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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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38화
238화
‘정유의 몸에 난 검흔도 저렇게 무서울 정도로 깨끗했지. 비록 검으로 인한 상흔은 아니지만 느낌이 너무 비슷해.’
그가 아는 한, 하오문 회남분타에서 자신의 수하를 죽인 자는 마도 쪽의 사람이 아니었다.
용사정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간직했다.
그는 방황하던 마음을 정리한 상태였다. 대공자 공손선우의 죽음도 그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2
새벽녘, 공손선우의 죽음이 천룡회 총단에도 전해졌다.
공손무백은 교비은을 밖으로 내보낸 후 눈을 감고 석상처럼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극한의 분노가 심장이 찢어지는 슬픔으로 변하고, 슬픔이 사라지며 얼음보다 더 차가운 냉정이 그를 지배하는데 정확히 한 시진이 걸렸다.
그는 한 시진이 지나자 교비은을 불렀다.
“비은, 밖에 있으면 들어와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
하지만 교비은은 솜털이 곤두서는 오싹함에 몸이 굳어서 숨을 깊게 들이쉰 후에야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예, 주군.”
교비은은 방안으로 들어가 공손무백 앞에 섰다.
“부르셨사옵니까, 주군?”
“곡에서 나온 무사들은 지금 어디까지 왔다고 하더냐?”
“내일 중으로 안휘에 들어설 것이옵니다.”
“이곳에 남은 전력 중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되지?”
“본 천의 형제와 적련방의 무사를 합해서 구백 정도 되옵니다.”
“본좌가 직접 나서서 전력을 회령장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담청에게도 연락하고, 모든 준비를 한 시진 안에 끝내도록 해라. 그리고 본 곡에서 오는 무사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곳으로 오지 말고 회령장으로 가라고 해라.”
교비은은 부르르 몸을 떨고 허리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주군.”
“중원의 대지가 붉게 물들고, 장강에 핏물이 흐른다 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놈들로 하여금 선우를 죽인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니라.”
무덤덤하게 흘러나오는 고저 없는 목소리가 방안의 공기를 짓눌렀다.
바닥이 푹 꺼져서 만장 깊이의 무저동으로 빠져드는 기분.
교비은은 식은땀이 나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대공자가 죽은 이상 이제 다른 길은 없다. 천하를 얻든, 빈손으로 죽든, 끝장을 보는 수밖에…….’
3
동이 트자, 천외공자 공손선우가 마도연합의 고수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풍천은 하품을 하면서, 헐레벌떡 뛰어와 소문에 살을 붙여서 떠들어대는 백승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낫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야 적에 대한 적개심도 생기고, 같은 편끼리의 의심도 거둘 수 있을 테니까. 멍청한 인간이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와 달리 백승문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대공께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공손이향이 나직이 말하며 풍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만큼 공손선우의 죽음을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인 듯했다.
풍천은 그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사람처럼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러겠죠. 자식이 죽었는데 제정신이면 그게 이상하죠. 어쩌면 지금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사람들은 만사태평한 풍천의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어떻게 나올 거라 보나?”
백리진학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풍천은 어깨를 으쓱하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나오긴요? 당장 마도연합 놈들을 쓸어버리겠다고 하겠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은 풍천의 말에서 비릿한 피 냄새를 느끼고 입을 닫은 채 코끝을 씰룩였다.
“자넨 어떻게 할 생각이지?”
“어떻게 하긴요? 비검당 사람으로서 마도연합을 부수는데 한팔 거들어야죠.”
마치 장난처럼 들리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때 은양이 풍천을 직시한 채 질문을 던졌다.
“령주는 누가 공손선우를 살해했을 거라고 보나? 정말 마도연합 놈들이 죽였다고 생각하는가?”
“누가 공손선우를 죽였는가, 하는 문제는 지금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죠. 어차피 누가 죽였든 범인은 마도연합이 되어야만 하니까 말이죠.”
“무슨 말이지?”
“내분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적을 향해서 적개심을 품는 게 낫다는 거죠.”
“흐으음…….”
“좌우간 곧 출동명령이 떨어질 것이니 모두 몸 상태나 최고조로 끌어 올려놓으십쇼. 특히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아놓으쇼. 그래야 무리하지 않고 적을 상대할 수 있을 거 아뇨?”
몇몇 사람은 풍천이 왠지 수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딱 꼬집어서 뭐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 굳이 먼저 나서서 물어보진 않았다. 풍천의 성질을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풍천은 더 이상 질문이 없자 초웅을 바라보았다.
“초웅아, 우리 주방에 가서 먹을 것 있나 물어볼까?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이상하게 더 배가 고픈 거 같다.”
“가, 형. 나도 배고파.”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 공손무백이 회남에 모인 무사들을 이끌고 내려올 거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철목보에 있는 마도연합의 무사들은 그때까지도 일절 움직이지 않고 조용했다.
그리고 미시 초 무렵, 마침내 공손무백과 담청이 구백여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회령장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살얼음판을 걷는 긴장감이 회령장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공손무백은 곧바로 공손선우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반 시진에 걸쳐서 꼼꼼히 시신을 살펴본 그는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한 시진 가량 이어졌다.
하지만 공손무백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의 안건은 단 하나, 철목보 공격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날 밤.
