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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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10화
210화
“해결사?”
고개를 갸웃거리던 화문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너…….”
“있죠? 맞죠? 사실대로 말해보쇼. 만약 거짓말하면 지나가는 똥개를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깁니다?”
‘그놈이다. 이놈이 바로 그놈이야!’
얼굴이 벌게진 화문오는 목을 쥐어짰다.
“있……다.”
“하, 하. 이제야 기억이 났나 보군요.”
풍천은 씩 웃으며 공손승을 바라보았다.
공손승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화문오와 풍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손 형, 오지회가 모두 신검문에 와 있수?”
“당신이 어떻게 오지회를……?”
“나에게 빚진 거 아직 잊진 않았겠죠?”
“빚진 거? 내가 언제……?”
“명령을 내리면 뭐든 한다고 했잖수? 그러니 오늘부터…… 단천무령이나 하쇼.”
순간, 머릿속의 안개가 걷힌 공손승은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서, 설마 당신이……?”
“중요한 것은 얼굴이 아니라 이것 아니겠수?”
풍천은 품속에서 단천무령패를 꺼내 흔들며 이를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었다.
공손승과 화문오가 보기에는 세상 그 어떤 웃음보다 사악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풍천은 주루로 가면서 이것저것 다정하게 물어보았다. 두 사람은 조금도 다정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신검문에 와 있는 천외천 사람들은 은천단원이 이십 명, 장로가 둘, 청년고수가 열 명으로 모두 천주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천외천을 장악한 공손무백의 명을 거역하지 않는 대신, 천룡회로 가지 않고 하남에서 신마성과 맞서는 쪽을 택했다.
공손무백으로서도 어차피 하남에 천외천의 무사들을 두어야 하기에 그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방관하고 그대로 놔두고 있다 했다.
“그럼 천주께선 아직 불귀곡에 계십니까?”
“후우, 그분은 대공에게 기회를 준 당신의 실책을 자책하시며 스스로를 천상궁에 유폐시키셨지.”
“불귀곡에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죠?”
“이백 명이 채 안 되네. 천상선원의 늙은이들과 수천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잡일을 하는 여자들과 아이들뿐이지.”
그 정도면 팔 할 이상의 힘이 대공에게 넘어갔다고 봐야 했다.
“대공에게 대항할 생각은 있어요?”
화문오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천외천은 대부분 형제로 이루어져 있네. 뜻이 다르다 해도 피를 보려 하지는 않을 거네.”
가장 큰 문제는 그 점이었다.
천외천 사람들은 뜻이 다르다 해서 서로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다만 멀리할 뿐.
그러니 천주의 세력이 남아 있다 해도 대공의 뜻을 꺾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도움은커녕 오히려 대공이 위험해지면 돕는다고 나설지 몰랐다.
물론 천응단이 상관경의나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처럼 의외의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극히 일부였고, 또한 자신은 외부 사람이기에 천응단이 서슴없이 공격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신마성과의 공멸밖에 답이 없나?’
풍천은 일단 화문오에게 확실한 답변을 들어보았다.
“만약 제가 단천무령주로서 대공과 적이 되어 싸운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화문오는 정색하고 답했다.
“우리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을 것이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일까요?”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대부분은 나와 같은 생각일 게야.”
일단 자신과 대공의 싸움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으면 좋겠는데…….’
그때였다. 화문오의 전음이 풍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공손승의 귀를 염려한 듯했다.
[이공을 찾게. 그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네.]
풍천은 아무런 표도 내지 않고 되물었다.
[어디 계시죠?]
[함께 불귀곡을 나왔는데, 중간에서 따로 움직인다며 사라졌네.]
[그런데 어떻게 찾으라고…….]
[자넨 자칭 고금제일의 해결사라 하지 않았는가?]
왠지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 말투다.
하지만 화문오의 눈을 본 풍천은 그가 결코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한마디 쏘아주려던 걸 참았다.
‘까짓 거, 찾으라면 못 찾을 줄 알고?’
[좋습니다. 제가 찾아보죠.]
[그리고…… 언제 시간 나면 숙부님을 한번 만나 보게.]
그 붉은 도마뱀 노인을?
그를 만나 보라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풍천은 순순히 대답했다.
