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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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11화
211화
풍천은 목소리의 주인이 화청백임을 알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좌우간 눈치하고는…….’
백초령은 재빨리 풍천을 밀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답했다.
“예, 대사형.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화청백이 들어왔다.
그는 풍천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에 남창에서 전음 보낸 사람이 자네였지?”
“킁, 그렇수.”
“그때 정말 고마웠네.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왔지.”
‘말로만?’
풍천은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려다가 화청백이 백초령의 대사형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포기했다.
“고맙기는요.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그런데 영호관이 공유 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수?”
“얼마 전에야 사부님께 들었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하하하하.”
그래서 조용히 지냈나 보다.
‘하여간 엉큼하기는 사부나 제자나 똑같네.’
풍천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화청백을 째려보았다.
“그런데 왜 나를 찾은 거요?”
화청백은 무거운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회남에 있는 신검문의 문도들을 부탁하겠네, 풍천.”
제5장. 마음이 시키는 대로
1
아수비 일행은 갈라진 절벽의 틈새 깊은 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깊이가 십오륙 장이나 되고, 잎이 우거진 나무로 입구를 막은 덕분에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밤부터 아수비는 부상이 심한 아극타에게 아기를 맡기고, 아극령과 함께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계곡 아래쪽에 있는 크고 작은 소(沼)를 뒤졌다.
지진으로 인해 물이 빠진 곳도 있고 그대로인 곳도 있었는데, 다행히 소에는 제법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일단 식량 걱정을 던 아수비는 짐승을 잡기로 했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라기보다 가죽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풍천처럼 옷을 입고 다닌다고 했다. 자신들도 밖으로 나온 이상 바깥세상에 적응해야 했다.
닷새가 넘어가자 아수비 등은 조금씩 빛에 적응이 되었다. 그래 봐야 새벽어스름에 활동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할 뿐, 햇빛이 쏟아지는 곳은커녕 짙은 구름이 끼었을 때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문제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소의 물고기 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물론 잡은 짐승의 고기를 먹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노린내가 나서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별수 없이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며 다른 소를 찾아보았다.
칠 일째 되던 그날도 두 사람은 석양이 지고 어스름이 밀려들자 거처를 나와서 계곡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그런데 어제까지 물고기를 잡던 소에서 백여 장을 내려갔을 때였다.
저만치 나무 사이로 달빛이 바닥에서 반사되는 게 보였다.
“령아, 저기 좀 봐.”
“어? 호수다. 상당히 넓겠는데?”
아수비와 아극령은 환한 표정으로 연못을 향해 내려갔다.
자신들이 본 게 정말 호수라면 더 이상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호숫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좋아했다.
호수는 직경이 오십 장에 이르렀다. 게다가 깊이도 상당히 깊어 보였다. 그 정도면 네 사람이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물고기가 살고 있을 듯했다.
“됐어, 이제 됐어.”
“물고기를 잡아가자, 누나.”
“그래. 여기는 큰 것도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반 시진도 되지 않아서 팔뚝만 한 고기 다섯 마리를 잡았다.
하지만 너무 기쁜 나머지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응? 저것은 뭐지?’
소불사의 승려인 경요는 물결이 출렁대는 호수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지진 때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약초를 캐려고 산에 올라갔다가, 변해버린 지형 때문에 실컷 고생하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겨우 호수에 도착했다.
그런데 호수 저편에서 뭔가가 들쑥날쑥하는 것이 아닌가.
달빛에 비친 모습을 보면 사람인 듯했다.
도대체 누가 이 밤중에 산중호수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자세히 보니 목욕을 하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말이다.
‘허어, 참으로 신기한 재주로다.’
경요는 내심 감탄하며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기를 잡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여자인 것을 알고, 유난히 몸이 하얀 그 여자가 옷을 거의 다 벗고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서 눈을 감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제 보니 요물이었구나.’
대경한 그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며 호수에서 멀어졌다.
요물은 부처를 싫어한다지 않던가. 들키면 쫓아와서 잡아먹으려 할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경요는 환자를 치료하며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치료를 돕기 위해 소불사에 와 있던 구화검파의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자세히 물었다.
“경요 스님, 정말 요물이었습니까?”
경요는 자신이 본 것에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말해주며 요물이 분명하다고 단정 지었다.
“그 하얀 요물들은 호수 속을 자유자재로 들락거리며 커다란 물고기를 잡고 있었소. 암컷은 하얀 꼬리도 있었던 것 같던데…… 아무튼 들켰으면 빈승도 잡아먹혔을 거요. 아무래도 지진 때문에 땅속에 살던 요물들이 지상으로 나온 것 같소이다.”
구화검파의 무인들은 양민들을 위해서 요물을 잡기로 결정하고 본산에 지원을 요청했다.
구화검파의 본산에서는 열 명의 무사를 소불사로 보냈다.
그날 저녁, 열다섯 명의 구화검파 무사들은 경요가 말한 요물을 잡기 위해서 산중호수로 향했다.
2
아수비와 아극령은 자신들을 잡으러 오는 자들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산중호수로 향했다.
그런데 호숫가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극령이 먼저 접근하는 무사들의 살기를 감지하고 걸음을 멈췄다.
“누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아수비도 뒤늦게 인기척을 느끼고 바짝 긴장했다.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자, 구화검파의 무사들은 자신들이 들켰다는 걸 알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구화검파의 무사들 중 수장 격인 중년인이 검을 빼들고 소리쳤다.
“이 요물들!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잡혀라! 그럼 죽이진 않겠다!”
“우린 요물이 아닙니다.”
“흥, 요물이 아니라고? 그럼 순순히 항복하고 땅에 엎드려라. 조사 후 요물이 아니라면 보내주마.”
