간 후였다.
철컥.
두 남녀는 그의 좌우를 지나쳐 바닥에 널브러졌다.
성깔이 있어 보이는 남자는 가슴에서, 내숭 떨던 여자는 목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풍천은 쓰러져서 버둥거리는 두 남녀의 사이로 걸어가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교비은, 지금부터는 조금 다르게 대할 거야. 나는 계속 당하는 걸 못 참는 성미거든.’
특히 빚진 것에 대해서는 더 철저했다.
하지만 바로 교비은을 찾아가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공포는 서서히 다가올 때 더욱 두려운 법이니까.
문을 열고 나가자 폭이 좁은 골목이 나왔다.
밖으로 나온 풍천은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집에서 나오는 것처럼 팔자걸음으로 태연하게 걸으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가 막 대로로 접어들자마자 누군가가 다가왔다.
풍천은 슬쩍 눈알만 굴려서 다가오는 자를 바라보았다.
키가 작고 마른 듯 보이는 자였는데,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한이었다.
장한은 풍천의 옆을 스쳐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바람 부는 곳이 저쪽인가?”
그 말에 풍천은 본래 그쪽으로 가려 한 것처럼 슬쩍 방향을 틀어서 장한의 뒤를 따라갔다.
장한은 길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더니 허름한 주루의 뒷문을 통해서 뒷마당으로 들어갔다.
풍천도 그를 따라서 주루의 뒷마당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구석진 곳에서 장한이 손짓했다.
“이쪽입니다.”
장한은 풍천을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쪽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풍천이 따라서 들어가자 밖을 살펴본 후 문을 닫고 불을 켰다.
그제야 풍천이 그에게 물었다.
“하오문 사람이오?”
“그렇습니다요.”
“어떻게 된 일이오?”
“단순하게 정보만 모았는데, 놈들이 생각보다 심한 반응을 보여서 그만…… 저는 아무래도 놈들의 움직임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재빨리 피했습니다만,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요.”
“내가 청부한 것은 어떻게 되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