풍천은 삼파를 지휘하는 진대원과 석초산, 곽인효, 구양진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진대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풍천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본 후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철목보를 공격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해서 그전에 먼저 여러분과 분명히 해둘 것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평소와 다른 풍천의 말투에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귀가 간지러웠다.
“뭘 말인가?”
“저는 신마성이 주도하는 마도연합이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거야 우리도 마찬가지네.”
“하지만 천외천이 대승을 거두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
“좀 더 솔직히 말해서, 두 곳이 동시에 무너지길 바라고 있는 거죠.”
이제야 조금은 풍천다웠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그래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제가 하라는 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말인가?”
풍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만약 그게 안 되면, 저는 내일 싸움에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풍천 일행이 빠진다면 삼파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이다. 네 사람 모두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아서 탈이었다.
진대원은 달래듯이 말하며 풍천의 마음을 바꾸려고 했다.
“이보게, 풍 조장. 굳이 그럴 것 있나?”
“있습니다.”
있다는데 어쩔 건가?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는가?”
곽인효가 풍천을 직시한 채 물었다.
풍천은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둘 다 싫거든요.”
과연 풍천다운 대답이다.
네 사람은 골치가 지끈거렸다.
‘끄응, 미치겠군.’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괜히 왔군. 종 아우가 등을 떠밀지만 않았어도 모른 척하고 방에 있는 건데…….’
그나마 석초산이 제일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풍천의 의도를 자세히 물어보았다.
“싫어하는 이유를 말해보게. 납득이 간다면 자네 말대로 하지.”
그런데 풍천이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석초산을 다그쳤다.
“몰라서 묻습니까? 신마성은 무조건 물리쳐야 하는 적입니다. 그죠? 그리고 천외천의 공손무백은 은근슬쩍 구룡회를 거머쥐고 안휘에서 대장 노릇이나 하려는 자입니다. 아니 안휘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천하를 쥐려 할 겁니다. 쉽게 말해서 그 욕심이 신마성의 혁련궁과 별반 다를 게 없단 말이죠. 그래서 싫어하는 건데 뭘 자꾸 물어요?”
겨우 한 번 물어봤을 뿐이다. 그런데 언제 자꾸 물어봤다고 그 난리란 말이야?
석초산은 입을 꾹 닫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진대원과 곽인효, 구양진도 눈치만 봤다.
그때 풍천이 말했다.
“뭐 말이 없으신 거 보니까 대충 제 말을 이해하신 것 같군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자세한 것은 내일 철목보의 상황을 직접 본 다음에 말씀드리죠.”
네 사람의 얼굴이 묘하게 구겨졌다.
어물거리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랄까?
문제는 이 상황에서 마땅히 할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일의 싸움에서 풍천을 제외시킬 수는 더더욱 없고.
‘빌어먹을, 나도 모르겠다.’
‘어찌 되든 풍천이 없는 것보단 낫겠지.’
4
철목보에 공손선우의 죽음이 전해지자, 마도연합의 수장들이 철목전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며 자신들이 들은 정보를 확인했다.
“정말 공손선우가 죽었단 말이오?”
“그렇다는 소식입니다.”
“누가 그놈을 죽인 거요? 우리 쪽에서 살수를 보낸 겁니까?”
“군사나 혁련 공자도 모르는 일인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누가 죽였든 잘 된 일 아닙니까? 하하하하!”
모여든 자들은 대부분 공손선우의 죽음을 기뻐했다.
하지만 몇몇은 그의 죽음이 결코 마도연합에 유리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섭위릉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비정상적으로 벌어진 일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는 법이었다. 크기만 다를 뿐.
“군사,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가?”
그가 입을 열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우를 향했다. 사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최소한 저희 쪽 사람이 저지른 일은 아닙니다.”
“그것 참, 괴이한 일이군. 우리도 아니면 누가 그를 죽인 거지?”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연좌평이 고개를 사선으로 비튼 채 별걱정 다한다는 투로 말했다.
“고민할 게 뭐 있습니까? 적의 고수 중 하나가 줄어들었는데, 우리에겐 잘 된 일 아닙니까?”
사우는 그를 바라보며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손해될 것은 없지요. 문제는 우리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누가 죽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중요한 것은, 적의 고수가 죽었다는 것 아니겠소, 군사?”
“만약 범인이, 우리와 천룡회가 싸우는 것을 원해서 그를 죽인 거라면? 그래도 우리에게 좋은 일일까요?”
연좌평은 입을 닫고 이마만 찌푸렸다.
사우는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며 신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들의 안방에서 치욕스럽게 살해되었습니다. 당연히 분노의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지요.”
“어차피 전쟁 중인데, 저들의 분노가 전보다 더 커졌다 해서 달라질 게 뭐 있단 말이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앞으로 저들의 행동방식이 완전히 달라질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럼 우리도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말이 되지요.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연 단주.”
사우의 말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섭위릉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공손무백이 직접 움직일 거라 보는가?”
“그렇습니다, 대장로.”
“그가 직접 나설 경우 어떤 점이 달라질 거라 보는가?”
“분노한 그는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세상이 피로 뒤덮인다 해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전보다 몇 배는 더 어려워질 거란 말이지요.”
“허어, 적이 죽었는데도 즐거워할 수가 없다니. 대체 어쩐 작자가 그를 죽였는지 모르겠군.”
섭위릉이 마뜩찮은 말투로 말하며 답답해하자,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혁련후가 눈을 들고 물었다.
“어떤 자들이 그를 죽였을 거라 보십니까?”