[한번 생각해보죠.]
주루의 구석진 곳에 방을 하나 얻은 풍천은 크게 인심 써서 요리와 술을 몽땅 시켰다.
두 사람은 소태 씹는 심정으로 요리를 먹고, 쓰디쓴 약을 삼키는 기분으로 술을 마셨다.
그래도 어쨌든 먹으니 배가 불렀고, 많이 마시니 취했다.
술기운에 기분이 조금 풀어진 화문오는 붉어진 눈으로 풍천을 꼬나보았다.
“언제 다시 한번 겨뤄보자, 이놈.”
“관두죠. 노인네 팼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이 빌어먹을 놈이…….”
그때 공손승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
“우리 오지회는…… 약속을 지킬 거요, 령주. 우리 손으로 형제를 죽이는 일만 아니라면.”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약속한 것도 못 지키면 남자 새끼가 아니죠. 그건 그렇고, 화 장로님. 신검문에 있는 분 중 제일 높은 분이 누굽니까?”
“나이야 내가 제일 많지만, 지휘는 은천단주 공손문이 하고 있네. 왜, 단주하고도 한바탕 할 생각인가?”
“에이, 제가 뭐 싸움꾼인 줄 아십니까? 저는 말이죠, 해결사지 싸움꾼이 아니라고요. 가끔은 사람 목을 따는 일도 할 때가 있지만요.”
“그런데 왜 찾아?”
“우리 장인어른…… 아니, 문주님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요.”
풍천은 화문오, 공손승과 함께 커다란 술 단지 세 개를 비우고 비틀비틀 신검문으로 돌아갔다.
신검문까지 가는 도중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어댔는지, 신검문 사람들은 신마성에서 쳐들어오는 게 아닌가 싶어서 다수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풍천은 그들을 향해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한마디 해주었다.
“하하하, 밤이 늦었는데도 열심이시군요. 어디 순찰 가시나 보죠?”
그러고는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그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서 영빈각으로 갔다.
천외천 사람들은 머리꼭대기까지 취한 화문오와 공손승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잊었다.
공손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풍천에게 물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화 장로님? 자넨 또 누구고?”
풍천은 조금 전까지와 달리 멀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 하, 하.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드리죠. 저는 멀쩡한데, 화 장로님께서 오랜만에 술을 드시니 취하신 모양입니다. 꺼어억.”
4
풍천은 백무천을 만나 천외천 사람들의 의향을 전해주었다. 그들이 백무천의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을 거라는 것도.
백무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괜찮은 사위 하나 낚았다는 것에 흡족해했다.
풍천도 신검문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백무천에게 몇 가지를 요구했다.
“회남으로 가서 천룡회에 있는 비검당 사조 조장을 맡을까 하는데요.”
풍천의 무위가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걸 아는 백무천으로선 그 말을 듣고 풍천에게 어떤 목적이 있음을 직감했다.
“자네가 원한다면 허락하겠네만, 이유를 알면 안 되겠나?”
“마음대로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그게 편하거든요. 대신 일전의 별동대처럼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백무천은 눈을 반쯤 감고 검지를 구부려 탁자를 톡톡 때렸다.
천혈쌍마를 죽이고, 건곤신마와 무영신마, 신월마신의 협공을 빠져나온 절대고수가 바로 풍천이다.
그런 사람이 마음대로 움직이면서 물밑을 휘젓고 다닌다?
아마 미꾸라지가 웅덩이를 흐리는 것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수룡이 장강을 뒤집어엎는 것과 같을 것이다.
문득 앞날이 선하게 그려졌다.
천외천과 신마성의 수장들이 골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백무천은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절로 떠올랐다.
그렇다고 염려가 안 되는 것은 아니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설마 혼자 움직이진 않을 것이고, 본문 무사들의 실력으로는 자네를 받쳐주지 못할 텐데……?”
풍천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본문의 사람들은 앞을 가려주는 역할만 해주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합죠. 아참, 아직도 제가 신검문의 무사 명부에 올라가 있나요?”
백무천은 미안함이 물씬 풍기는 표정으로 풍천을 다독거렸다.
“정말 미안하네. 자네가 유령총에서 죽은 줄 알고 그만, 자네 이름을 명부에서 지웠다네.”