“저 눈처럼 하얀 살과 새파란 눈을 보십시오, 당주. 요물이 분명합니다.”
아수비와 아극령은 바깥세상의 사람들이 벽라족을 어떻게 보는지 뼈에 사무치도록 들었던 터였다. 당장 자신들을 요물이라 부르는 것만 봐도 잡히면 무슨 일을 당할지 눈에 선했다.
아수비와 아극령은 서로를 마주 본 후 나직이 말했다.
“도망치자, 령아.”
“누나 먼저 가.”
망설이는 사이, 구화검파의 무사들은 무기를 빼들고 두 사람을 포위했다.
더 이상 망설일 수 없게 된 두 사람은 환신술을 펼쳐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요물들이 도망친다!”
“그쪽을 막아!”
“요물이 사술을 펼친다! 조심해!”
구화검파 무사들은 아수비와 아극령을 요물로 단정하고 두 사람이 도망쳤을 거라 생각되는 곳을 향해 몰려갔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으로 환신술을 펼친 아수비와 아극령을 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더구나 어둠도 아수비와 아극령의 편이었다.
구화검파 무사들의 포위망을 빠져나온 아수비와 아극령은 곧장 자신들의 거처로 갔다.
아극타는 아수비의 말을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구나. 날이 새면 그들이 황산을 뒤질지 모르는데…….”
아극령이 코웃음을 치며 냉랭히 말했다.
“흥, 보니까 풍천처럼 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참지 않을 겁니다. 우리를 해치려 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줘야죠.”
“밤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낮에 그들이 오면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싸울 수도 없잖느냐?”
아수비도 그것이 제일 고민이고 걱정거리였다.
더구나 아이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그들 수십 명을 죽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숙부님, 어떻게 하죠?”
“일단 밤을 틈타서 장소를 더 안쪽으로 옮기자.”
아수비는 아기를 끌어안고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소를 옮기는 것으로 일이 해결되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저들이 계속 우리를 쫓는다면, 당장 식량부터 문제가 될 거예요.”
“나도 안다. 그러니 짐승의 가죽을 이용해서 옷을 만들자. 그동안 조금이나마 빛에 적응되었으니, 가죽으로 햇빛을 가린다면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밤에만 이동해서 우리가 지낼 만한 곳을 찾아보자. 어딘가에는 우리가 지낼 만한 곳이 있지 않겠느냐?”
참담한 심정이었다. 같은 인간에게 요물로 취급받으며 쫓겨야 하다니.
선조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수비는 고개를 쳐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면…… 풍천을 찾아가야겠어.’
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온몸이 햇빛으로 인해 다 타버리는 한이 있어도 연아만은 살려야 했다.
3
신검문을 나선 지 이틀 후. 적련방에 도착한 풍천은 석초산을 만나서 백무천의 서신을 전해주었다.
석초산은 서신을 다 읽고 고개를 들었다.
“문주님께서 자유행동을 허락하셨으니 내가 뭐라 하겠나. 다만 한 가지, 본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행동만 자제해주게.”
“걱정 마쇼. 나도 알고 보면 조신한 사람이니까.”
‘그걸 누가 믿어?’
그래도 석초산은 일단 믿는 척했다.
“좋아, 그럼 자네를 믿지.”
풍천은 저녁을 먹자마자 회하의 강가 구석에 있는 다루를 찾아갔다. 다루는 건물의 이 층에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하오문의 회남 분타였던 것이다.
‘회선다루(回旋茶樓), 맞지?’
그는 주위를 슬쩍슬쩍 살펴본 후 수상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연스럽게 다루로 올라갔다.
다루 안의 손님이라곤 구석진 곳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남녀가 전부였다.
‘얼씨구?’
풍천은 가자미눈으로 그들을 째려보며 회하가 보이는 창문가에 자리를 잡았다.
서른 전후로 보이는 두 남녀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 손을 아래로 내린 채 시시덕거리고 있었는데, 풍천이 들어온 걸 알고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뭐하는 것들인지 몰라도 별짓 다하네.’
풍천이 그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사십 대 초반의 얼굴이 동그란 중년인이 다가왔다.
“뭘 드시겠습니까?”
그제야 눈을 돌린 풍천은 선택을 주인에게 맡겼다.
“제일 비싸고, 맛 좋은 차로 주쇼.”
어차피 공짜로 마실 것, 기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중년인은 별놈 다 본다는 눈빛으로 풍천을 쳐다보았다.
풍천은 그 눈빛을 느끼고도 모른 척 한 가지 주문을 더했다.
“아, 미리 말씀드리는데, 작은 잔은 감질나니까 큰 잔으로 주쇼. 큰 잔 없으면 주전자 째 주던가.”
‘미친놈.’
중년인은 풍천이 또 다른 요구를 하기 전에 몸을 돌렸다.
“조금만 기다리쇼.”
풍천은 중년인이 차를 가져오기 전에 구석에 있는 두 남녀를 살펴보았다.
눈초리가 올라가서 조금은 독하게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은근히 흥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풍천은 입맛을 다시며 눈길을 돌렸다.
‘한가락 하는 자들 같은데…….’
회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의미 모를 뜻을 담은 채 한없이 깊어졌다.
‘주인이란 자도 제법이고…….’
제법 정도가 아니다. 자신의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할 수 있는 절정고수다.
하오문이 언제부터 저런 자를 분타주로 썼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천룡회 때문에 특별히 고수를 파견했나?’
그의 눈썹이 이마 가운데에서 붙을 즈음, 중년인이 차를 가져왔다. 찻주전자와 유난히 커다란 잔을.
중년인은 찻잔에 차를 가득 따라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즐겁게 드십시오.”
차로 입술을 적신 풍천은 돌아서는 중년인의 등에 대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혹시 바람에게 전할 소식 온 것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