“잘됐군요.”
“응?”
“만약에라도 저들이 문주님께 책임을 물으면, 오래전에 본문에서 쫓겨난 사람이라고 우기십시오.”
백무천은 짐짓 인상을 쓰며 강하게 거부했다.
“그럼 자네가 사기꾼 취급받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사위가 될 사람에게 그럴 수가 있나? 난 절대 그리 못 하네!”
백무천의 목소리가 강해질수록 풍천의 표정은 감격으로 물들었다.
“그래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신검문이 안전해지고, 제가 초령이와 함께 떠나도 마음이 편하죠.”
“허어, 이거 참…… 뭐 자네가 그리해서 편하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은…….”
풍천은 그쯤에서 강한 어조로 부탁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 중요한 건데 말이죠. 공손천우를 절대 검향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주십쇼.”
5
풍천은 떠나기 전에 형을 만났다.
금조상이 말하길, 사마공유는 다 낫는다 해도 오른발을 절지 모른다고 했다.
마음이 착잡해진 풍천은 바보 같은 형을 내려다보며 짜증 내듯이 말했다.
“힘들면 집으로 가. 형 집이잖아.”
“내가 떠나온 순간부터 그곳은 네 집이 되었다. 그리고 내 집은 바로 이곳이야.”
“그놈의 고집은…….”
“초령이, 알고 보면 마음이 여린 애다. 잘해줘.”
여려? 초령이가?
‘형은 초령이가 얼마나 사납고, 제멋대로인 여잔지 모르는군. 형이 걱정해줘야 할 사람은 초령이가 아니라 나라고.’
그래도 일단은 형의 뜻을 받아주었다.
“걱정 마.”
그 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사마공유의 눈꺼풀이 자꾸만 감겼다. 약기운으로 인해서 잠이 쏟아지는 듯했다.
“안 되겠다. 그만 가봐라. 난 좀 자야겠다.”
사마공유는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풍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용히 말했다.
“사부님은 진즉 형을 용서했어. 아마 지금쯤 형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좋아서 펄쩍펄쩍 뛰실걸? 뭐 벌써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지만.”
감긴 사마공유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풍천이 돌아서는데, 가슴에서 새어 나온 물기가 떨리는 눈썹 끝에 새벽이슬처럼 맺혔다.
그는 풍천이 방을 나가기 전 웅얼거리듯 말했다.
“나중에 집에 가면, 향이라도 자주 피워드려라.”
풍천은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툭 쏘듯이 답했다.
“형이 직접 와서 피워.”
사마공유의 방을 나온 풍천은 백초령을 찾아갔다.
백초령은 다치면 가만 안 둔다는 소리를 열두 번도 더했다.
풍천은 귀가 따가웠지만, 그래도 즐겁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허풍도 치면서.
“음하하하하. 천하의 누가 나를 다치게 해? 걱정 마!”
그러다 혼도 났다.
“으이그, 일 년 동안 그렇게 고생했으면서 또 허풍떠네. 제발 좀 함부로 나서지 마. 행동할 때 두 번 더 생각해보고. 알았지?”
확실히 형은 초령이를 잘못 본 것이었다. 저런 초령이가 여린 애라니.
그래도 몸은 여렸다. 부드럽고…….
“알았다니까. 좌우간 이리 좀 와봐. 내가 선물을 줄 테니까.”
짜기가 굵은 소금보다 더한 풍천이 웬 선물?
백초령은 눈을 반짝이며 풍천을 바라보았다.
“뭔데?”
풍천은 설추교에게 대가로 받아낸 작은 함을 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서 홍모란을 집어들었다.
“이거 무지 비싼 건데, 초령이를 생각해서 거금을 주고 샀지. 음하하하.”
백초령의 눈에도 무척 귀하게 보였다. 그리고 신비한 빛깔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고마워, 풍천.”
선물을 받아든 백초령은 폴짝 뛰어서 풍천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홍모란에 대한 대가로 백초령을 안은 풍천은 황금 이십 냥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복숭아향이 나는 입술이 다가오자, 다음에는 더 큰 꽃을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입 크기를 재며 구름 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령아, 혹시 풍천과 함께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